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구사회를 뒤흔든 위대한 소설' '20세기를 마무리 하는 작품' '우엘벡 최고!' 와 같은 미사여구로 치장되는 우엘벡의 <소립자>를 드디어 읽었다. 열린책들의 세계문학은 하드커버임에도 장정이 가볍다는 것 말고는 빽빽한 글 때문에라도 도저히 좋아할 수 없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면 그런대로 빽빽한 자간과 행간에 적응되는 이상한 특성이 있다. 특히 <소립자>의 경우 미셸 우엘벡이란 작가의 이름도 어렵지만, 소립자라는 과학용어도 몹시 낯설었음으로 책을 펼치기까지 어떤 각오가 있어야 했다. 20세기 최고의 작품을 읽어내고야 말겠다는!

 

소립자가 뜻하는 것이 파편화된 각 개인이라는 것을 알겠다. 현대의 각 개인들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종교나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어 쾌락을 쫓는다. 어떻게 살아도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삶은 천하고 비열하기에 말초적인 관계속에서 죽음의 고통을 잊고자 하는 것이다. 그 속에 인류를 구원할 마지막 희망인 사랑은 없다. 우엘벡은 혹시 인간에겐 본시 남녀간의 사랑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연민도 없다는 그 말을 하고자 어쩌면 변태적으로 여겨질만 한 그렇게 많은 성애 장면을 그렸던 것은 아닐까.

 

서구인들이 <소립자>를  세기말을 반영하는 최고의 소설로 지칭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그것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다소 의아하다. 우엘벡은 소설의 여기저기에서 인종 차별주의적 발언을 서슴치 않고, '이슬람은 가장 어리석은 종교'라고 칭할 만큼 종교에서 조차도 편파적이다. 또한 우엘벡은 육체조건으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듯한 발언도 서슴치 않으며, 이는 유성생식을 하는 인류 대신 무성생식을 하는 새로운 종의 탄생의 예고로까지 이어진다. 인간 존엄의 가치를 최고로 치며, 가부장적 권위와 일부일처제에 기반한 가족간의 사랑, 인간에 대한 연민, 휴머니즘을 전통적으로 지지해온 동양에서조차 우엘벡의 소설이 찬사를 받는 것에 다소 어리둥절한 것이다. 어쩌면 겉으로 드러나 추구되어온 가치와는 다른, 추함을 뒤집어쓰고 숨겨져있던 본성을 드러내줬기 때문에 더 환영받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서구사회는 1970년대를 전후해 피임의 합법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성적인 해방을 맞고, 사회 전반에 쾌락을 쫓는 기류가 형성된다. 그 속에서 한 개인은 육체의 미적 가치와 젊음의 정도로 판단된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해서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쾌락을 존중하는 사회에서는 젊은 육체만이 존중받을 만한 것으로 치부되고, 그러한 세계는 점차로 인간적인 가치들이 메말라가며 황폐해진다.

동양적 가치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주인공 미셸 제르빈스키의 인간에 대한 기계적이고 비정한 세계관이 그다지 거북스럽지 않았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처럼 고통을 벗어나 늘 행복한 혹은 도취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또 서로 우월해지려는 다툼없이 합리적 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회가 가능하다면 인간 외의 다른 종으로 진화된다한들 어떠한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사랑이란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투영이고 보면, 한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음에도, '흰머리 파뿌리되도록'이란 말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강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가족적 가치만이 소중한 것으로 여기며 한 인간을 억제한다고 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드러나지 않게 곪은 사회가 더 무서운 사회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거짓으로 가득찬 세상이라는 것은 이미 누구나가 느끼는 바가 아닌가.

 

한편 이 소설은 인간 공통의 고통과 쾌락을 떠나, 미셸과 뷔르노의 개인사이기도 하다. 미셸과 뷔르노는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그둘 모두 어머니의 사랑은 알지 못하고 성장한다. 이후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를 결정하는 '절대적 존재와의 유대'라는 초기경험이 둘 모두에게 전무한 샘인데, 이는 미셸과 뷔르노의 이후 삶에 정반대의 모습으로 발현된다.

미셸은 사랑도 쾌락도 추구하지 않은채로 비정하고도 기계적인 감정으로 인간을 뛰어넘는 '종'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한 미셸도 전 인생을 통해 바라는 게 있었다면, 그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였다고 고백한다. 반대로 뷔르노는 쾌락을 쫓는 삶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주고받는 말초적 쾌락 속에서 뷔르노는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5세 이전의 초기경험을 중요시한 프로이트의 이론이 아니더라도 절대적 존재에 대한 의지의 경험은 개별적 인간을 서로 묶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하는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아니던가. 

불교에서 보는 세상에 대한 관점 '인드라망'이 생각난다. 인드라라는 한없이 넓은 그물에 꿰인 구슬들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비추어주는 관계라는 인드라망. 우리는 모두 인드라의 넓은 그물에 걸린 구슬이다.

 

미셸이 할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괴물같은 울음을 토해내는 장면과, 절대적 쾌락의 표현으로 뷔르노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느끼는 크리스티안의 최후의 모습은 너무 가슴이 아팠다. 최정례 시인은 '죽음'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다는 듯이 / 본처들은 급습해 첩의 머리끄뎅이를 끌고 간다 / 상투적 수법이다 / 저승사자도 마찬가지다'

미셸 체르빈스키의 연구가 실제로 성공할 수 있는 그런 것이라면, '죽음'도 모르는 그런 종이 탄생했으면 좋겠다. 너나 할 것없이 우리 모두가 슬픔 속에 지척대는 이유는 언제 어느순간 덮칠지 모르게 매복해있는 '죽음' 때문이려니. 체르빈스키처럼 비정함은 갖추지 못한 나는, 인간 '종'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런 반면 뷔르노와 크리스티안의 성애장면은 외설스럽기보다 지루하고도 지루해, 우엘벡이 포르노에 가까운 장면에 왜 이토록 집요하게 집착하는 것인지 다소 당황스럽기도 한 한편으로, 인간 모두가 '죽음'이 두려운 만큼 '성'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읽는다 - 독서본능 문정우 기자가 만난 울림 있는 책
문정우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지은이 문정우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은 <시사IN>에서 '독서여행'과 '독서본능'이란 제목으로 연재된 서평을 묶은 것이다. 서평이란 말을 쓰는 것은 항상 조심스러운데 사실 나는, 평론적 의미가 짙은 '서평'보다는 '책을 읽고 난 후의 개인적 느낌', 혹은 '독서 감상문' 정도의 글을 좋아한다. 내 자신이 무엇을 읽고 평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이런 저런 평이 담긴 글은 읽기에도 피곤하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잘 안다면 직접쓰지, 하는 억하심정이 생기기도 하기 때문에 굳이 서평이란 부제가 달린 책은 피하려 한다. 이것은 아마도 기질적인 문제로, 내가 타고난 '삐딱이'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글 속에는 글을 쓸 당시 지은이의 경험과 세계관, 즉 그 자신이 오롯이 녹아있으니, 글을 평한다는 것은 곧 글을 쓴 사람을 평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며, 또한 당시의 감정이나 세계관은 이후에도 많은 변화를 겪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누가 누구를 평한다는 그 자체가 싫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지은이가 이 책을 자신이 썼다고 우기는 대신 많은 작가들이 독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전하기만 했다는 그의 말은, 책을 읽고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얻는 행위를 몹시 개인적인 것으로 보는 나로서는 무척이나 반가운 이야기였다.

어쨌든, <나는 읽는다>는 시사IN의 전 편집장이기도 했던 문정우 대기자가 쓴 '책을 권하는 책'인 것인데, 그간 읽어온 '책 권하는 책'들과는 사뭇 다르다. 읽고싶은 도서 목록을 마치 쇼핑목록 고르듯 쉽게 훌훌 넘길 정도로 가볍지도, 그렇다고 평론의 성격이 짙어 읽기에 지레 지칠 정도로 무겁지도 않은 개인적 감상과 전문적 설명의 중간쯤에 속하는 독서 에세이, 혹은 독서 칼럼 이라고 보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여기 실린 책들도 인문학, 사회과학, 교육, 경제, 그리고 무엇보다 쉽지않은 자연과학 정도의 책들로 가볍게 읽을 책들은 아닌 것이다. 지은이 자신도 평소 소홀했던 경제나 과학 분야의 책도 비교적 열심히 읽어 상실(경제), 뒤틀림(역사), 인간, 행성(과학) 등의 네 가지 분야로 배분해 책을 구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모든 내용(뉴스, 정치, 과학, 교육, 교역, 종교를 포함)이 오락적 형태를 띄기 때문에 문제라고 지적한 닐 포스트먼의 <죽도록 즐기기>와 거짓 세상에서는 불온한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는 황주환의 <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을 읽는다고 해서 나가 곧바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재탄생되지는 않을 테지만, 어쨌든 나는 라캉이 말한 '그것'이 있는 인간으로 차츰 나아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읽는다. 그렇기에 문정우와 같은 책읽기의 선배, 달인, 혹은 대가들은 무엇을 읽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갈피를 잡아주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역할에 아주 충실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악하기 때문에 악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선을 추구하고 행복을 찾다가 그렇게 될 뿐이다.'

매리 윌스톤크래프트 라는 사람이 한 말이라는데, 첫 페이지에서 이 말을 발견할 때부터 나는 이 책에 홀딱 빠졌다. 악한이 따로 있을수 없다는 내 평소의 지론을 이 한마디보다 더 잘 표현하는 말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극히 이기적이며,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그런 생각은 눈 앞의 이익 앞에서는 한없이 유약해지는 나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지.

따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이 말을 한 사람과 계몽주의 사상가 매리 윌스톤크래프트가 동일인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첫장에 쓰인 이 말로 <심플 플랜>의 전체 줄거리를 충분히 축약할 수 있다. 또한 나는 <심플 플랜>을 읽으며, 최근에 읽은 <솔로몬의 위증>에서, '인간은 거짓말을 하지. 끝까지 거짓말을 하며 진실을 밝히려 들지 않아. 죄가 있는 인간일수록 더더욱 그래.' 라고 한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말도 떠올랐다. 인간은 거짓말을 한다. 자신이 잡은 행운을 놓치지 않기위해서라면 거짓말 뿐만 아니라, 살인까지도 할 수 있는 그런 종자라는 이야기를 하는 책이 바로 이 <심플 플랜>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본시 내 몫이 아니었던 것을 내 것으로 삼기위한 거짓말과 내 잘못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에 더해, 온전한 내 이익과 안위를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것이 정말 사람일까. 방해가 되면 없앤다는 이 간단한 계획이 거짓과 거짓으로 부풀어 올라 살인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이 거대한 '악'을 '악'으로 여기지 않으며, 그저 그래야만 '내가 살 수 있다'고 믿는 이 지독한 '이기'가 정말 인간의 본성인 것일까.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31일, 한 형제가 숲속에 전복된 채로 발견된 비행기로 부터 엄청난 행운을 거머쥔다. 특별히 빈곤하진 않았지만, 그다지 넉넉하지도 못한 아주 평범한 성장환경을 가진 형제에게 그 행운은 평생 만져보지도, 구경하지도 못할 만큼의 현금이었다. 뚜렷한 직업이 없는 형은 그의 친구 루와 함께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꼭 그 돈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동생 행크는 그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입장도 아니었음에도, 그 돈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랬다. 지금까지의 굴레와도 같은 일상을 벗어나자면 가욋돈이 절실하지 않은 평범한 중산층인 행크에게도 행운과도 같은 엄청난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눈이 먼 것처럼 보이는 돈덩이가 눈앞에 떨어졌다. 아무도 모르게 그 돈을 자신의 돈으로 삼을 수 있다면, 일생일대의 엄청난 행운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돈에는 바로 그 힘이 있을 것만 같다. '새 삶'을 살 수 있는 엄청난 힘이.

그들은 생각처럼 새 삶을 살게 되었을까.

행크와 그의 아내가 돈과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반복해서 저지른 악행에 비해 그들이 함께 치루게 되는 죄값이 너무 작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한편으로, 단순한 행복을 느끼던 돈을 발견하기 이전의 삶으로는 절대 되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자, 그보다 더한 죄값도 없겠다 싶다.

 

나 였다면, 그 돈 더미를 행운으로 여기지 않을 재간이 있었을까. 당연히 돌려주었을 어쩌다 주운 지갑 안에든 돈 몇푼과 신용카드 몇 장이 아닌 것이다. 새 삶을 살 수 있는, 그간에는 꿈조차 꿔보지 못한 거액의 그 돈을 내 돈이라고, 내 발밑에 떨어진 바로 나에게 주어진 행운이라고, 그러니 놓칠 수 없고, 놓쳐서도 안되는 내 몫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재간이 있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행크나 그의 아내와는 달리 두번의 고민도 필요없이 바로 신고하고 털어 버렸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없다. 나라는 사람에게도 '돈'이 주변의 모든 것보다도 귀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 문득 슬프다. 내 인간성의 바닥을 보게 될 것 같은 그런 '불운'은 내게 일어나지 않길 바랄 수 밖에.

 

또한 이 책을 읽으므로써 인간은 이기적이며,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기에 얼마든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평소의 내 지론을 약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이기적이며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 인간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적 생각이 가능한 것 또한 인간이기도 한 것이다. 행크 부부는 멈춰야할 때 멈추지 못했기 때문에 불운을 짊어진채 나머지 삶을 살아야만 하게 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
제스 월터 지음, 오세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땡볕이 내리쬐던 지난 초여름 어느날의 오전 시간, 네다섯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꼬마가 할머니와 함께 버스에서  핸드폰으로 야구경기를 보고 있었다. 꼬마가 응원하는 팀이 안타라도 맞은 것인지, 꼬마는 할머니와 함께 "괜찮아"를 구호처럼 외치기까지 했다. 게으름을 부리다 출근이 너무 늦어버린 것 때문에도 조바심이 났지만, 무엇보다 에어컨을 켜기엔 조금 쌀쌀하지만 태양은 너무 강렬한 그런 날, 다소 신경을 건드리는 꼬마와 할머니 때문에 머리 꼭대기까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버스에서 다른 사람은 생각지 않고 시끄럽게 구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에 더해 겨우 네다섯살 된 꼬마까지 스마트폰에 길들여지는 장면을 생생하게 보고있는 것 같아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한참을 스마트폰에 집중하던 꼬마는 느닺없이 해 때문에 머리가 뜨겁다며 징징대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아이와 자신의 자리를 바꾸었지만, 태양으로 부터 아이의 머리를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괜찮아"라고 조그많게 아이를 다독였다. 이에 꼬마도 조그만 두 주먹을 모아쥐고 자기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아"라고 조금 큰 소리로 외쳐댔다. 짜증스럽게 할머니와 아이를 보던 나는 순간 살풋 웃음이 났다. 조그마한 아이도 누군가 '괜찮다'라고 말해줄 때, 정말 괜찮다고 자기 스스로를 달랠 수 있다는 것이 대견하기도, 안쓰럽게도 했던 것이다. <시인들의 고군부투 생활기>를 다 읽고나자, 귓가에 꼬마의 '괜찮아'라는 외침이 들리는 듯 했다.

 

단지 아이들에게 자신이 자란 환경보다 더 좋은 환경을 주고 싶었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부터 아내를 완벽하게 지켜내는 남편이고 싶었던 얼간이 '맷'은 그저, 지상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돈을 벌어라! 더 좋은 것을 사라! 너는 그럴 자격이 있다!

세상에. 그것이 왜 잘못일까, 완벽한 아빠와 남편으로 잘 살고 싶다는 그 바램이 무엇이 잘못되었더란 말인가.

 

전재산을 스트리퍼에게 날리고 치매까지 얻은 아버지, 경제 동향을 '시'로 알리고 싶었던 사업의 실패, 해고, 그리고 마침내 코 앞으로 다가온 파산, 빼앗기게 된 집, 아내의 외도.... 맷에게 모든 나쁜일이 한꺼번에 일어난 몇일간의 기록을 코믹하게 적고있는 이 책은, 맷을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말한다. 세상을 만만하게 여기는 것이 잘못이라고. 세상은 전혀 너그럽지 않으며, 지각을 가지고 대처하지 않으면 중산층의 건실한 가장이 한순간에 마약판매상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부당하게 여겨진다. 주체할 수 없는 탐욕으로 금융 체제를 파산에 처하게 한 자들은 저 높은 곳에서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따위로 자신들의 몸을 보신할 때, 정작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을 뿐인 한 남자의 삶은 이토록 처절히 부서져야 한다는 것이. 그러나 그들은 말하겠지.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고 싶은 것은 자신들도 마찬가지라고. 모든 욕망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한다고. 개인적으로 볼 때 본시 '나쁜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현대 자본주의 아래에서 세상살이라는 것이 결국, 서로가 서로를 돈벌이, 혹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매개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모든 것을 다 잃을 지경이 되고 나서야 자신이 정작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뻔한 고해성사 외에도 정신적인 것에서, 가족적인 것에서, 작지만 정말 소중한 것으로 부터 행복을 찾으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이 책은 감동적이지만 또한 기만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맷이 바람났던 아내 리사를 향해 괜찮다고, 이제는 정말 괜찮다고, 다독이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괜찮아.... ? 우리 정말 이대로 괜찮은거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밤산책 - 매혹적인 밤, 홀로 책의 정원을 거닐다
리듬 지음 / 라이온북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책을 좋아하는 사람 누구나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책 권하는 책'을 향한 욕심이 남다르다. 지은이가 권하는 책이 내가 읽은 책이라면 반가운 마음에, 읽지 않은 책이라면 어떤 책인지 궁금한 마음에 '책 권하는 책'을 골라 들곤 하는데, <야밤 산책>은 책을 권하는 책 이라는 점 외에도, 지은이 리듬이 블로그에 리뷰 쓰기를 즐긴다는 것이 나와 같아 더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도대체 리듬은 어떤 책을 즐기고, 리뷰는 어떻게 정리할까?

책을 좋아한다는 것과 블로그에 리뷰를 적는다는 공통점 외에 리듬과 나는 책을 고르는 취향은 달랐다. 아마도 사회적 혹은 생태적 시기와 경험에 따라 독서취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일 것이다. 생태 시기적으로 볼 때, 리듬은 이제막 30대를 들어서는 미혼일 것으로 생각되는 반면, 나는 14살의 아이를 둔 엄마이다. 딱히 그것만 아니라도 하는 일도 다르고, 좋아하는 분야도 다르며, 경험치와 관심사 또한 다를터이니 책 역시 좋아하거나 즐기는 분야가 분명하게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나는 그녀가 '사랑'을 주제로한 책을 읽고 쓴 리뷰들에는 거의 공감하지 못했다. 무슨 큰 사랑의 상처가 있는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지 사랑은 '자신에 대한 투영'이며, '수시로 변하는 감정놀음' 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써는 '사랑'이라는 말 자체에서도 이미 아무런 울림을 받지 못한다. 아아, 사랑앞에 이미 너무 늙어버린 나는 이럴때 이렇게 말하는 건가?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런 반면, <나는 세계일주로 경제를 배웠다>나 <심플 플랜>, <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 <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 같은 책은 전혀 관심도 갖지 않았던 책이며, 제목 조차 생소한 책이기도 한데 리듬의 리뷰를 보고나자, 꽤 흥미가 생겼다. 자본주의의 폐해와, 지식인의 두얼굴 따위의 것들에 유독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마치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반가웠던 것이다. 책 권하는 책을 읽으며 가장 기쁜 순간은 바로 이런 때가 아니던가. '이런 좋은 책을 내가 왜 아직도 읽지 않은 거지..?'

 

또한 리듬이 쓴 리뷰 중 이미 내가 읽었던 책은 그 반가움이 더더욱 컸는데, 바바라 애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과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는 나도 아주 좋아하는 책들이다. 또한 조지 오웰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녀가 <동물농장>이나 <1984>를 아직 읽지 않았다는 것에 다소 놀란 한편으로,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리듬의 꼼꼼한 리뷰를 내가 썼던 감상과 비교하며 읽었다. 그녀의 리뷰에 비하면 내 감상 정말 조악하고 개인적이다.

몇년 전 블로그에 올린 조디 피콜트의 <마이시스터즈 키퍼-쌍동이 별> 리뷰엔 이런 댓글이 달려있었다. '스포있다고 미리 좀 써두지..'

서평이 아닌 개인적 감상에 치중하는 나는, 누군가 내가 쓴 리뷰를 보고 줄거리를 다 알아버렸다고 투덜거릴 줄은 정말 몰랐던 터라, 당황한 마음에 한동안 블로그를 닫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아무리 개인적인 감상이라지만,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리듬의 리뷰들을 읽어보니, 줄거리 정리가 꽤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잘 정리된 줄거리의 요약은 누군가에는 '스포'이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책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할테니까 말이다.

 

아아, 오늘도 '책 권하는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 나는 읽고싶은 책들이 아직도 방안 가득 수두룩 쌓여있것만, 몇 권의 책을 또 지르고 만다. 그러나 리듬의 말처럼 책에 관한한 아무리 사들여도 죄책감이 들지 않으며, 돈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