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심리학 - 음식남녀, 그 미묘한 심리의 속내를 엿보다
시부야 쇼조 지음, 박현석 옮김 / 사과나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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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심리에 관한 책을 읽는 이유는 상대방의 숨은 생각을 읽어 그의 의도를 내 나름으로 파악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나도 모르게 행하게 되는 우발적이거나 무의식적인 내 행동의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하는 생각이 크다. 그만큼 나는 나를 내 의지대로 움직이고 싶은 것이라 하겠는데, 의도하지 않은 행동 속에 진의가 숨어있는 경우가 많더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목차를 살펴보며 대체로 나에게 해당되는 목록을 살펴보았다. 생선구이에 솜씨 좋게 레몬을 뿌리는 사람이며, 싫어하는 음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머리를 만지작 거리는 습관이 있으며, 근사한 정식집보다는 가정식 백반집을 좋아하고, 종종 책을 보며 식사하는 사람인 나는 이 책에 의하면 상대방을 배려하는 방법도 모르고 상대방의 취향을 살피지도 않으며, 싫어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이고, 타인에게 기대고 싶어하는 애정결핍자일 뿐만 아니라 외로움을 잘 타는 반면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협조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판명났다.

내 무의식적 행동에 대한 위와 같은 해설을 읽고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읽고보니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니 뭐 그다지 충격적일 것도 없고, 이런 내 무의식적인 행동을 고쳐서 그런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므로, 특별히 개선하고 싶은 점이 없다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머리를 만지작 거리는 행동이 딱히 꼭 누군가의 애정을 필요로해서라기 보다는 펌의 웨이브를 오래도록 유지하고싶은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돌돌 마는 행위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가정식 백반집을 좋아하는 것은 가정적인 분위기 보다는 아무래도 화학조미료를 덜 사용할 것 같은 그런 건강적인 측면도 있으며, 책을 읽으며 밥을 먹는 것을 즐기는 것은 읽던 이야기가 끊어지는 것이 못마땅한 조급한 성격 탓일 수도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음식을 주문하는 행위나 먹는 행위, 차리는 행위, 먹고나서 돈을 지불하는 행위 따위로 어떤 사람을 짐작해보겠다는 의도는 조금 지나친 과욕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여성지나 패션지 혹은 여학생용 잡지 등에 자주 올라오는 심리테스트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책은 심리학 책이라기 보다는 식사예절, 매너 등을 위한 팁을 제공하는 측면이 크다. 밥 한끼를 같이 먹어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행동 뒤에 숨겨진 심리를 파악해 상대방의 의도를 미리 짐작해보겠다는 의도보다는 한끼의 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새로운 인연, 혹은 만남을 위해 지키면 좋을 매너 교습본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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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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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위화는 <허삼관 매혈기>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죽음은 상쾌한 저녁'이라고 찬미했던 하이네를 인용했다. 삶이 고통의 한낮이기 때문에 유일한 평등으로써의 죽음만이 상쾌한 저녁이라 표현될 수 있노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 <제 7일>에서 위화는 상쾌한 저녁과 같은 죽음 후의 7일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책에 등장한 죽음들은 그야말로 고통의 한낮을 겪고, 보통의 삶에 비해 조금쯤은 더 억울하며 따라서 한을 품고 죽음에 이르렀으며, 그 후에도 편안한 안식을 위해 머물자리를 찾지 못한 그런 죽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여기고 싶은 나로서는, 이 책이 의미하는 '제 7일'이란, 이승과 저승을 잇는 연옥에 머물며 이승에 남은 질긴 인연을 재정리하는 의미의 7일간을 상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각은 틀렸다.

몹시 부조리한 이 세상은 죽음 직후에도 다소간의 불평등이 존재한다. 영혼들의 화장장인 '빈의관'에서부터 플라스틱 의자와 소파로 구분되는 일반 대기 구역과 귀빈 구역이 나뉘고, 귀빈 구역의 그들은 더 넓은 묘지를 자랑하기도 한다. 그런반면 유골함과 묘지가 없어 일반 구역에조차도 앉지 못한 이들은 떠도는 영혼이 된다. 어쩌면 작가 위화는 죽음 그 이후에도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은 이승에서도 가난과 슬픔, 원한으로 고통받았으며, 죽음으로써도 그 슬픔을 끝맺지 못했다. 그러한 그들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끊이지 않은 이승의 인연으로 슬퍼하고 그리워한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일이 지나면 그마저도 모두 잊고 그야말로 슬픔도 고통도 원망도 없는 '무'의 세계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는데...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에 머무는 그들은 누군가 자신을 애도해 줄 이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애도하는 자들이다.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유골함도 묘지도 만들어줄 아무도 없는 자들이 모이는 땅인 것이다.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에 모인 이들은 모두 떠나온 세계에서는 기억하기 싫은 아픈일들을 겪었고, 그곳에서는 모두 하나같이 외롭고 쓸쓸했다. 그러나 애도해줄 사람이 있고, 유골함이 있으며, 묘지가 있다고 해서 사는 동안 고통이 없었던 사람이 있을까. 삶이 외롭지 않고 쓸쓸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을까. 어쨌든 나름의 고통과 슬픔이 있었을 것이나, 그저 남아있는 누군가가로부터 삶에서 비롯되는 고통과 슬픔을 위로받을 때 그나마의 고통도 잊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궁극적으로는 매우 평등한 것이어서 매장되지 못한 자들 또한 그들의 땅에서는 모두 아무 말도 행동 없이 그저 서로를 조용히 바라보면서 웃을 수 있다. 눈동자도 없는 빈구멍으로 부터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눈빛을 볼 수 있다. 더이상 혼자가 아니라 어딘가 섞인 무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에서는 죽인자도 죽임을 당한자도 더이상 서로를 원망하지 않는다. 드디어 진정한 평등의 세계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불평등의 자리로 보여지는 빈의관에서의 화장 절차없이 차라리 떠도는 영혼이 되어 이승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서로가 서로를 안쓰러운 마음으로 쓰다듬을 수 있는 '매장되지 못한' 영혼이 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이세계로 이어질 순 없지만, 나중에 오는 이들로 부터 자신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와 그 후 남겨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또한 나중에 오는 이들 중 아는 이를 만날 수도 있고, 이세계에서는 원망스러웠던 자들을 용서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주인공 양페이는 7일이 지난 후에야 자신을 마흔 한 해 동안 살게했던 양 아버지를 만나고, 이승에서의 슬픈 인연과 그리움을 잊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이제는 가난도 슬픔도 원망도 고통도 없는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에서 투명한 공기와 같이, 흐르는 물과 같이 머물게 된 것이다. 누군가 양페이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며 그의 유골함을 만들고 묘지를 만들어 줄 때까지... 어쩌면 영원히 '매장당하지 못한 자들의 땅'을 떠돌게 될지도 모르지만...

 

<제 7일>을 읽기 위해 먼저 <허삼관 매혈기>를 읽었다. 작가의 전작을 읽음으로서 후속작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삼관 매혈기>의 서문에서 작가는 평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는데, <제 7일>이야말로 평등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허삼관 매혈기>와 같이 역시 죽음으로써 인간은 평등해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죽어서도 평등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란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가 나로써는 여전히 모호하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위화로부터 듣고싶었는데 작가의 말이나 서문이 없었던 것은 좀 아쉽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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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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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대미술가인 위에민준의 작품 중에 <처형>은 처형당하기 위해 늘어선 사람들과 처형을 위해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이 모두 다 같이 웃고 있다. 이 작품은 소더비 경매에서 중국 현대미술 작품 중 최고가로 낙찰되기도 하였다.

 

처음 위에민준의 작품을 본 것은 우연히 들른 지방의 한 미술관에서 였는데, 웃고있는 얼굴이 너무 기분좋아 서핑을 통해 그의 그림들을 찾아보았다. 사이트를 통해 찬찬히 들여다본 여러 그림들속의 남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박장대소하고 있었지만, 처음 우에민준의 그림을 발견했을때만큼 유쾌하지는 않았다. 웃고있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듯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저렇게 활짝 웃고있는데도 말이다. 웃을 상황이 아님에도 웃는 사람들, 그 부자연스러움에 등골에 자르르 전류가 흐르고 점점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위에민준의 '웃음 시리즈'는 배반하는 현실을 비웃음과 동시에 폭력적인 현실에 눈을 감는 자아의 표현이다. 현대 중국사회에 대한 조롱과 기존 가치관에 반항하는 냉소적 시선이 숨어있는 그의 작품세계는 냉소적 사실주의라 불리운다.

 

 

<허삼관 매혈기>를 읽으며, 위에민준의 '웃음 시리즈'가 멈추지 않고 떠올랐다. 허삼관 개인의 내적 갈등과 문화혁명을 거쳐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사회구조와의 충돌에서 비롯된 냉소 같은 것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만 살기 위해 피를 팔아야 하는 한 가장의 지칠줄 모르는 생의 의지가 웃고있지만 웃는게 아닌 남자들의 얼굴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웃고있는 얼굴을 보며, 나는 한없는 염세주의에 빠지는 경험을 위에민준의 그림에서도,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에서도 꼭같이 느꼈기 때문이다.

 

새벽 세시. 마음만 먹었다면 그 새벽 이 책을 줄곧 읽어 끝낼 수도 있었지만 일락이가 간염에 걸려 상하이로 실려가고, 허삼관이 상하이 가는 길에 사나흘 걸려 한번씩 피를 뽑는 장면에서는 더이상은 책을 읽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친자식은 아니지만 자기 자식임이 분명한 일락이를 살리겠다고 대신 목숨을 거는 그 우직한 무모함에 슬픔보다는 화가났기 때문이다.

' 한 번 피를 팔면 삼십오 원을 받는데, 반년 동안 쉬지 않고 땅을 파도 그렇게 많이는 못버는데'

허삼관과 거대한 세상의 톱니바퀴가 이토록이나 자연스레 잘 맞아떨어지는데 대해, 나는 그것에 대해 화가났던 것이다. 세상에는 피를 팔아야만 사는 사람이 있고,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밖에 없는 사람에게서 그조차도 내 놓으라고 피를 사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화가 났던 것이다.

농촌 생산대로 떠난 둘째 아들 이락의 부대 생산대장이 방문해 허삼관이 피 판 돈으로 차린 상을 거덜내고, 피를 뽑아 심신이 지친 허삼관에게 몸은 상해도 마음은 상하면 안된다며 상대방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기멋대로 자꾸만 술을 권하는 생산대장에게 화가 나고, 일락의 친부라고 여겨지는 하소용을 위해 곡을 하라고 생떼를 쓰는 하소용의 아내에게 화가나고, 문화대혁명의 와중에서 허삼관의 아내 허옥란에게 기생의 누명을 씌워 비판을 일삼는 붉은 완장들에 화가나고, 극심한 가뭄으로 모두가 허기에 허덕일때 혼자서만 뒤룩뒤룩 살이 오른 이혈두에게 화가나고 화가나고...

 

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돈이 필요해질 때마다 피를 뽑는 허삼관의 이야기는 다행히도 희극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역시 희극이지만 비극적인 결말이다. 왜냐하면 삶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더이상은 피를 팔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된 허삼관이지만, 피를 팔려고 해도 이제는 아무도 허삼관의 피를 필요로하지 않을만큼 허삼관의 생은 말미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것을 '해피엔딩'이라고 보아야 할까.

 

작가 위화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것은 평등에 관한 이야기 라고 했는데, 나는 이말을 잘 이해 못했다. 책을 다 읽고나서도 여전히 잘 이해가 안된다.인간은 죽음으로써 평등해진다. 그런말을 하고싶었던 것일까? 아니, 인간이란 존재는 도대체 평등할 수 없는 존재들이란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육십이 넘은 허삼관이 매혈을 거부당하고, 세 아들에게조차도 온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을 때 승리반점에 마주앉아 허삼관을 위로하는 허옥란에게 허삼관은 말한다.

'좆 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도 자라기는 길게 자란단 말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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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오늘의 일본문학 12
아사이 료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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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을 쓴 히라노 게이치로의 <얼굴없는 나체들>에 등장하는 주인공 여교사는 남녀 회원의 프로필을 통해 만남을 주선하는 사이트에서 닉네임과 이성을 끌만한 프로필로 자신을 과장하고, 욕망과 쾌락을 위한 만남을 지속하던 어느날, 성인사이트에서 얼굴없는 자신의 나체와 수많은 댓글들을 발견한다. 거기에는 인격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저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한 얼굴없는 육체와 함께 역시 얼굴이 없는 존재들의 과도한 욕망의 표현인 댓글들만이 무성했다. 히라시노 게이치로는 <얼굴없는 나체들>을 통해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보여지는 보통의 존재들이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 발산하는 억눌리고 비툴린 욕망을 통해, 보여지는 곳과 보여지지 않는 곳에서 달라지는 인간의 이중성을 보여준 것이다.

히라시노 게이치로는 또한 인터뷰를 통해 성인 사이트에 나체 사진을 올리는 것과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은 매우 다르게 느껴지지만, 얼굴이 가려져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현실세계에서는 얼굴로 표현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잊기 힘들지만, 가상세계에서는 닉네임으로 대표되는 익명을 통해 감추어진 또 다른면을 표현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감추어져 있지만 내보이고 싶은면이 있다는 것은 반대로 보여지는 것을 감추거나 또는 확대 과장해서 재생산해 보이고 싶은 면이 있다는 이야기 일텐데, 아사이 료의 <누구>는 SNS 속의 과장되고 확대된 자신을 통해 만족을 얻는 현대인의 욕망 혹은 비굴함, 기괴함, 그리고 종내는 애잔함에 관한 이야기다.

 

다쿠토, 코타로, 미즈키, 리카, 다카요시들은 대학졸업반으로 현재 취업활동에 매진중이다. 이들은 취업을 위한 모임을 갖으며 취업에 관한 정보와 격려를 나누지만, 서로의 SNS 계정을 훔쳐보며 과장되게 표현된 홍보용 맨션에 남모르게 경멸과 비난을 일삼기도 한다. 그런 한편으로 자신들은 또다른 숨겨진 계정을 통해 비망록을 남긴다. 그러나 그조차도 진실된 자신의 언어가 아닌 보여지고 싶은 과장된 모습으로 씌여지고, 누군가는 자신을 과대평가 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이러한 모습 또한 서로서로 공공연하게 알고있지만, 얼굴을 맞댄 접대용 얼굴로는 절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서로 그렇게 아슬아슬한 경계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부풀려진 풍선은 터지기 마련이고,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듯 아슬아슬한 경계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이들의 비밀 아닌 비밀도 그렇게 터지고 무너지게 되는데...

 

관찰자의 시선으로 늘 자신은 옳은 판단을 하고 남들보다 우위에 있는 감성과 상상력을 갖고 있으며, SNS를 통해 보여지는 모습을 과대포장하는 '류'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착각 아닌 착각을 일삼던 다쿠토는 소설의 마지막에 자신의 장단점을 묻는 면접관에게 이렇게 답한다.

단점은 자신이 볼썽사납다는 점이며, 장점 또한 자신이 볼썽사납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다쿠토는 이번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지만, 그래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옮긴이 권남희는 '옮긴이의 글'을 통해 소설 <누구>의 시작이 지루하고 평이해서 쉽게 빠져들지 못했다고 고백했는데, 나 역시 그랬다. 지루하고 평이했으며, 무엇보다 장면에 대한 묘사보다는 직접적인 대화와 간결한 문체, 140자로 요약된 트윗글 등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옮긴이는 작업을 다 끝내고 나자 핵폭탄급 여운에 허우적거렸다고 했다. 나 역시 그랬다. 책을 다 읽고나자 옮긴이가 느낀 공포를  나 역시 그대로 느꼈던 것이다. 세상에 보여지고 싶은 모습만을 부풀려 표현했는데, 그것은 진실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뿐만 아니라, 부풀려지는 그 과정조차도 다 알고 있는 관찰자가 있었고, 그 관찰자가 어느날 그간의 추악한 내 모습을 바로 내 코앞에 들이댄다면 그순간을 나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 진다.

 

나 역시 한때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하기 위해 핸드폰을 손에 놓지 않은 경험이 있다. 유명인이나 동경하는 인물을 팔로우하고 팔로잉 되는 경험을 하며 트친이니, 인맥이니 허세를 부렸던 경험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는 하이텔 시절의 채팅방을 경험했고, 그 다음으론 음악파일을 매개로 잡담을 나누던 이른바 음악 방송방을 지나왔다. 가상의 공간 속에서 마음껏 부풀려진 내 모습에 만족감을 느끼던 나는 어느날 문득 그 모든 것을 그만둘 수 있었다. 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 오랜 가상의 경험을 통해 '나는 절대 나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쿠토처럼 누군가가 가상 공간속의 '나'라고 주장하는 모습과 현실의 '나' 사이의 괴리가 품은 추악함을 내 코 앞에 들이대준 경험이 없었기에 '나의 볼썽사나운 점'을 인정하게 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 것이다. 이를 다행이라 해야 할까, 불행이라 해야 할까.

 

지금 한참 SNS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공감은 하되,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자기도 모르게 부정할지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가상의 공간 속에서 원하는 만큼의 자기만족을 얻지 못하는 바로 그 순간,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 허세로 똘똘뭉친 자격지심에 대한 관찰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떠오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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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 감각의 독서가 정혜윤의 황홀한 고전 읽기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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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두 번 진행되기를 원한다면, 내가 좀 더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미래는 좀 다르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뭔가 읽고 써야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빼놓지 않고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이 고전인데...(프롤로그 중)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싶다면, 내가 좀 더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나의 미래는 좀 다르기를 원한다면, 다양한 삶을 스펙트럼처럼 미리 보게 해줄 고전을 빼놓지 말고 읽어야 할 것인데...

지은이 정혜윤이 책 제목으로 내건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바라는 바가 바로 책을 읽는 나의 심경과 같다.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세계의 변화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달라지기 위해서 일 것이다. 내가 달라진다면, 저마다의 '나'들이 달라진다면 매번의 세계는 분명 더 나은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을 믿기에 말이다.

한 저자의 책을 이어서 읽기를 즐기는 나는 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에 이어  이번 책도 그렇게 읽게 되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은 조금 실망이다. <삶을 바꾸는 책 읽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기획의도로 제작되었을 이 책은 <삶을 바꾸는 책 읽기>의 전작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후작 <삶을 바꾸는...>는 책과 함께 인간들의 이야기가 담겼다면, 전작 <세계가..>는 책과 책의 이야기일텐데, 각각의 책들에 대한 감상이 너무도 작위적이어서 읽는 나로서는 지은이의 웅얼거림을 도대체 이해못해 멍때리는 그런 기분이었다.

위대한 개츠비, 폭풍의 언덕, 위대한 유산 등의 고전 목록은 목록을 보는 것 만으로도 너무 즐거운데, 막상 내용을 읽자면 도대체 내가 읽었던 개츠비나 보바리, 주홍 글자는 뭐였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또한 아직 읽지 않은 폭풍의 언덕이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순수의 시대 등은 읽고 싶은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는 것이다.

그저 개인적인 감상이 목적이 아닌 나누기 위한 감상이라면 지은이가 책을 읽고 느낀 것들을 조금더 구체적이고, 개방적으로 써야 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행히도 이 책이 <삶을 바꾸는 책 읽기>가 출판되기 2년 전의 책이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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