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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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이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지 않기 위해. 혹은 과장되게 자신을 이해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듯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잘 성찰하지 못할 때 우리는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게 된다. 그렇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 어떻게 굴러가는 것이 인생인지 모르고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에 쫓겨살 때, 삶에 더 충실하게 되지 않았던가.

문제는 여유인지 모른다. 먹고 사는 문제의 여유. 생각할 여유가 너무 많을 때 우리는 부패하게 될 지 모른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안으로 곪아들어갈 소지가 있는 영혼을 안고 살아가는 자, 끊임없이 노동하라. 먹고 사는 문제에 급급해서. 삶에 찌들은 얼굴로는 시선을 밖에 둘 여유가 없을테니.

만족스럽지 못하다. 마담 보바리를 읽은 내 감상.

마치 겉과 속이 다른 고해성사를 했을 때처럼 미적지근하고 껄끄러운 느낌이다. 엠마만큼 타락하고 싶지 않았다고 내 스스로를 고해할 수 있을까. 엠마만큼 실패하지 않았기때문에 지금껏 살아있노라고 내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을까.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 아닌 다른 타인을 이성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아주 일시적인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사랑에 빠져있다는 환상은 물리학적으로도 2년이면 족하다고 하지 않는가. 대상을 바꿔줘야 하는 사랑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어쩌면 바람둥이 만이 진정한 사랑을 알고 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끝내 바람둥이가 되지 못하고 한가정에 안주한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그러나 엠마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사랑도 아니고, 간음도 아닌다. 단지 그녀의 끝을 모르는 사치와 허영이었을뿐. 시대는 바뀌어도 물질에 대한 가치와 정신의 가치는 바뀌지 않고 돌고도는 쳇바퀴 속 다람쥐와 같다. 오늘의 불륜 드라마 속에서 수없는 엠마를 보며 내 속에 사는 꺼지지않는 욕망의 엠마를 만나기도 한다. 그것이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가 될 것이다.

-'자화상'이라는 제목으로 2009년 7월 10일 작성

 

그리고 4년 하고도 2개월 남짓 후, 다시 읽은 보바리 부인.

불현듯 보바리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팟 케스트에서 들은 책 읽어주는 프로 때문이었다. 진행자와 북매니저로 불리는 두 명의 게스트들은 보바리 부인의 불행이 '책' 때문이라고 했다. 엠마가 수녀원에서 쌓은 지적능력과 어설픈 독서들로 인해 욕망의 방종이라는 결과를 낸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엠마 불행의 원인이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더불어 엠마에 비해 보바리는 책을 읽지 않는 남자이며, 더불어 욕망도 패기도 없는 남자였기 때문에 보바리 부부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평했다.

그랬던가. 엠마가 바로 책 읽는 여자였던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과도한 욕심이 없는 남자 보바리가 과연 그들 불행의 원인이었던가.

2009년에도 그랬지만, 다시 읽어보니 역시 문제는 엠마의 '내면의 허기'가 문제였다라고 생각된다. 책을 읽는 여자였다면서 엠마는 어째서 스스로 욕망을 다스릴 힘을 키우지 못한 것일까. 내 경우는 책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수많은 욕망에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는데 말이다. 역시 어설픈 책 읽기가 문제였던 것일까?

 

1857년 출간된 <마담 보바리>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더불어 각각 소설과 시의 '현대'의 출발점이라고 여겨진다는데, 1857년은 제2회 '만국산업박람회'가 파리에서 열린 그 이듬해이다. 즉 <마담 보바리>의 배경은 산업혁명도 대혁명도 다 지난 개화의 시기였고, 더불어 한 남자의 아내로서 복종이 강요되었던 부인들의 의식도 개화된 시기라는 것이다. 때문에 계급에 관계없이 욕망을 키워가던 시기였던 것이다.

문학사적으로는 플로베르의 보바리는 유부녀의 연애 사건과 자살이라는 통속적인 내용보다는 글의 '스타일'의 중요성이 부각된 작품이라는데, 글쓰기의 스타일이나 작품의 구도 따위를 보는 눈이 없는 나로서는 역시 스토리와 등장인물의 심리에 촛점을 맞추고 책을 읽는다.

해서 다시 읽은 보바리 부인을 통해서는 엠마의 욕망에 더더욱 깊이 공감할 수 있다. '한 때는 나도..'라고.

한편 2009년의 감상과 다른점이 있다면, 프로베르는 샤를르 보바리의 감정이나 생각에 관해서는 무척 인색하게 표현했다는 것이였다. 나로서는 도대체 샤를르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엠마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도 아닌데 샤를르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안주하며 더더욱 아내를 사랑했다는 것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샤를르는 배신감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죽음을 맞는다. 샤를르의 시점에서 소설이 씌여도 좋지 않았을까.

<안나 카레니나>도 그렇고 <마담 보바리>도 그렇고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못해 결국 불행해진 여인들의 욕망과 불안한 심리, 그리고 그에 따른 몰락의 과정을 충분히 보았으니, 이제는 욕망에 굴복한 아내를 둔 남자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 세상에 그토록 순종적이고, 평화주의적인 남자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안정과 평화를 가장한 남편들의 바로 그 '무신경'이 안나와 엠마로 하여금 자식까지도 내버리고 자신의 욕망 만을 갈구하게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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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턴 -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36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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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이라면 사십대를 막 넘어서부터를 말할 것인데, 이 시기로 말하자면 뭘 새로 시작하기엔 너무 늦고,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너무 빠른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녹턴>은 바로 이 중년시기와 중년을 지난 황혼시기의 남녀가 등장한다. 황혼의 크루너 가수와 그의 아내, 음악을 사랑하는 중년의 대학동창들, 유럽을 떠도는 중년의 프로 연주자  부부, 못생긴 중년의 색소포니스트, 첼로의 대가라고 자처하지만 정작 첼로를 연주하지 못하는 중년의 여자.

그들 모두가 음악으로 생업을 삼지는 않지만, 음악을 사랑하거나, 음악에 매이거나, 음악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이 책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별을 준비하거나, 새로운 만남을 계획하기도 한다.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엔 늦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나이이니까.

 

그렇지만, 이렇다할 특별한 사건도 결말도 없는 밋밋한 이야기들이다. 또는 읽고 나서도 도대체 작가가 무슨말을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는 이야기도 있다. 내 경우 첫이야기인 '크루너'가 그랬다. 27년간의 무난한 결혼생활을 하고도 여전히 서로를 사랑한다는 크루너 가수 부부가 떠나온 이별 여행을 난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데 뭐..? 새로운 시작을 위해 끝이 필요하다는 그 이야기는 너무 억지스럽고, 새로운 시작이 왜 필요한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너무 욕심이 없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안주해서는 왜 안되는거지..? 삶은 길지 않고, 삶에서 성취해야 할 것들을 위해 이미 오랜시간을 싸워온 그들인데, 이제 그만 놓는 연습을 하면서 살면 왜 안되는 거지..?

 

가장 재미있었던 이야기는 책의 제목이기도 한 <녹턴>이였다. 첫번째 이야기인 <크루너>에서 아내로 등장했던 미모의 여인이 다시 등장한다. 그녀는 충분히 아름답지만, 젊음을 놓지 않기 위해 이미 여러차례 성형수술을 감행했고, 또다시 성형수술을 받는 중년 여인이다. 그리고 못생긴 중년의 섹소포니스트. 그는 그 누구보다 실력있는 연주자이지만, '실패한 추남형'의 외모를 하고 있다. 바로 그 실패한 추남형의 외모때문에 그는 성공하지 못한다고 모두가 믿는다. 그의 매니저도, 그의 아내도, 그를 처음 본 크루너 가수의 전 아내도, 그리고 그 자신까지도.

그랬기 때문에 그 역시 성형수술을 감행하고, 크루너가수의 전 아내와, 못생긴 섹소포니스트는 미이라처럼 얼굴을 둘둘만 상태로 엉뚱발랄한 모험을 감행한다.

어쨌든 이 이야기에서도 뚜렷한 결말은 없다. 그저 그들은 수술을 받았고, 그래서 그 후에 행복해졌는지, 그들이 바라는 것을 거머쥘 수 있었는지, 독자는 알 수 없다. 삶은 계속되고, 이야기는 진행중이므로. 더불어 몹시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세상의 섭리까지도.

 

어쨌든 이 모든 이야기에 등장하는 중년이거나 황혼의 그들은 멋진 외모를 하고 있고, 세월을 느낄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그것에 나는 조금 실망했다. 그냥 나이만큼 늙고, 지친 모습 그 자체로 표현될 수는 없었을까. 왜 우린 모두 아름다워야 할까. 나 역시도 아름답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문학은 좀 안 아름다운 사람이 등장했으면 좋겠다. 이 책과는 상관없이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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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6
스탕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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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제정이 이룬 엄청난 사회적 변화와 그것이 젊은 세대의 사고방식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미미하고 재산도 없던 일개 중위의 신분이였던 나폴레옹은 유럽의 황제가 되어 신속하고도 매우 획기적인 신분 상승을 이루었다. 법적, 정치적 질서로 엄격한 계층적 구분이 존재하던 대혁명 전의 사회는 대혁명을 계기로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생각을 전 사회에 공표한 것이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실각 후, 귀족과 왕당파 사제들은 왕정복고를 꿈꾸며, 그들만의 특권을 위한 더 강력한 왕권과 귀족계급의 권위를 세우려하지만, 젊은이들의 피 속에는 이미 '만인의 평등'이라는 계몽적 사상이 녹아있던 시대 상황이 이 소설의 배경인 것이다. 주인공 쥘리엥은 나폴레옹을 가슴 속 영웅으로 간직하며 '출세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골백번이고 죽는 편을 택하겠다'는 불굴의 의지로 신분 상승을 꿈꾸었다.

 

쥘리엥을 전적으로 무구한 반항의 순교자로만 취급하는 것은 파렴치한 출세주의자로만 모는 것과 마찬가지로 편협한 비평의 태도일 것이다. 쥘리엥은 자신의 출신 계층 내에서나 그가 발붙이려고 애쓰는 상류 계층 내에서나 다같이 스스로를 낯설게 느끼며, 또한 접촉하는 모든 환경 속에서 낯선 사람으로 대접받는 특이한 감수성의 소유자이다. 철저하게 뿌리 뽑힌 자이며 항상 '대양 가운데 버려진 조각배처럼 홀로있는' 이 외로운 이방인은 상층 계급뿐만 아니라 시대 전체, 시대의 가치관 및 이상 전체와 대립되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445쪽)

 

이 이야기를 계급의식에 짓눌려 두려움에 떨지 않음으로써 고고하게 죽어간 정신이 고결한 하층민의 이야기로 볼 것이냐, 계급을 넘어 사랑을 꿈꾼 혹은 신분상승을 꿈꾼 천박한 출세주의자의 스캔들로 볼 것이냐 하는 이 두가지 차원의 논의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을 만큼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 적절히 녹아있다.

목수의 막내 아들이며, 농부인 쥘리엥은 두 형과 아버지의 멸시와 반목 속에 가족으로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고립되어 혼자 책을 읽는 등으로 소일한다(죽음을 앞둔 쥘리엥이 그를 찾아온 아버지와 대면하는 장면은 경악 그 자체이다. 꿈을 이루지 못한채 명을 다하게 된 아들의 주제넘은 욕망을 질책하는 아버지나 그를 무마하려고 돈을 제시하는 아들이라니, 쥘리엥이 목수의 아들이 아닌 어느 귀족의 숨겨진 아들이였다는 마틸드 아버지의 설정이 혹시 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러나 쥘리엥은 변함없이 시골 목수의 셋째 아들이였으며, 단지 우연히 알게된 퇴역한 군의관으로 부터 글을 배웠고, 약간의 책을 물려 받게 된 것이 불행이라면 불행이였다. 차라리 두 형처럼 운명에 순응했더라면 스물두살의 나이에 목이 잘리는 그런 불상사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어쩌면 스탕달은 나폴레옹으로 인해 만연해진 사회 계급적 불평등 의식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방종의 결과는 기로틴행 뿐이라는...

 

쥘리엥은 그의 비상한 기억력과 라틴어 실력을 인정받아 상류층 가정에 가정교사로 지내게 되면서 이른바 출세 길로 접어들지만, 상류층 가정에서도 귀족들의 살롱에서도 경멸의 시선을 걷을 수 없는 고독한 영혼이다. 쥘리엥의 이런 모습은 시대적 불화로 읽히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스탕달이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쥘리엥을 그렸다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근본적으로 쥘리엥의 불만은 계급에 있다기보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쥘리엥이 꿈꾸었던 것은 과연 무엇 이었을까. 자신이 속한 계급인 하층민들 속에 있건, 귀족들의 살롱에 있건 그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천박한 인간군상의 무리 속에서 홀로 고독을 느꼈다. 그러한 쥘리엥은 인간 존재에 대해 어떠한 희망도 갖지 않았던 것이 아니였을까. 그러한 모습들 속에서 바로 자신의 얼굴을 보기 때문에 고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이러한 추측은 스탕달이 이름한 쥘리엥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대양 가운데 버려진 조각배처럼 홀로 있는' 고독한 이방인.

신분상승도, 사랑에 대한 미련도 모두 포기해 버리고 높은 탑에 갇혀 오만한 고독 속에서 오히려 마음의 평정과 행복을 느끼며 죽음을 기다리는 쥘리엥의 모습은 대양 가운데 버려진 고독한 조각배의 모습 그 자체이다. 그러한 쥘리엥의 고독한 모습에 나 또한 감동받고 평화를 느꼈다. 계급이며, 사랑이며 따위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살아왔건 인간이라면 결국 죽음음 속에서만 평화를 맛볼 수 있는데.

 

<적과 흑>을 읽은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적과 흑이 가르키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는데, 역자는 적과 흑이 의미하는 것은 '군'과 '종교'라고 설명했지만, 내 생각에 '적'은 '피'를, '흑'은 기득권 세력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검은 속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였을까 생각한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전복은 결국 누군가의 '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스탕달의 역사 의식이 아니였을까.

 

계몽 사상가들의 충실한 제자로서 스탕달은 주저없이 특권에 반대하여 평등의 편에 선다. 그가 왕정복고 체제를 비판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체제가 혁명에 의해 단죄된 특권을 옹호하고, 특권 의식에 의해 사회를 재조직하여 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고 획책한다는 데 있다. 스탕달은 특권의 적으로서 사회적 구분을 정당화하려는 어떠한 이론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하층 계급의 사람이 상층 계급의 구성원보다 개인적 가치와 능력이 열등할 어떠한 선험적 이유도 없는 것이다. 스탕달의 인간관은 소속 계급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려는 계급적 편견에 정면으로 맞선다.(444쪽, 작품해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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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심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13
미하일 불가꼬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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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과 마르가리따>를 쓴 20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 불가코프는 내게 너무 힘든 작가이다. <개의 심장>은 마음만 먹으면 한자리에서 뚝딱 읽을 수도 있을만큼 짧은 중편 소설이며, 개를 인간으로 변형시킨다는 흥미로운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가 없었다. 이런류의 소설은 뭐라고 불러야 할지. SF도 환상문학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한문장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시대적 역사적 문화적인 상상력이 부족한 내 머리를 탓해야 겠는데, 톨스토이나 도스또예프스키 등 다른 러시아 작가들의 책을 읽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없으니, 이건 절대적으로 불가코프의 묘사력이 부족하다거나 혹은 번역이 매끄럽지 않았던 것이라고 마구 탓하고 싶다.

 

불가코프는 인간의 생식 기관과 뇌하수체를 개에게 이식한다는 과학적으로 가능할 수도, 도덕적으로 옳을수도 없는 당시의 우생학적 논의를 러시아 혁명을 함께 엮으므로써, 볼셰비키 혁명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했다. 이와 같은 작가의 거창한 의도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가 되었지만, 책을 읽은 동안에는 한문장 한문장에 집중할 수가 없을 만큼 산만한 묘사로 자못 짜증스러웠다. 때문에 샤릭이 '개'의 입장에서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고, 자신이 하고픈 말을 생각하는 장면이나, 개인간인 샤리꼬프가 된 후, 자신을 재창조했다는 의미에서 아버지라고 여기기도 했던 교수 쁘레오브라젠스끼를 거역하고,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쉬본제르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하수인이 되기까지의 부조리함이라던가,  교수와 의사가 개를 인간으로, 인간을 개로 변형시키며, 멋대로 생명을 쥐락펴락하는 인간의 거만한 모습들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없어 어쩌면 억울한 생각까지 든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할때 올 수 있는 엄청난 재앙을 '혁명'이라는 부자연스러운 장면과 합치시키고자 했던 불가코프의 노력이 조금 더 정제된 문장으로 씌였더라면, 혹은 좀더 유려하고 매끄럽게 정리되었더라면 나같은 문외한이 쉽고 재미있게 <개의 심장>에 빠져들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두번째 이야기인 <악마의 서사시>는 <개의 심장>보다는 쉽게 읽혔다. 1920년대 전시 공산주의 시대 러시아의 회사에서는 급여대신 자회사의 생산품을 주기도 했다는데, 성냥자재 창고에서 일하는 주인공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나마 급여대신 받은 성냥도 60퍼센트 정도는 불량인 그런 성냥이었다. 또한 혁명의 상황에서 이어지는 해고의 부당함으로 인해 주인공은 정신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소설의 시작에서 주인공은 온화하고 조용한 성격을 지닌 남자로 묘사되는데, 정상의 범주에 속하는 주인공은 혁명과 전시 상황이라는 국가적 궁핍 속에서 봉급을 받지 못하고, 새로 온 국장의 이름을 여성용 속바지로 착각하는  말도 안되는 실수 하나로 결국 해고된다. 그후 이를 바로잡기 위해 사력을 다하지만 점차로 무너져가는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심리상황이 쌍둥이의 등장으로 더더욱 난해지고 복잡해져, 이 짧은 이야기 속을 주인공뿐 아니라, 나조차도 마치 안개속을 헤매고 다니듯 마구 헤메이다가  책을 덮고 났을때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뭐지. 어쩌면 불가코프는 독자로 하여금 '이게 뭐지'하는 불편한 의문이 들도록 작품을 기획하고 썼던 것은 아닐까. 말도 안되게 헷갈리는 장면을 연출하므로써, 혁명을 '말도 안되는 불편한 일'이라고 일축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정상적인 사람이 미치광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불편함 그대로 재현해 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적고 보니 소설을 읽는동안은 미로 속을 헤매듯 짜증스러웠지만, 불가고프가 하고자 했던 것은 다 이해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메세지가 충분히 드러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해 불가하다고 투덜댈수 밖에 없었던 불가코프의 작품 스타일은 '그로테스크적 사실주의' 라고 불리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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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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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설마라도 이 소설이 아드레날린의 폭발적인 분비를 유발하는 킬러 미스터리 서스펜스인 줄 알고 선택했을 누군가에게는, 번지수가 달라 미안하다는 이야기. (작가의 말 중)

 

킬러 이야기라고 했다. 

킬러의 이야기이긴 하되, 생물학적으로 은퇴를 코앞에 둔 킬러의 이야기라고 했다. 무슨 퇴물 기생도 아니고, 퇴물 킬러라니.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까.  킬러도 물러지고, 흐트러져 결국에는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 앉게 될 날이 있다는 이야기인 걸까. 가만, 킬러가 뒷방 늙은이가 될 정도로 질기게 살순 있는거야?

지은이의 걱정아닌 걱정처럼 이 책을 미스터리 서스펜스인 줄 알았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다고 퇴물 킬러의 신세 한탄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책에서 어떤 이야기를 듣고자 했던 것일까.

 

먼저, 제목에 관하여.

이 책을 읽기 전, 언뜻 스친 리뷰 한줄. '파과의 뜻을 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요.'

물론 나도 그랬다. 책을 처음 보았을 때는 <파괴>를 잘 못 읽은 줄 알았고,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심오한 숨겨진 뜻이 있는 대명사려니 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자,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작가의 말에서 지은이가 제시한 두가지 '파과'의 뜻이 모두 맞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시간은 생명을 무르익게도 하지만 물러 터지게도 하니까.

 

결국 모두 죽는다.

그렇다. 사는 동안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았던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죽는다. 과수원 지기였든, 과일 장수였든, 농림수산부 장관이였든, 여러사람 목숨을 과일 으깨듯 제맘대로 쥐락펴락 네활개를 치고 살았던 사람이였든 결국 죽는다. 사람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는 킬러까지도.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며, 모두 죽기때문에 신은 공평한 것이다.

지은이는 이 이야기를 냉장고에서 발견한 과일의 유체로 부터 시작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한때는 향긋한 단맛을 품고 해실한 웃음으로 혹자를 유혹했던 토실한 몸체가 결국 냉장고 안에서 질퍽한 형체로 무너져 내린 것을 발견했을 때, 지은이는 냉장고 문을 열어 놓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가만히 앉아 '나도 이렇게 된다'는 깨닫음을 얻은 것이다. 어느집 어느 냉장고인들 본시 그것이 무엇이였던가를 단박에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무너져내린 유체를 놓고 고민해 보지 않았으랴만, 그로부터 '나도 이렇게 된다'라는 심오하고도 처절한 깨닫음에 넋을 놓게 될 냉장고 주인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이토록 질펀한 킬러 엘레지라니, 역시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문학에 대해 도덕적 논쟁은 필요악이지만, 이말만은 꼭 하고 싶다. 사연이야 이랬든 저랬든, 과정이야 무엇이건 간에 사람을 죽이는 일을 업으로 삼는 그녀가 '빛'의 쪽에 설 수 없다해서 마냥 '동정'만을 할 수는 없는 것은 아니냐고. 계획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어요'는 좀 아니잖아?

나는 진심으로 '투우'가 가엾다. 무너진 그의 유소년 시절, 일그러진 그의 청춘과 그의 삶에 관해서는 누가 책임을 지나. 더불어 강박사의 딸 '해나'의 삶에 드리워질 앞으로의 그림자 또한.

이 책에서 일명 방역업자로 불리우는 '살인청부업'에 너무 깊게 빠진것인지, 세간을 놀라게 한 그간의 자살 사건이나, 미궁에 빠진 사건들이 혹 킬러의 소행아냐? 섬뜩한 생각도 해본다.

 

구병모의 소설은 <파과>가 처음인데, 좀 놀랍다. 이름만으로 '그녀'를 '그'로 생각했던 내 고정관념에 놀랐고, 한편의 홍콩 르와느를 보는 것 같은 이런 책을 여자가 썼다고 놀라는 내 모습에 또 한번 놀랐다. 아, 내가 이토록 경직된 사람이었다니.

그건 그렇고 홍콩 르와르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파과>, 영화 되겠다. 주인공 '조각' 역엔 영화 <도둑들>의 김해숙이나, <돈의 맛>의 윤여정 쯤이면 괜찮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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