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리피쉬
해이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일상이 고단하거나 마음이 부대낄 때 나는 소설 속 세상으로 도피한다. 그것은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오랜 욕망이나 갈등을 자극시켜서 어떤 새로운 자각이 생기거나 새로운 가능성이 제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 속의 삶이 더 괴롭고 번잡하기도 해서 매번 원하던 바를 얻지는 못한다. 다행히 거기서 만나는 세상이 내 안의 욕망을 자극해주고 갈등을 해소할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면, 그래서 덮었던 책장을 다시 펴고 싶게 만든다면 나는 그 소설을 ‘좋은 소설’이라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해이수의 소설은 ‘좋은 소설’이다.  


  그의 두 번째 소설집 <젤리피쉬>를 반갑게 집어 들었다. 첫 번째 소설집인 <캥거루가 있는 사막>을 의미 있게 읽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더욱 깊어진 시선으로 초조하게 요동치는 내 마음에 균형을 잡게 해 주었다. 

 

해이수의 소설은 그렇다. 때때로 개구쟁이 같은 모습으로 독자에게 웃음을 유발케 하다가도 돌아보면 어느새 그는 존재의 저 깊은 내면을 응시하고 있다. 저 혹한의 에베레스트의 고쿄 정상에서, 룸비니의 거리에서, 케냐의 초원에서, ‘나이샤바’ 호숫가에서…
  또한 ‘어떤 특정한 사건이 그때를 준비한 듯 절묘하게 일어나서 체험자의 뇌리 속에 영원히 각인되는 찰나(p.137)’, 즉 ‘순간이자 영원’인 카이로스의 시간을 독자가 함께 경험하게 한다.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간혹 터지는 웃음 뒤에도 왠지 가슴 저 밑바닥이 아릿한 슬픔으로 채워진다. 그것은 작중 ‘나’의 시선(작가의 시선에 다름 아닌)에 포착되는 인간에 대한, 세상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나는 늘 떠남을 꿈꾸지만 자질구레한 핑계들을 걷어낼 용기가 없어 선뜻 나서지 못한다. 그런 나를 일깨우기라도 하듯, ‘인간은 자신의 운명과 마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추월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스피드로 원하는 방향을 향해 꾸준히 가면 된다.’(P.144)고 말한다. 그 자신만의 스피드로 옆을 비교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는 일이 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과의 힘들고 고독한 투쟁일 터이므로.    

 

안락하고 익숙한 자리에서의 부대낌은 투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낯선 곳에서 철저히 혼자가 되어 보아야 비로소 진정한 자신의 내면과 만날 수 있을 테니. 그래서 더욱,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리라’는, 「나의 케냐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서 주인공이 반복해 중얼거리는 헤세의 시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는 이 순간에도 또 다시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떠났다가 돌아오고, 달라진 듯 같아지는 걸 확인하면서 조금씩 바뀌는 걸지도 모르’지만, ‘이후에 바뀌든 안 바뀌든, 해답을 얻든 못 얻든 걷는 중에 스스로 의문을 갖는 것, 그런 물음이 얼마나 중요한’(p.79)지 그는 이미 알고 있으니.   

 

책장을 덮고 눈을 감았다. 말라리아 약을 먹지 않고도 케냐의 초원이, 히말라야의 설산이 눈앞에 있었고, 그곳에서 부는 바람이, 아프게 매운 눈보라가 피부로 느껴졌다. 또한 ‘나’가 아직 가지 않은, 그렇지만 기어이 밟게 될 저 북방의 빙하까지도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먼 여행을 하고 돌아온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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