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자로서 가야만 하는 고독한 길이지만, 내가 원하는 일이고 삶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글쓰기'라는 일. 비록 작가가 아니어도 운명처럼 짊어진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내기에 크게 도움이 될만한 글이다. 

  
우리는 고독한 이로 출발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실 선천적으로 고독하다. 만약 끈기 있게 노력하고 기술적으로 낙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간, 공간, 언어, 민족 정체성이라는 인공적인 경계선을 초월하는 문학이라는 신비로운 대체 세계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예술 활동은 개인의 고독으로부터 홀연히 나타나서 다채로워지며, 끝없이 매혹적이고, 언제나 진화한다. 

  

글쓰기는 가장 외로운 예술이다. 허구적이고 은유적인 대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세계에서 물러나는 행위는 아주 미묘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우리는 왜 읽는가? 은유의 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작가이든 독자이든, 왜 어떤 사람들은 때로 현실 세계를 배제하면서까지 '대체 세계'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 지배적 문화를 만들어낼까? 나는 살아오면서 오랫동안 이런 문제들에 대해 생각했지만, 최종적으로 보이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최종적인 답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후기의 우울한 논문 <문명과 그 불만>(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에서 말한 것처럼 "아름다움은 분명 쓸모가 없다. 명백한 문화적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문명은 그것 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는 말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 답변은 충분할 것이다.  

 

글쓰기는 외로운 작업이지만 예술이기 때문에 우리는 글쓰기에 대해서 '배울' 수 있다. 글쓰기는 무의식에서 원동력을 얻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가 '의식'하고 능숙해지도록 훈련할 수 있다. 분명 우리는 자신의 실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실수에서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영감에 의해 영감을 얻을 수도 있다. '실패의 기록', '영감!', '자기비판이라는 불가사의한 예술'에서 나는 특히 헨리 제임스,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를 통해 우리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이 고독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느꼈던 개별적인 작가들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 심리학적/미학적 문제의 공통성을 제시했다. 'JCO와 나'에서는 모든 작가들이 느끼게 되는, 시간이 갈수록 특별하게 느끼게 되는 정체성의 무시무시한 혼란에 대해 얘기했다. 바로 우리는 글쓰는 자아들인 동시에 글쓰는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 조이스 캐롤 오츠, (<작가의 신념(Life, Craft, Art)>,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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