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랫동안 숙제처럼 끌어안고 있던 제발트의 <이민자들>을 이제야 정리한다.   

<이민자들>은 아픈 역사의 한 시대를 살다 이름도 없이 파묻힌 어느 개별자들에 대한 회상이며 기록인 동시에 픽션이다.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상당부분 녹아있는 듯한 소설은 네 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물들은 대부분 유태인들이다. 헨리 셀윈 박사, 파울 베라이터, 암브로스 아델바이트, 막스 페르버가 그 주인공들이다. 독일의 슬픈 역사의 한 시대를 겪었던 소설 속 인물들은 기억의 상처를 안고 타국을 떠돌다 사라져버리거나, 느닷없이 자살하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가 고독한 생을 마감한다. 소설은 그들이 끝내 돌아가지 못했거나 돌아갈 수 없었던 과거의 그 장소들을 서술자가 오랜 시간 동안 찾아다니며 그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참을성 있게 이야기를 듣고 메모하고 그들의 일기와 사진첩들을 수집하고 정리한다.  

 

<이민자들>은 주인공들의 이력이 타인의 회상으로 진술되는 독특한 서술 형태로 쓰였다.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는 저마다의 이타카를 품고 죽을 때까지 떠돌아야 하는 어느 개인들의 삶이, 돌아갈 곳 없는 그들의 삶 이면에 깊이 자리 잡은 심연이, 때로는 독백으로, 때로는 긴 대화로, 아프게 펼쳐지는 내면의 심리묘사와 슬프도록 아름답게 이어지는 자연의 묘사들로 환기된다. 그런가하면 소설 곳곳에 아무런 설명 없이 의도적으로 끼워 넣은 듯한 흑백사진들은 죽은 자들과 장소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언하며, 거기서 그들의 아픈 삶의 비명이 소리 없이 새어나온다.

<이민자들>에게 있어 ‘고통스런 기억은 불행이 되고 그 불행이 박아놓은 뿌리는 너무나 깊어 거듭 땅을 뚫고 나와 사악한 꽃을 피우고, 독기 품은 잎으로 머리 위에 천장을 만들고는 그들의 생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어둠으로 덮어버린다.’(P.240) 그렇게 지독한 과거의 기억은 ‘최후의 것마저 파괴하는 것’이라서 ‘풀잎을 세며’ 또는 ‘나비 잡는 사람을 기다리며’ 잊으려 애쓰지만 어느 순간 상처는 터지고 그 틈새에서 고통스런 비명이 새어나오곤 하는 것이다.

‘기억이란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P.183)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하루가, 한 시간이, 한 번의 맥박이 지나갈수록 모든 것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고, 아무런 특색도 없는 추상적인 것들로 변해’(p.73)가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혼의 고통은 한마디로 무한하여 고통의 극단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더 큰 고통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 심연에서 저 심연으로 다시 떨어지는 것이다.’(P.214)

어쩌면 기억은 지독한 그리움이 만들어낸 허상인지도 모르고, 그런 허상들은 ‘날이 갈수록 모호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별스럽고 더 정밀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과거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시도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고통이기도 했고, 구원이자 동시에 가차 없는 자기 파괴이기도 했다. ‘자연도 방치해두면 신음소리를 내며 점점 함몰’되듯, 그들의 삶도 그렇게 점차 함몰되어갔으니. 


이름 없이 한 시대를 살다가 슬프게 사라져간 사람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다시 돌아온다. 때로는 ‘칠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얼음에서 빠져나와, 반들반들해진 한 줌의 뼛조각과 징이 박힌 신발 한 켤레로 빙퇴석 끝에 누워 있’(35쪽)기도 하고, 이렇듯 어느 개인들의 기억 속에 묻혀 있다가 회상으로 진술되는 삶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인간은 저마다 나름의 기억들을 안고 살아간다. 빛으로든 그림자로든 항상 주위에서 서성거리며 맴도는 기억들, 우리는 그런 기억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기억은, 실체는 없으나 이미 일어난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마음대로 돌이킬 수도 없거니와 바꿀 수도 없는 우리네 삶의 그림자이다. 아름다운 기억일수록 세월이 지남에 따라 오히려 더욱 슬퍼진다. 그리고 때로 그 기억은 독립된 의지를 가지고 있기라도 하듯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고립시키고 고독하게 만들기도 한다. 마치 그것이 존재의 이유이기라도 한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과거’라는 시간을 떠나온 ‘이민자들’일 수밖에 없으므로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저마다의 잠재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날이 어둑해 지면 어김없이 그들이 와서 삶을 찾는다. 서늘한 바람이 가슴 한구석을 훑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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