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영국의 저명한 저택 달링턴 홀에는 당연하게도 달링턴 경이 살았고, 달링턴 경과 달링턴 홀은 세계대전 전 후 동안 격동의 중심에 서있었다. 이 달링턴 홀에서 평생을 보낸 집사 스티븐슨은 달링턴 경, 달링턴 홀과 함께 자신  역시 유럽의 역사를 움직이는 중심축에 매우 가까이 섰던 한 인물로 자신을 평가한다. 그에게는 바로 이런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남모르는 긍지가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달링턴 경의 행동이 영국뿐만 아니라 인류에 매우 무익한 행동이였음이 밝혀졌더라도, 스티븐슨은 달링턴의 행위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으며, 그나름의 선의가 무시되어서는 안되고, 더불어 집사인 자신이 그간 달링턴 나리께 보였던 충성심 또한 저평가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바로 그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름의 선의, 혹은 잘못된 판단으로 인류에 해를 끼친 존재에 대한 역사적 심판은 가능한 것인가. 또한 충성심에서 비롯된 행위가 결과 여하에 따라 비난받는다는 것은 과연 온당한 일인가.
 
격동의 시대가 지나고 달링턴 경은 세간의 비판 속에 비참한 최후를 보내고, 달링턴 홀 마저도 미국에서 온 새로운 주인을 맞게 된다. 집사 스티븐슨은 달링턴 홀의 거래당시 '일괄 거래의 한 품목'으로 새 주인에게 양도된다. 그 후 새 주인의 미국행 여행계획에 맞춰 스티븐슨에게도 6일간의 휴가여행이 주어진다. 그러나 집사로서의 성실함을 놓지않는 스티븐슨은 이 여행마저도 지난 시절 달링턴가에서 같이 일했던 여자 관리인인 켄턴 양을 만나, 다시 달링턴 홀에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는 의사를 타진해 보겠다는 일의 연장선으로 여행을 계획할 정도로 스티븐스는 자신의 집사 업무에 충심을 다해 봉사한다.
그는 집사 업무에 대한 자신의 충심을 '사적인 실존을 넘어서는 전문가적 실존의 위대함'과 '자신의 지위에 맞는 품위'로 해석하는데, 자신은 계급적, 직업적 위대함이나 품위에 걸맞는 집사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모셔온 나리 달링턴에 대한 충성심인 것인데, 그는 달링턴  같이 현명하고, 유럽 사회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위대한 신사들에게 완전하고 훌륭하게 봉사함으로써 자신 또한 위대한 중심에서 한 몫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주인과 자신의 업적에 대해서 동일시하는 스티븐슨은 달링턴 경의 노력이 잘못되었고, 어쩌면 어리석기까지 했다라는 역사의 심판 앞에서,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나누어 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저 집사로서의 역할에 충심을 다했을 뿐이며, 이는 자신의 지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라고 믿는다. 또한 자신은 '집사로서 주인에게 보여야하는 당연한 충심'이라는 불변의 진실을 따랐을 뿐이며, 자신과 함께 독자 역시 세상의 거창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만큼 현명하고 존경스럽다고 판단되는 주인에게 복종하고 충심을 다하는 것은 만고의 진리라고 항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항변은 히틀러 치하에서 유대인의 체포와 강제 이주를 지휘했던 친위대장 아이히만을 떠올리게 한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아이히만은 자신의 직무에 성실했던 한 직업인이며, 또한 평범한 한 가장이였다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악의 평범성'에 대해 논한다. 사유없는 무조건적인 충심에만 천착할 때 우리중 누구라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집사 스티븐슨을 보면서 아이히만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책의 후미에 역자 김남주 역시 아렌트와 이시구로의 접점에 대해 논하는 것을 발견하고 내가 지은이의 의도를 잘 읽어내었다는 기쁨과 함께, '마술에 가까운 솜씨'라는 찬사를 듣는다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에 또한번 탐복하게 된다.
 
스티븐슨의 무조건적인 충심에 대한 직업적 품위는 여행중 만난 농부 해리 스티븐슨의 인간으로서의 자각적 품위에 맞닥드리게 되는데, 해리 스미스는 품위는 높은 지위와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자신이 자율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는데서 나온다고 말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집사'로만 한정하는 스티븐슨은 해리 스미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스티븐슨은 직업적으로 훌륭한 자실, 품위, 위대함 따위에 빠져 정작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며,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킬수 있는 이른바 '나리'들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망각함으로써, 또는 알지 못함으로써 자신을 충성스러운 개와 같은 지위로 격하시켰던 것이다. 그것을 직업적 위대함이라고 볼 수 있을까. 
평생 자신을 '집사'라는 존재로만 인식해온 스티븐슨으로서는 자신에게 '사랑'의 기회가 왔음 조차도 알지 못한채로, 지나간 날보다 남아있는 날이 길지 않은 오늘에 이른 것이다. 스티븐슨은 지나간 날에 더이상 연연하지 않고, 남아있는 나날을 위한 새로운 노력에 희망을 걸지만, 그 역시 새주인을 위한 새로운 노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노력이란, 계급을 벗어야만 가능한 '농담'이라는 새로운 도전이라는 것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로써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 중 세권을 읽었다. <나를 보내지마>와 <창백한 언덕 풍경>, 그리고 <남아있는 나날> 이 세권 중, 어떤 책이 더 좋았다라고 말하기 힘들만큼 세권 모두 훌륭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박경리의 소설로는 <토지> 밖에 모르다가, 마로니에북스에서 재출간된 시리즈로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뱁새족> 등을 읽었다. 외국문학에만 젖어있다보니 박경리의 소설이 오히려 낯선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불과 40~50년 전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여하튼, 작위적이며, 우연적 요소가 많은 어설픈 설정일망정, 우리에게도 박경리 같은 작가가 있다는 것에 마음 뿌듯하다. 박경리 소설에는 작가 자신을 닮은 성격 강한 여성이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노을진 들녘> 역시 불륜, 억지 결혼 등을 다룬 만큼 설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여기고 싶다. 모든 것이 끝난다는 의미는 음, 일종의 '평안' '아무것도 아닌 상태' '무'를 생각하는 것인데, 그럴 만큼 내 인생은 갑갑한 것일까? 어쨌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이 책에서는 죽은 후 7일 동안을 연옥에 머물며 이승에 남은 질긴 인연을 재정리하는 기간을 갖는다고...

작가는 변해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그늘이 되고 만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품고 있으며....(출판사 제공 책소개 중)

아, 그래도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면 좋겠다.

<허삼관 매혈기>를 먼저 읽어야 겠지.

 

 

 

 

 

 

오오, 드디어 <고백>의 작가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이 나왔다. <고백> 이후 가나에에 빠진 나는 <소녀>, <속죄>, <왕복서간>, <N을 위하여>, <야행관람차>에 이르기까지 국내 출간된 그녀의 책을 거의 모두 읽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녀의 소설은 매번 다시 책을 펼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음에 불구하고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떨까, 이번 작품은. 그녀 자신은 '작가를 그만두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썼다'라고 밝혔다는데, 처음 <고백>을 읽으며 느꼈던 전율을 다시 한번 돌이킬 수 있을까.

 

 

 

 

 

 

 

읽고싶은데, 약간은 두렵기도 하다. 파스칼 키냐르. 그의 말을 잘 못알아 들을까봐서. 혹은 실망할까봐서..?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dfdf 2013-09-19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텍본나라링크(http://sho.txtbook.kr/
 
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딸의 죽음에 응답하고자 하는 어머니의 회상, 희미한 언덕 능선처럼 흐릿한 기억 속에서 과거의 상처는 현재와 연결되고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뒷표지 글 중에서)

 

세계2차대전 당시인 1945년 8월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폭탄을 투하해 두 도시를 파괴했고, 이로써 일본은 항복했으며 세계대전은 종전을 고했다. 일본은 미국에 항복했지만, 일본이니 미국이니 하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승리나 패배에 관계없이 실제로 이루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는 것은 일반 시민들이다. 전쟁의 참상은 승전국이나 패전국을 가리지않고 일반 시민을 참혹하게 하지만, 패전국민의 경우 그 고통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리라. 더구나 원폭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겪었다면 피붙이의 죽음, 쑥대밭이 된 삶터, 그리고 이어지는 공황상태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말없는 몸부림이 그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질 것이다.

이야기는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의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한다. 전쟁 중, 아이를 살해하는 여자를 본 아이가 등장한다. 아이는 엄마와 함께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 살며, 새끼 고양이들에 애착을 품은채로 늘 경계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아이의 엄마는 미국인 남자친구를 따라 미국에 가고자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다. 그녀는 버림을 받게 될 것이며,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녀만의 이상국인 미국에는 결국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를 바라보는 주인공 에츠코는 전후임에도 번듯한 직장에 나가고 있는 남편 그늘에서 오두막의 아이와 엄마에게 친절을 베푼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의심이 감돌고, 서로를 믿지못하는 순간순간 섬뜩한 장면이 이어진다.

에츠코의 시아버지 오가타상은 전쟁 전, 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는 품위있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지만 한마디로 속의 생각을 감추는 음흉함 또한 겸비하고 있다. 그것을 과거 일본의 모습이라고 역자는 후기에 적었지만, 국민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점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바르고, 성실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최대 덕목으로 여기며 예의를 갖추는 것. 

일본적인 것의 여러가지를 좋아하는 '나'아지만, 역시 그런 모습은 존경스러운만큼 불편하기도 하다. 오가타상은 아들인 지로에게도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예의를 갖추지만, 그의 속마음은 다르다는 것을 아들인 지로도, 며느리인 에츠코도, 그리고 그 자신 오가타도 잘 알고있다. 

 

이야기는 금방이라도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처럼 조마조마함의 연속이지만, 특별한 어떤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다. 원자폭탄이라는, 너무도 엄청난 재앙 후의 나가사키에서는 이미 더이상 놀랄 일이 없는 것처럼 재건의 희망에 들떠있지만, 여전히 그속의 개개인은 힘들고, 피로하고, 지쳤으며, 삶이 버겁다.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사람들은 전쟁에 고무되었던 과거를 회상하기도(오가타상), 희망의 땅에서 온 미국인을 붙잡기도(사치코), 그 모든 고통을 잊게 해줄 일에 매달리기도(지로, 후지와라 부인), 옛것을 추방하고 이제는 새로운 정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기기도(공산당에 입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로의 친구이며, 오가타상의 제자이고, 현재는 교사인 마쓰다 시게오), 전쟁을 딛고 선 땅에 새로이 태어날 아기에게 희망을 걸기도(에츠코) 하는 것이다. 어쨌든 삶은 계속되고, 이야기 역시 끝나지 않는다.

역자는 씌여진 것보다 씌여지지 않은 것에서 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너무도 평이하고 잔잔한 이야기지만 그 배경은 전혀 그렇지 않은 무한한 추측을 가능케 하는 거대한 소설이다. 음, 이렇게도 소설이 씌여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 알았다. 너무도 평이하게, 너무도 잔잔하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순간순간이 긴장되고 때로는 공포스럽게...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다섯살 때 영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 주인공 에츠코 역시 두번째 결혼으로 영국인 남편을 따라 영국으로 이민을 간다. 그리고 거기서 첫번째 남편 지로와의 사이에서 얻은 게이코는 오랜 불행 끝에 자살한다. 그녀가 어떻게 불행했는지 작가는 전혀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행간과 행간 사이를 통해 나는 그녀의 불행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전쟁은 그 당시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오랜 불행을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딘가에 있는, 물살이 정말이지 빠른 강이 줄곧 떠올라. 그 물 속에서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서로 부둥켜안지만 결국은 어쩔 수가 없어. 물살이 너무 강하거든. 그들은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바로 그런 것 같아. 부끄러운 일이야, 캐시. 우린 평생 서로 사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어." (386쪽)

 

토미의 이 고백은 샴쌍둥이를 생각나게 한다. 자기들이 한몸인 것도 모른채 서로의 등이 붙은채로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 어린시절부터 서로가 서로를 사랑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토미와 캐시. 그들은 너무 늦게 서로의 사랑을 향해 용기를 내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짜피 그들은 조만간 죽게 될 것이다. 아니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 둘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토미는 캐시를 보내고, 캐시 역시 토미를 보낸다. 다른 선택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나 정말 다른 선택은 없었던 것일까. 그들이 그토록이나 운명에 순응해버린 것에 은근히 화가 난다.

 

이 책을 읽기 전, 토미와 캐시를 비롯한 해일셤의 학생들은 '클론'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생물학 용어인 '클론'은 단일 세포로 부터 무성생식을 통해 생긴 세포군을 말하는 것으로, 쉽게 말해 복제되었다는 소리다. 그렇다. 해일셤의 그 많은 학생들은 모두 클론이다. 뿐만 아니라 클론들의 학교는 헤일셤 외에도 작품의 배경인 영국 곳곳에 있다. 이 이야기는 대부분의 SF가 그렇듯 인류가 멸종 위기에 처한 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하고, 인간을 구할 영웅 또한 등장하지 않는다.  SF임에도 전혀 SF적이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더 섬뜩하고 무섭다.

세계대전 종결후 폭발적으로 발달한 과학의 결과물로 클론들을 '대량생산'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의 목적은 '장기 이식'에 있다. 해일셤에서 클론들은 성장기간 내내 그들 삶의 최종 지점인 '기증'에 대해 주입받는다. 그래서 였을까. 그들이 자신들의 운명에 그토록 순종적이였던 것은.

간병사 캐시가 추억하는 어린시절의 '해일셤'에서는 한번도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단지 한번, 해일셤을 졸업한 후, 캐시가 포르노 잡지에서 자신을 닮은 근원자를 찾는다거나, 강한 성격에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는걸 못견뎌하며, 그를 위해 자주 거짓말을 하는 루스가 자신의 근원자를 찾는 장면이 책의 중반에 연출될 뿐이다. 어쨌든 그들이 찾는 것은 부모가 아닌 근원자였다. 그러나 그들이 클론이라는 사실은 도입부분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음에도 전혀 충격적이지 않다. 마치 작은 균열을 통해 습관적으로 물이 스며들었기 때문에 언제 젖었는지 모르게 온통 곰팡이가 슬어버린 천장을 보는 것 같다. 물이 새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지만, 천장 한귀퉁이에 넓게 지도가 그려진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갑자기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해일셤의 클론들은 자신들이 '기증'을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라는 것을 암암리에 들어왔기에 그 사실이 결코 낯설지 않으며, 나 또한 당황하지 않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어느순간 갑자기 깨닫았다.

그래서 그들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했던 것이였을까. 그랬다. 이상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운명에 너무도 순종적이였다는 것이다. 그점이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었다. 도망을 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이 불가능했다면 토미와 캐시가 동반자살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내가 작가였다면 그랬을 것 같다. 토미와 캐시는 어쨌든 서로가 평생 사랑해 왔다는 것을 뒤늦게라도 깨닫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행동했던 그들의 삶에 대해 다시 자각하고, 자신의 정해진 삶을 거부한다. 기증자로서의 삶도, 당분간 기증이 보류된 간병사로서의 삶도 거부하고 스스로 그들은 목숨을 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그렇게 기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 <설국열차>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남궁민수의 대사가 생각난다. 기차 밖으로 나가는 거라고 외치던.

그러나 문제는 클론의 존재가 아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 클론을 용인하고, 아니 클론을 필요로 하는 '인간'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갑자기 온갖 새로운 가능성이 우리 앞에 펼쳐졌지. 전에는 불치병으로 간주되던 많은 병들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 말이다. 온 세상이 주목하고 바라던 일이었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인간의 이식용 장기가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생기는 거라고, 진공실 같은 곳에서 배양되는 거라고 믿고 싶어했단다. (중략) 장기 교체로 암을 치유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어떻게 그 치료를 포기하고 희망 없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니? 후퇴라는 건 있을 수 없었지. 사람들은 너희 존재를 거북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더 큰 관심은 자기 자녀나 배우자, 부모 또는 친구를 암이나 심장병이나 운동 세포 질환에서 구하는 거였단다. 그래서 너희는 아주 오랫동안 어두운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었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되도록 너희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단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너희가 우리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기 때문이지."(360쪽)

 

문제는 클론의 존재에 있지않다. 클론의 존재를 애써 부정하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내 삶과 내 가족의 삶을 연장하기 위해 장기를 내놓고 죽어갈 그들 존재를 필요로 하는 인간들에게 있는 것이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그들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서도, 아닌척 빛의 쪽에서만 머물고 싶어하는 우리 대부분의 '이기'에서 이 모든 불행한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라면 고민의 여지가 있겠지만, 내 남편이거나 내 아이가 장기 이식을 받지 않으면 죽게 된다고 할때 나는 '클론'을 필요로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깊어진다. 섬뜩하다. 비굴하게도....

아아, 루시는 토미는 그리고 캐시는 그렇게 죽어갔다. 한번 두번 필요한 것을 내어주고, 그리고 종국에는 모든것을 허락한다. 아니 그것은 강제되어진다고 보는 것이 맞을테지만.

 

캐시가 'never net me go'라는 흘러간 팝송을 틀어놓고 베개를 안고 몸을 흔드는 장면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캐시(클론은 생식능력이 없다. 이식만을 생각한다면 건강한 자궁 또한 필요할 것인데 생식능력이 없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복제인간이 생식능력 까지 갖춘다면 그 또한 큰일이겠다 싶긴하다)가 슬퍼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부모를 그리워 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슬픔으로 보였기에 애처러웠다. 또한 루스가 캐시와 토미를 비롯한 몇몇과 노퍼드로 근원자를 찾으러 가는 장면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친부모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그리워하는 장면을 연상했다. 부모의 삶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점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이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알고자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궁금증일 테니까. 그러니까, 클론 그들도 당연히 사람인 것이니까...

 

이 책은 팟캐스트로 들은 'EBS 북카페'의 번역자 김남주 인터뷰를 통해 알았다. 그녀는 26년간 번역일을 해왔고, 그일만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일이었다 라고 하면서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을 소개했다. 특히 <나를 보내지마>를 언급할 때 특유의 조근거리는 목소리에 특히 힘을 주었다. 그길로 서점에 달려가 <나를 보내지마>와 <창백한 언덕풍경>을 구입했다. 아쉽게도 김남주의 <나의 프랑스식 서재>는 서점의 재고불량으로 구입하지 못했지만, 조만간 구입해 읽을 생각이다. 

역자는 <나를 보내지마>에서 '기묘'라는 단어를 자주 썼는데, 그만큼이나 이 소설은 기묘한 이야기다. 실제로 한페이지에 '기묘'라는 단어가 두번 반복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역자가 매번 '기묘하다'라고 번역했던 단어는 odd였을까, strange였을까? weird, peculiar  이상하다라고 번역되는 모든 단어가 적절히 번갈아가면서 씌이지 않았을까? 기묘하고 끔찍한 이야기지만 이토록 우아하고, 이토록 슬픈 이야기를 소개하는 역자라는 직업이 새삼 매력적이라 여겨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개의 영혼이 번지는 곳 터키 In the Blue 14
백승선 지음 / 쉼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터키 이스탄불의 상징과도 같은 아야소피아. 터키를 소개하는 여러 책자를 통해 이미 내가 다녀온 곳인양 익숙한 곳이 아야소피야이긴 하지만, 백승선의 사진으로 보는 아야소피아는 마치 19세기의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풍경화를 보듯 선명했고, 또 한편으로는 현실보다 더 현실감있는 모습때문에 오히려 몽롱해지는 그런 느낌이다.

이런 풍의 여행서는 실제 모습보다 더 화려한 사진과 작위적이고 감상적인 지은이의 깨닫음으로 치장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백승선의 글과 사진으로 보는 터키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지은이가 불필요한 개인적 감상을 줄임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터키'를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리라.

평소에도 터키는 내게 로망이지만, 백승선의 사진들을 보면서 터키에 대한 나의 로망이 점점 뭉게뭉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카파도키아를 보기 위해 오른 열기구들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처럼.

 

 

그 어디보다도 나는, 하늘빛을 담은 신들의 온천 '파묵칼레'에 가보고 싶다. 터키어로 '목화의 성'을 뜻하는 파묵칼레는 지은이의 말에 의하면 정말 솜으로 만든 요새처럼 보인다고.

사진으로 보는 파묵칼레는 엄청난 파도가 일으키는 바다 거품같기도, 혹은 수정바위 틈틈이로 푸른물이 고여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직접 보면서도 눈앞의 광경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그곳.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가 이처럼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것이라는 지은이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신 이 신비로움을 꼭 두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마구 용솟음침을 느낀다.

자연과 시간이 빚어놓은 이 신비한 결정체를 보고나면 벗어나고 싶을 만큼 지루한 내 일상에도 어떤 변화가 생기는 걸까. 그건 알수 없지만, 아니 어쩌면 지루하기만 한 내 일상이 더더욱 지겨워질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깊은 감사가 우러나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겠다. 어디를 여행하건 여행의 목적은 그곳을 통해 바로 나 자신을 발견하는 법이니까.

 

터키 여행을 앞두고 있다거나, 혹은 나처럼 터키를 오랜 로망으로 간직하고 있다거나, 그도 아니면 여행이 남일처럼 아득한 사람일지라도 백승선의 <두 개의 영혼이 번지는 곳 터키>를 읽어보라고 꼭 권하고 싶다. 사진만으로도 가슴이 트이고, 무엇인가 꿈 꿀수 있음에 문득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터이니.

 

 

평생 사용한 감탄사보다 더 많은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는 터키에서 바라보는 지중해와 하루 종일 앉아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한 곳, 파묵칼레와 그리고 카파도키아의 열기구 여행은 조만간 꼭 이루어야 할 나의 소망 중 하나로 올려 놓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