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가능한 이야기들, 작가가 쓸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을까?
자신에 관해서는 털어놓기를 거부하는 작가의 경우는 어떨까?
그는 자신의 자아를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방식으로 보편화하려 하지 않으며, 자신의 희망이나 좌절에 대해, 여자들 곁에 눕는 자신의 버릇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털어놓아야 할 의무감을 아예 느끼지 못한다. 그럴 뜻은 아예 없이, 그는 신중하게 뒤로 물러서서 사적인 부분은 깍듯이 제쳐놓고 마치 조각가가 재료를 다루듯 자기 앞의 소재에 임하여 오직 그것에만 매달려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여기저기 노출되는 노골적인 무의미함을 부인하기 어려우면서도 일종의 고전주의자가 되어, 당장 절망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것이다. 이런 작가의 경우, 창작은 한결 힘들어지고 외로워지며 또한 무의미해지기 마련이다.
……이미 단 한 푼에서부터 영혼을 출자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고백이, 다름 아닌 솔직성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또 한층 차원 높은 가치나 도덕률이며 쓸 만한 교훈들이 제공되어야 하고, 기독교적이든 유행성의 절망이든 그 무엇인가가 극복되거나 긍정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 문학이라 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을 생산해내기를 점점 더 완강하게 거부하는 작가의 경우는 어떨까?
그는 창작의 근거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그때그때 처방된 상황에 몸담은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에, 믿음과 회의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는 바로 이런 것이야말로 실로 독자와는 무관한 것이며, 쓰거나 틀을 만들어 형상화하는 문제에 있어 자신의 작업으로 족한 것이라고 여긴다. 입맛에 맞게 표면만을 보여주고 오로지 거기에 매달려 작업해야 한다는, 요컨대 입을 다물고 아무 주석도 달지 말고 수다도 떨지 말아야 한다는, 그런 견해를 갖고 있다.
이런 작가의 경우, 위와 같은 인식에 이를 때쯤이면 그는 말문이 막히고 주저주저하며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다. 이는 실로 피할 도리가 없는 상황일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이야깃거리, 곧 소재가 없다는 예감이 솟구치고 심각하게 퇴장을 고려하게 될 것이다.
<……>
찌푸린 날씨와 경제호황, 걱정과 탄식, 사사로운 일상사로 인해 받는 충격들, 그런데도 세상 전체와는 무관하며, 사물이나 불가해한 요소의 흐름이나, 숙명의 얽힌 문제를 푸는 일과는 무관한 충격들.
<……>
이 먼지투성이 길가, 고장 난 자동차, 아이스크림 광고판과 전몰자의 기념비들 곁에서, 아직도 가능한 몇 가지 이야기들이 생겨나고 있다. 흔해빠진 보통 얼굴에서 인류를 간파함으로써, 불운의 무의식중에 보편적인 것으로 확장시킴으로써, 법정이며 정의, 어쩌면 은총까지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화하게 되는 것이다. 우연히 한 주정뱅이의 외눈 안경에 잡혀 반영되는 바람에……
- F. 뒤렌마드의 「사고」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