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프레드 로델 지음, 이승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다못해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을 반품하는데도 법을 떠나서는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대의 생활이건만, 그렇더라도 법에 관한 것이라면 일단  그 법률용어들의 나열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지고, 평생 '법원'과는 인연없이 그렇게 무난히 살고 싶은 나에게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는 썩 즐겁게 받아든 책은 아니었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스믈여섯의 나이로 예일대학교 로스쿨 교수가 된 법학자인 지은이 프레드 로델이 쉬운 법문장 운동을 주창하고 이끌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또한 이 책이 법률가를 위한 책은 아니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는데, 지은이는 법이 만인에게 유용한 것이라는 일반인들의 생각이 착각이란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1939년 처음 출간되었던 이 책을 1957년 재판을 내면서 쓴 지은이의 서문이 무척이나 재기발랄해서 한번 읽어볼 만 하겠다라는 반가운 마음까지 들었다.

 

원문을 고수하는 만큼,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에 관해 그동안 무수히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 조금은 도전적인, 답변을 하려 한다. "충격적 효과를 노리고 과장을 한 것은 아닌가?" "지금이라면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까지 법이 나쁘다고 진실로 믿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다음과 같은 답변을 영구적인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14쪽

1957년 재출간시, 서문을 썼을 것으로 생각되는 미국의 법학자이며 법관이었던 제롬 프랭크 판사는 법이 쉬운 영어로 쓰여야 하며, 법관들이 법률을 복잡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하고, 법절차를 단순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1776년의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을 프레드 로델과 비교하며, 로델의 책이 법조계와 일반 대중들에게 법의 현실에 관한한 새로운 각성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법관도 법원도 없애자는 과격한 로델의 주장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라고 보았다. 또한 재출간의 즈음에서 로델이 자신의 처음 주장을 조금쯤은 누그러뜨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을 내 보였지만, 이에 대해 로델은 이렇게 답한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나의 친구 제롬이여, 미안하지만 그럴 생각이 전혀 없네.'

처음 출간된 그대로 개정이나 재구성없이 다시 출간된 이 책에서 지은이 프레드 로델이 걱정한 것처럼 그가 완고하거나 교만하다는 인상은 전혀 받지 않았지만, 그러나 조금 걱정은 된다. 법관도 법원도 없는 세상에서는 오히려 저마다 자신의 입장에 맞는 주장을 펼쳐 마치 심판없는 경기장에서 처럼, 힘 없고 목소리 작은 자들만 곤란하게 되는 그런 현실이 더 강화되지나 않을까 하고 말이다. 정의란 어차피 서는 쪽에 달라지는 것이 맞고보면, 이쪽도 저쩍도 아닌 심판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법을 집행하는 자들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항상 저쪽 편에 있다는 것, 저편이란 기득권자 그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사업가가 우리의 경제체제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 또한 법률가의 일이다. 법률가는 매번 회사가 설립되고, 주식이나 채권이 발행되고, 물품이 인도되거나 상품이 판매되고, 거래가 성사될 때마다 자문과 지시를 한다. 정교하게 짜인 산업과 금융의 모든 체계는 법률가들이 만든 저택이다. …… 사적인 삶에서조차 법률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서는 집을 사거나 아파트를 빌릴 수 없고, 결혼이나 이혼도 할 수 없으며, 자녀들에게 재산을 남길 수도 없다. 법률가들이 만든 미궁과도 같이 복잡한 의례와 형식을 통해 안내를 받아야 한다. -22쪽

그렇다. 법을 떠나서는 운영되기 힘든 것이 문명 사회이며, 문명 사회 속의 개인의 삶이다. 하다못해 물건을 사더라도 그러할진데, 살다가 소송이라도 걸어야 할 판이 되면 일반인들은 어려운 법 용어와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법문장과 위엄을 갖춘 검은 법복의 법관 앞에서 지레 수그려들며 옳고 그름의 판가름마저 모호한 채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프레드 로델은 법이란 말장난에 지나지 않으며, 부족 시대에 주술사가 있었고, 중세에는 성직자가 있었던 것처럼 법률가들은 현대 사회에서 세상을 쥐락펴락하며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세상을 요리하는 사기꾼들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한다. 지은이가 이처럼 강경하게 법이 속임수임을 주장하는 주된 이유는 판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판결에 이르는 과정에서 법률가들이 사용하는 추상적인 말들은 논리적인만큼 교묘한 속임수라고 보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법은 만인 앞에 공평하지 않으며, 법을 집행하는 과정은 얼마든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다루는 것은 민감하고 위험한 일이고 법이 다름아닌 언어를 다루는 사업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지나치지 않다. 길고 공허하며 복잡한 언어를 다루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고 법률 언어의 대부분은 길고 공허하며 복잡하다. 길고 공허하며 흐릿한 언어를 사회문제에 적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법이 하는 일이 그것이다. -80쪽

일련의 법체계는 힘있는 자의 편에 서서 대기업과 권력을 보호하고, 힘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압제하는 도구라는 주장도 굽히지 않는데, 그러한 사실에 관해서라면 일반 대중들 역시 이미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해도 무법천지의 세상을 꿈꿀 수는 없는 것이기에, 법원과 법관이 제시하는 '정의'를 그런대로 믿을만한 것으로, 그나마 믿어야만 하는 것으로 여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프레드 로델은 법원과 법관이 없다해서 무법천지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높은 곳에 앉아 권위의 망치를 휘두르는 자들이 없다면, 요소요소에서 각각의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상관없이 치우치지 않는 판결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법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현재의 방법을 버리자는 것인데 그것이 법원과 법조인인 것이다.

법 앞에 무시되는 형평성에 관해 토로하는 책은 무수히 많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법이 부조리하게 악용되는 현실을 고발하고, 법을 그나마라도 정의롭도록 여겨지게 만들자는 주장에 불가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그저 법의 불공함을 알리는 것에 있지 않다라고 로델은 강조한다.

 

보잘 것 없는 이 책의 목적은 그보다는 법이라고 하는 사이비 과학 전체가, 그 결과에 상관없이 속임수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법은 리처드 휘트니를 감옥으로 보낼 때도 속임수이고, 한 덩이의 빵을 훔친 배고픈 남자를 감옥으로 보낼 때도 마찬가지다. 법은 소작인을 옹호할 때도 속임수이고 이자 생활자를 옹호할 때도 마찬가지다. 법은 시민의 자유를 보호할 때도 속임수이고, 지주회사의 이익을 옹호할 때도 마찬가지다. -234쪽

검사, 변호사를 거쳐 법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법학계의 이단아로 불리우는 김두식은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우리 법조계의 부조리와 뒤틀린 사법시스템을 낱낱이 고발하고, 시민들이 나서서 법조인들과 소통하며 사법개혁을 이뤄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1939년 미국의 법학자 프레드 로델은 법원과 법관을 아예 없애야만 사법개혁이 이루어진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1957년 재출간 때에도 달라지지 않았고, 2014년 오늘에 이르러서도 역시 달라졌을 것 같지 않다. 달라졌다면 멀리 이국땅인 이곳에서 재출간되는 일조차 없었을테니까 말이다.

 

우리의 사업, 정부, 심지어 사적인 삶마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고, 모순적이며, 부조리한 추상적 원칙의 감독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할 것인가? 답은 하나다. 그 답은 법률가를 제거하고, 법을 우리의 법체계로부터 내던져 버리는 것이다. 요술쟁이와 그들의 요술을 함께 폐기 처분하고 우리의 문명을 보통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래서 정의와 공평함에 봉사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알기 쉬운 규범에 따라 운영해 나가는 것이다.-255쪽

모든 거래에는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드물게 투철한 사명감으로 뭉치지 않은 다음에야 약자편을 들기는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법을 쉬운 용어로 풀어 써, 누구라도 법전을 읽고 자신의 실생활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자는 프레드 로델의 주장에 나는 적극 찬성한다.

뿐만 아니라 국가적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성문법을 일반인들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학교 교육과정을 재편성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우리나라 노동법 하위의 임금채권보장법은 경기의 변동 및 산업구조의 변화 등으로 사업의 계속이 불가능하거나 기업의 경영이 불안정하여 임금 등을 지급받지 못한 상태로 퇴직한 근로자에게 그 지급을 보장하는 조치를 강구하는 법률이다. 노동법에 이러한 조항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아주 최근에 알았으며, 이런 법률이 있다는 것을 알고있는 주변 사람이 무척 드물다는 것도 알았다. 이런 사실에 대해 나는 매우 놀랐는데, 살면서 꼭 필요한 살아있는 지식을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더더욱 놀랐다. 학교를 졸업하는 대다수가 노동자의 삶을 살게 될 것이 분명함에도 교과 과정 중 노동법의 항목에 대해 배우지 못하고, 사회인이 되고서도 노동자로서 노동법을 들먹이면 마치 회사를 말아먹을 노조나 결성하려드는 불량인자로 보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일반인들에게 법은 더욱 멀다. 법이 만인에게 유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맞다면, 쉬운 언어로 풀어쓴 '법'을 교육과정 중에 반드시 포함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법원이나 법을 해석하고 이용하는 법조인들을 없애자는 프레드 로델의 주장이 과격하지만 옳다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단지 개혁해야 할 것이 사법체계만은 아니라는 것, 그것은 세상을 운영하는 기존의 시스템을 모두 바꿔야 가능할 것이라는 다소 비관적인 점만을 빼면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어느 지하생활자의 행복한 책일기 1
윤성근 지음 / 이매진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지금 여기 이상한 나라는 멈추지 말고, 돌아보거나 기웃거리지도 말고 앞으로 가라고만 한다. 저 앞의 신호등이 켜지면 무시하거나 욕을 한다. 손가락질한다. 세계화 시대에, 무한 경쟁 시대에, 신자유주의 시대에, 멈춘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자기 성찰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한다. -246쪽

이상한 나라가 바로 여기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나 친절한 설명을 읽은 후에야 이해했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막연히 상상하고, '이상한 나라'가 가르키는 방향이 응암동 골목 지하 공간을 향하고 있다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님을 이제야 이해한 것이다.

헌책방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헌책만 파는 것이 아닌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가치를 팔고, 서로의 마음을 팔고, 책에 대한 사랑을 파는 이 헌책방은 돈에 대한 무한사랑으로 무장하고, 경쟁을 통해서만 자기 몫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이상한 나라인 현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상하지 않은 공간일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일일히 설명해줘야 이해할 수 있는 이상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물론 다른 전통적인 헌책방하고는 겉모습이 좀 다르지만 세무서에 헌책방으로 신고를 했고 실제로 중고 책을 사고 파는 일을 하는 곳이다. (140쪽)

'2009 헌책축제'(이런 축제가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고, 검색을 통해 알아보니 축제가 영 성의없었다는 몇몇의 게시글을 발견했다. 과연 그러했던지 2009년 이후에 서울 헌책축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나로서는 무척 아쉽다.) 후, 헌책 계통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 쓴 글 중에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헌책방도 아닌데 왜 초청되었는지 모르겠다는 글을 읽고, 주인장은 서운한 마음에 답글을 달았다고 했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다른 유명 헌책방들처럼 오랜 전통을 가진것도 켜켜히 숨어있는 많은 헌책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헌책방이 맞다. 또한 청소년 문화 행사를 열고, 가끔은 노래도 하고 연주하며, 전시를 열기도 하지만 그러나 헌책방이 맞다. 뿐만 아니라 지역민을 위한 책읽기 모임을 열기도 하고, 자신의 책을 가져다놓고 그 책이 팔리면 포인트를 적립을 받아 다른 책으로 바꿔볼 수 있는 순환도서를 운영하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장소를 대여하기도 하는 이곳은그러나 근본적으로 중고도서를 사고파는 헌책방이 맞다.

헌책방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위의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책을 팔아 돈을 벌기 보다는 책을 통해 사람사는 세상다운 가치를 공유하고 싶다는 주인장의 독특한 세계관, 인생관 때문이다. 그는 동네마다 이러한 책방 하나쯤 갖춘 그런 나라가 이상하지 않은 나라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을 가진 헌책방 주인이 우리동네에 없다는 것이 한참이나 억울했다. 앗, 그렇다면 내가 이런 헌책방 주인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당장 실현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있다.

 

책방은 주인 혼자만 운영하는 게 아니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가치를 만들어 가는 곳이다. 그 가치는 책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동네 한구석에서 연기처럼 피어나는 철학이 되어야 한다. 고향 동네에서는 밥 먹을 때가 되면 온 동네에 밥 냄새가 난다. 집집마다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동네 골목 곳곳에 들어선 작고 소박한 책방에서 피어나는 연기가 바로 구수한 밥 냄새가 되어 사람들을 배부르게 만들고, 배고픈 사람에게 원 없이 뜨끈한 밥을 퍼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작은 책방이, 그 책방을 들고 나는 평범한 동네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281쪽)

진실로 진실로 우리동네에 이런 책방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퇴근길이던 저녁을 먹고난 후의 산책길이던 친구집을 들르듯, 무심결에 편안한 마음으로 습관처럼 들러 책을 고르고, 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랑방과 같은 작은 책방 하나씩 동네마다 품을 수 있다면, 하루하루의 삶이 이토록 강팍하게 여겨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또한 아이들이 갈 곳이 없어 피시방엘 가노라는 말은 안하는 이상하지 않은 동네가 될 것도 같다. 억지로 독서토론 학원에 등떠밀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책과 친해질 수 있는 이런 공간 하나쯤 동네에 있어도 좋지않겠나. 아니 하나쯤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겠나.

 

책방에서 책만 팔면 그건 책이 아니라 책처럼 생긴 물건을 파는 거나 같다. 책을 파는 책방이라면 책 안에 있는 가치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가치는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다. 그러니까 책만 팔아서는 가치를 만들지 못한다. 가치를 만드는 건 누구 한 사람이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만나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철학하고, 그걸 그러모아 계획해야 하는 일이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말 그대로 이상한 나라에 있는 헌책방이다. 나는 여기서 착한 일을 많이 만들고 싶다. 돈은 조금만 벌고 남은 건 다 착한 일 하는 데 쓰고 싶다. 착한 사람들 모이는 책방이 여기저기 동네마다 많이 생겨나면 좋겠다. 가난한 동네에도 책방이 생기고 부자 동네에도 책방이 생겨서 그 많은 책방들이 다 좋은 일 하는 사람들로 가득 넘치면 좋겠다.(284쪽)

주인장의 이런 생각들을 읽으며, 이런 책방 하나 없는 우리동네가 갑자기 시큰둥하게 여겨졌다. 불과 1년전, 베란다 앞쪽에 산이 보이고, 아이가 다니는 대안학교와 가까운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난 후, 얼마나 행복했던지를 까막득하게 잊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없는 것을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고, '나'라도, 다만 '우리아이'라도 책을 사랑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다독여야 겠다는 생각이다. 대한민국이 살만한 세상이 되도록 다독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이며, '우리아이'라는 것을 잊지말아야 겠기에 말이다.

살아가는 동안 5,000권 쯤의 책을 더 읽고, 감상을 쓰고싶다는 꿈 외의 꿈이 하나 더 생겼다. 좋은 책을 나누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존중하는 가치를 나눌 수 있는 이런 소박한 책방 하나, 나도 꾸리고 싶다는.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4-02-11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중고샵은 '중고샵'이나 '중고서점'이지 '헌책방'이 아닙니다.
이분이 하는 곳도 '복합문화공간'이나 다른 차원 책방이지 '헌책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헌책방은 '헌책을 파는 곳'이 헌책방이니까요.
예스24나 다른 인터넷책방에서 '중고 서적'을 판대서
이곳이 '헌책방'이 되지 않아요.

여러 문화활동을 하면서 '중고 책'을 판대서 헌책방이 되지 않습니다.
헌책을 파는 가게로 있어야 헌책방이고,
헌책방으로 있으면서 문화활동을 할 수도 있을 뿐입니다.

'전통적인 헌책방'이란 따로 없습니다.
'전통적인 옷가게'나 '전통적인 극장'이 따로 없고,
'전통적인 논'이나 '전통적인 시골'이 따로 있지도 않아요.

헌책방은 헌책방일 뿐이고,
'복합문화공간'은 그저 '복합문화공간'일 뿐이에요.
'헌책방'이라는 공간을 좋아하기에 '헌책방'이라는 이름을 쓰는 일은 자유이지만,
이 자유를 내세워서,
'헌책방'을 하는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가 가도록 해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eBook]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장 속물적인 돈 이야기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는 생전에 이미 러시아 최고의 작가였다. 평생 대중의 냉대 속에 묻혀 살다가, 죽고 난 후에야 명성과 명예를 얻은 불운의 작가가 아니였음에도 대부분의 경우 당장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 안타깝게도 생존을 위해 써야만 했던 당대 러시아 최고의 작가는 바로 도스토예프스키다.

헉! 소리가 나게 놀랐다.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벌어 다름아닌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써야했던 대 작가라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 장황한 도스토예프스키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 보겠노라고 선택한 책이 바로 이 책이 였다. 러시아 문학을 강의하고 도스또예프스키 전집을 번역한 석영중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는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이전에 대문호 톨스토이를 근본주의에 미친 노인으로 해석한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를 재미있게 읽었기에 선뜻 이번 책도 고를 수 있었다. 평생을 돈에 쫓기며, 돈을 쫓아 산 또 한 명의 대 작가라니. 다소 실망스럽지만 이 책에 대해서라면 이번에도 역시 실망하지 않을 것 같았다. 러시아 문학 전공자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도스토예프스키를 친근하게 읽히고 싶어 쓴 책이라는 석영중 교수의 말처럼 이 책과 함께 읽는 도스토예프스키는 흔히 말하는 고리타분한 고전작가라기 보다는 현대의 미스터리 작가처럼 흥미진진할 수 있겠다 싶다.

 

석영중 교수가 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의 돈은 자유이며, 시간이고, 인간관계의 기본 고리이다. 또한 돈은 무엇보다 힘이며 권력이다. 이러한 통찰은 늘 돈에 쫓겨야 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산 경험에 의한 것으로 책상물림에 의한 죽은 지식이 아닌 것이다.

공병학교에 다니던 청년시절에는 과시용 소비가 다소 있기는 했지만, 그 이후 토스토예프스키의 전생애를 통해 늘 돈이 궁했던 것은 이른바 측은지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니,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빈곤했던 것이 아니라 너무 너그러웠던 탓에 늘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죽은 형의 빚을 도의적인 책임 때문에 떠안았고, 형의 남겨진 가족들과 의붓아들에 대한 책임 또한 회피하지 않았다. 또 사랑하는 아내 안나에게 선물하는 것 좋아했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분수를 넘는 지나친 적선이나 선심이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사치나 낭비 때문은 아니였더라도 늘 돈에 쫓긴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번에 큰 돈을 벌기 위해 도박에 빠지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쓴 작품이 바로 <노름꾼>이다. 이렇듯 돈에 대한 작가의 경험은 여러 작품 속에 녹아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죄와 벌>은 돈 때문에 벌어진 살인 사건 아니던가.

어쨌든 도박 때문에라도 돈에 대한 그의 열망은 더 커졌으며, 돈을 쫓고 돈에 쫓기는 악순환의 반복 속에서 매번 책을 쓰겠다는 약속을 하고 출판사로부터 미리 돈을 당겨 쓰거나 지인들에게 애처러운 편지를 써서 빌렸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돈을 빌린 지인 중 트루게네프가 있는데, 이후 트루게네프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행동은 도저히 대작가 답지 못해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또 그도 역시 중년의 한 가장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작가라기 보다는 돈에 쫓기던 불쌍한 삶이였다고 생각하니 좀 씁쓸하긴 하다. 이렇듯 돈에 쫓기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빚쟁이 인생은 폐동맥 파열로 60세에 사망하기 얼마 전에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늘 돈이 부족했던 도스토예프스키임에도 그가 돈을 삶의 전부이며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에 대한 판단보다는 돈의 철학을 탐구하고자 했던 것이며, 돈을 이해한 사람이었다라고 석영중 교수는 말한다. 또, 도스토예프스키는 경제학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다고 한다. 숫자를 무엇보다 어려워했고, 때문에 경제에 대해 이론보다는 감성적으로 다가선 사람이라고 했다. 이부분에서 어찌나 반가웠던지. 다름 아닌 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돈을 코드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이해하는 일은 너무 즐거웠다. 이미 읽었던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장면을 기억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새롭게 안 사실들에 대해 흥분하기도 했다. 또한 새롭게 안 사실들을 생각하면서 두 작품을 다시 읽어봐도 좋겠다 생각하지만 무엇보다 아직 읽지 않은 <악령>이나 <백치>를 먼저 읽고 싶다.

 

에필로그에서 석영중 교수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 라고 했다. 사실 조금 실망이다. 행복을 위해 산다니 너무나 상투적이고 교과서 적이다. 인간은 행복해 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그냥 태어났으니까 산다. 그야말로 죽을 수는 없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돈이 행복의 척도가 아니듯이 행복이 삶의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과연 행복해지기 위해 돈을 쫓았던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저 살자면 무언가 눈에 보이는 목적이 있어야 했던 것은 아니였을까? 때문에 수중에 돈이 들어오더라도 개인적인 사치나 낭비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쓰듯 퍼부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도스토예프스키가 돈에 쫓기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는 대작가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필력이 경험을 쫓을 수는 없을 테니까. 어쨌든 그는 돈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돈에 무관심했던 것이다. 사랑했다면 쌓아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흐믓해 했을텐데, 그는 늘 돈을 써버리지 못해 안달이였으니 말이다.

이 책으로 삶과 행복에 관한 비밀을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숨은 그림은 짜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과 함께 읽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정말 흥미진진하니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숲노래 2014-02-07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끼 님은 돈에 시달리며 글을 쓴 일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지요.
그런데,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스스로 즐겁게 가난을 받아들이면서
온갖 경험을 다 하고,
이 경험을 다시 글로 썼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아무튼, 도끼 님은
글을 쓰며 누린 고단한 삶을
언제나 즐겁게 맞아들였으리라 생각해요.

비의딸 2014-02-09 16:28   좋아요 0 | URL
언제나 즐겁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어쨌든 보통 사람은 아니였던게 분명해 보이네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친절한 금자 씨'라는 영화 제목에서 차용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막돼먹은 영애 씨'를 아버지 카라마조프를 보면서 떠올렸다. '막돼먹은 영애 씨'라는 프로를 안 보았기 때문에 영애 씨가 정말 막돼먹었는지, 막돼먹었다면 어떤식으로 막돼먹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카라마조프 가의 아버지 표도르를 보면서 그야말로 '막돼먹은 표도르 씨'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두 아내에게서 세 아들을 얻었다. 지참금을 들고 온 아내들은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지참금은 고스란히 표도르의 차지가 되었으며, 그녀들이 남긴 아들들에 대해서라면 표도르는 소 닭 보듯 여긴다. 결국 그들은 남의 손에 의해 성인이 되어 표도르를 방문한다. 첫째 아들 미챠는 어머니가 남긴 재산에 대해 아버지와의 담판을 위해, 둘째 이반은 형의 약혼녀인 카체리나에 빠져서, 셋째 알료샤는 거룩한 수도사가 되기 위해 그들의 고향이며 아버지가 있는 곳을 찾는다. 그 와중에 미챠는 아버지가 눈독을 들여온 그루센카에게 홀딱 반하고, 아버지는 아들과 연적이 된다. 그리고 곧 일어나는 살인 사건. 과연 범인은 미챠로, 친부를 살해한 것일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나면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사회심리학 교수의 말에 힘입어 오래 전에 읽기를 시도했었지만, 그 당시에는 1권의 1/3도 채 읽지 못했다. 불화중인 카라마조프 가의 남자들이 추종자들에 의해 성인으로까지 추앙받는 조시마 장로의 암자에서 화해를 위한 회합을 갖기로 한 장면 쯤 까지로 기억하는데, 자못 연극적이며 장황한 대사들에 기가 질렸고, 셋째 아들인 알료샤를 비롯한 종교적인 장면들이 거북스러웠던 것이다.

더구나 내가 읽기를 시도했던 민음사 출판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전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권 한 권이 너무도 두껍고 투박한 일명 벽돌책이기 때문에 미리부터도 잔뜩 긴장했던 탓도 있겠다(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에 대해서라면 나름 불만이 좀 있는데, 번역이 좋고 책이 튼실하다는 훌륭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홀쭉한 판형으로 인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처럼 들고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책들이 더러 있다). 원본의 판본을 따른 탓이겠지만, 4부 12편에 에필로그까지 있는 마당이라면 좀 더 읽기 좋게 나누어 분철했더라도 좋지 않았을까. 이건 뭐 책 세 권을 읽는 동안 손목 골절이라도 생긴 것 마냥 힘들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읽기를 실패한 후, 오랜기간 다시 읽기를 시도하기조차 껄끄러웠던 카라마조프네의 이야기를 읽어 볼 마음이 생긴 것은 <촘스키, 만들어진 세계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를 읽으면서 였다. 촘스키는 이 책에서 둘째 아들 이반 카라마조프의 서사시 '대심문관'에서 발췌한 부분을 인용했는데, 바로 이 글을 읽고 지금이라면 카라마조프가 어렵지 않겠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가 지상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는 그래야 약하고 미천한 대중에게 자유를 포기하고 우리에게 복종해야만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중은 소심해지고 겁먹고 행복해 질 것이다. -<촘스키, 만들어진 세계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 193쪽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해 낸 것일 수 있겠다는 의심을 요즘들어 하고 있는 나에게 이보다 더 흥미로운 글이 없었다.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대중적인 신은 진정한 신이 아닐 수 있겠다 라는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 인간과 세상을 그의 피조물로써 '사랑'한다면 우리 세상에는 설명되지 않는 일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를 얻고나면 어서 빨리 자신이 경배할 대상을 찾는 것보다 더 끊임없고 더 고통스러운 근심거리는 없는 법. 경배를 하긴 하되 공동으로 해야 한다는 요구야말로 인간 개개인이 개별적이건 인류 전체로건 태초부터 골머리를 앓아온 주된 문제인 것이다. 공통적으로 함께 경배하기 위해 그들은 서로서로를 검으로 박멸해 나갔지. 그들은 신을 창조했고, 서로서로에게 너희의 신을 버리고 와서 우리의 신들 앞에 경배하라. 그러지않으면 너희와 너희 신들에게 죽음이! 라고 호소했지. -1권, 535쪽

1600쪽이 넘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중 역시 백미라면 이반이 열 페이지 넘게 읊어대는 자신의 서사시 '대심문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심문관은 어느날 재림한 예수를 비난하는데, 인간에게는 천상의 빵을 위해 지상의 빵을 희생 할 만한  믿음이 없으며, 때문에 그들에게는 권위에의 복종을 위한 신비나 기적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너무도 설득력있게 들려서 나는 대번에 이반에게 빠져들었다. 이반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악마에 가깝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악마라기 보다는 투철한 자의식으로 무장한 지적인 인간인 것이다. 오히려 악마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므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지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이는 이반의 주장은 악마적이기 보다는 탐구적으로 여겨지며 바로 그점이 나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것이다. 그는 뭇대중처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서지 않으며, 경배를 받쳐야 할 대상에 대해서도 의심을 내려 놓지않는, 그러나 결국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캐릭터이다.

그에 비해 순종적이며, 지극히 선하고 순수해 그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천사와 같은 알료샤에 대해서는 이번에도 역시 반감을 가졌는데, 정령 인간은 천사일 수 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카라마조프의 핏줄이 아니던가. 인간에 대해 의심이 많은 나로서는 알료샤의 내면에 대해서도 역시 믿을 수 없다라고 생각 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아버지인 파블로비치를 가장 많이 닮은 것은 첫째 미챠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머리보다는 행동으로 말하고 부패 속에 영혼을 질식시키는 방탕한 자이며, 다소 희극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저열함도 언뜻언뜻 비쳤는데, 그를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적 저열함이라고 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카라마조프라고 여겨지는(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와 백치 여인 사이에서 잉태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하인 스메르자코프에 의하면 표도르를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은 의외로 둘째인 '이반'으로 밝혀진다. 어째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케케묵은 위선과 미사여구에 대한 반항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반의 그것은 아버지인 표도르의 광대짓에 견줄만도 하다 싶다.

 

방탕하고 탐욕스럽고 저열하며 막무가내인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살해 되고, 미챠는 친부 살해범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미챠가 살해범이라는 증거는 바닷가의 모래알 만큼이나 널려있고, 사람들은 모두 미챠가 범인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알료샤만은 미챠의 결백을 의심하지 않는다.

3권의 삼분의 일 가량을 차지하는 이 재판 장면은 소설의 절정인데, 미챠를 친부 살해범으로 모는 검사의 가열찬 주장이나 배심원의 동정을 유발하기 위한 변호사의 절절 끓는 논고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특기인 장황함으로 몇 장에 걸쳐 계속되지만 지루함을 느낄 여지가 없다. 변호인으로 페테르부르크로부터 초빙된 페츄코비치는 살인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이 사건은 친부 살해는 아니라는 희안한 주장을 펼치는데, 낳았다고 다 아버지가 아닌 즉 아버지 노릇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를 아버지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친부 살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페츄코비치의 바로 이 주장 때문에 미챠는 전락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막돼먹은 아버지일지라도 어떻든 부권에 대한 도전은 폐륜이며, 살인은 죄악이라고 보는 심성은 꼭 배심원들이 촌놈에 지나지 않기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이 역시도 어쩌면 가장 러시아 적인 심성이 아니였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십 대에 사회주의 경향을 띤 모임에 참석하고,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불온한 편지를 낭독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 받고 극적으로 감형된 후, 어이없게도 극우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때문에 친부 살해라는 본 사건은 조국인 러시아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거나 신에 대한 반란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 최후의 작품으로 그의 모든 인생과 역량이 집대성 되어 있는 만큼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죄와 벌>에 비해 읽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라마조프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죄와 벌>을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졌고, 그 외의 <악령>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블로모프 1 대산세계문학총서 10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 지음, 최윤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곤차로프의 몇 편 되지않는 작품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작품이라는 <오블로모프>를 읽었다. 곤차로프라는 작가의 이름조차 몰랐던 나는 석영중 교수가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에서 먹다가 죽은 남자로 소개한 '오블로모프'에 급 호감을 느끼고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석영중 교수는 <오블로모프>는 러시아 요리의 백과사전이랄 만큼의 온갖 요리들과 함께, 한 귀족지식인의 무기력한 삶을 보여주는 소설이라 했다.

당시 대다수 러시아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곤차로프 역시 중류 계층의 지주 귀족을 주인공으로 등장 시켰다. 이 소설로 인해 허무감에 빠지고 무기력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19세기 러시아 사람을 일컫어 오블로모프 기질(오블로모프시치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곤차로프는 소설에서 느긋한 몽상가 오블로모프와 민첩한 실리적 인물의 전형인 독일계의 슈톨츠를 대조하며 옛 러시아 귀족주의 전통과 함께 막 발달하기 시작한 자본주의 산업화가 서로 불안하게 공존하는 당시 러시아 사회 상황을 조명한 것이다.

게으르며 무사 태평한 타고난 귀족 오블로모프는 죽음과 같이 잠든 상태에서 그만 깨어나라고 소리치는 슈톨츠에게, '자만심과 우월감으로 가득찬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며, 자신이 더 고상하다라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항상 누구보다 앞서야 한다는 경쟁심에 사로잡혀 쫓기듯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잠을 자고있는 것은 아니냐, 그들이 오히려 죽은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냐'고 강변한다.

 

누구에게서도 환하고 평온한 시선을 발견할 수가 없어. 모두들 서로에게 어떤 괴롭기 그지없는 근심과 우수라는 전염병을 옮기고 있고 병적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어. 진리며 선행도 자신에게나 관대할 뿐 남을 위한 것들은 전혀 없고, 동료의 성공에 얼굴이 백짓장으로 변해버린 단 말일세. 어떤 이는 근심을 하지. 내일 관청에 출근을 해야 하는데, 일이 오 년째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반대파가 치고 올라오고 있어. 그러니 오 년 내내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야. 어떻게 해서든지 반대파를 막고 공격에 대비해서 자신의 행복이라는 건물을 쌓아올리고야 말겠다는 야심. 오 년 동안을 하루같이 왔다갔다하고, 사무실에 앉아서 한숨만 내쉰다네. 바로 이것이 삶의 이상이자 목표란 말일세! 또 어떤 사람은, 매일 관청에 출근해서 오후 5시까지 근무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왜 나에겐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무거운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네. -285쪽

오블로모프의 이러한 모습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떠오르게 한다. 바틀비는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자발적 의지를 강하게 표하며 어느날 그렇게 죽어간다. 물론 오블로모프의 경우, 어린시절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귀족의식에 의한 '무위'이다. 다른 사람의 수고를 통해서만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면서도 그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귀족'이라는 족속의 생리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오블로모프는 바틀비와는 전적으로 다르며, 또한 바로 그렇기때문에 오블로모프의 '무위'는 게으름으로 지탄받아 마땅할 것이다.

귀족이나 하인, 농노의 개념은 사라졌지만 자본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오늘날에도 인간 사회의 계층이나 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바틀비는 바로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한편, 귀족적 무위 의식에 허우적거리는 오블로모프는 사랑조차도 자기 스스로 챙길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로 보여 답답했다. 때문에 오블로모프와 올가의 사랑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1권이 지루했다. 먹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라니 이보다 더 지루한 이야기가 있을까. 사랑하는 여인 올가와 헤어지게 되면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그야말로 밥 먹듯이 하는 오블로모프이지만, 그녀와 헤어지게 되더라도 절대 그가 죽기 않으리라는 것은 올가도 알고, 나도 알고 오블로모프 그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죽겠다는 그의 말은 그저 그 순간을 모면하고, 자신의 사랑을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한 핑계인 것이다.

 

또한 오블로모프는 자기가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주어지는 것인지에는 전혀 무관심한 채로 차려지는데로 무작정 받아 먹고 마시며 잠만 잔다. 심하게 비약하지 않더라도 그 모습은 막사의 돼지를 떠오르게 하는데 그것이 오블로모프 기질, 즉 19세기 러시아 귀족의 모습이라니 곤차로프가 귀족에게 어떤 억하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어쨌든 오블로모프는 농노의 피를 받아마시며 무위도식하는 러시아 귀족의 대표격으로, 자신의 시중을 받는 자하르와 아가피아 마트베이브나와 그밖의 3백명이나 되는 농노들의 맹목적 충성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궁금한 것은 자하르와 아가피아 마트베이브나 같은 충성심을 바치는 쪽 인간들의 심리인데, 그들의 노예근성이 내심 놀라웠던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본시 누구에겐가, 혹은 무엇에겐가 충성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약한 것은 않을까 하는 생각하는 한편,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숙명이었다 라고 여겨진다. 귀족계급은 조상대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농노들의 충성으로 살아온 이상, 하얀얼굴에 부드러운 손, 여린 심성의 귀족 기질을 후손대대로 이어갈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말이다. 결국 귀족이란 족속은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멸족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정력적이고 활동적인 슈톨츠는 미사여구로 노동을 예찬하고 바쁘게 돌아다니며 부지런한 삶을 예찬하지만 그의 목적은 부의 축적에 있다. 그런만큼 그는 계산적이고 노련한 삶의 방식을 고수한다. 슈톨츠의 이런 약삭빠른 모습 때문에 오히려 인간성과 미덕을 갖춘 인물로 그려지는 오블로모프의 '무위'가 더 인간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순간도 있었으니, 이는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떻든 나 역시도 할 수만 있다면 되도록 활동이나 노동을 줄이고, 정신적인 활동에 더 많은 중점을 둔 생을 살고싶은 것이 사실이니까. 다만, 다른 사람을 나의 필요를 위해 이용하지는 않아야 겠지만 말이다.

오블로모프의 삶의 방식을 돼지의 그것이라고 비하하는 심정과 함께,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