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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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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국가는 국민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질서를 유지하고,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며, 국가라는 이름으로 묶인 공동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공동의 이익에 대한 공평한 분배를 집행하는 기관이며, 국민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힘쓸 의무가 국가에게는 있다. 적어도 국가란 일부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희생하는 이기적 공동체가 아니며,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착취하기 위한 도구일 수도 없다. 더불어 국가라는 무형의 관념을 위해 국민 개개인의 희생을 요구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된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국민학교 시절 대통령의 사진이 걸린 교실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단일민족 백의민족 따위로 치장된 애국심에 고취된 교육을 받았다. 국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지보다는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를 먼저 고민하라고 배웠다. 따라서 국가가 국민 개개인의 안녕과 평화와 발전과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아주 최근에 하게 된 것이고, 그 이전의 국가관이란 따로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우리 민족 공동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이므로 개인은 당연히 집단을 위해, 즉 국가공동체를 위해 희생되어질 성질의 '것'이라고 습관처럼 생각했다. 개인이 국가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는 것은 아주 발칙한 혹은 불온한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해왔다. 

그러나, 그러나, 생각이 달라졌다. 국가는 당연히 국민 개개인의 평화와 안녕과 발전과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개개인은 또한 국가에 자신의 평화와 안녕과 발전과 행복을 위해 무엇인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유시민. 그를 싫어하게 된 것은 그가 보건복지부 장관직에 있을 때의 말발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대통령도 장관도 빛나는 말발 때문에 욕을 먹던 시절이었다고 기억한다. 국민을 위해 더 나은 국가를 만들라고 뽑아놓은 대통령과 장관이 어지럽히는 뉴스가 날이면 날마다 모든 것은 그들의 말발 탓이라고 외치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하고는 상관없는 먼 일처럼, 내 한 몸 편키만 하면 될 줄 알았다. 국가와 내 행복은 직결된다는 것을 잊고서. 부르주아지도 아니면서 마치 부르주아지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그러던 어느날 잔치는 끝났다. 열정과 신념 빼고는 아무것도 없던 비주류 대통령이 투신하던 날. 땡볕 아래 불타오르던 아스팔트 광장을 눈물로 매우던 그날. 그 모든 것은 끝났다. 내 한 몸의 평화는 결코 내 한 몸에서 시작되는 것도, 끝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는 순간이었다. 가려진 진실을 알아야 겠다는 생각 또한 하게 되었고, '것처럼'을 내 인생에서 빼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 책이 필요했다. 유시민의 이 책 또한 그래서 읽게 되었다. 그의 국가관을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더이상 정치에서 비주류로 지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책에서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는 훌륭한 국가에서 개인의 훌륭한 삶이 가능하다라고 말한다. 서문에서는 훌륭하다는 의미가 다소 모호했지만, 8장, '국가의 도덕적 이상'을 읽을 때 쯤에는 그 훌륭함의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돌아가야 할 것을 마땅히 돌려받는 사회 공동체라면 응당 훌륭한 공동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평한 사회적 배분이 가능한 공동체 안의 개개인의 삶의 질 또한 훌륭하다고 할 것 까지는 없으나 적어도 불만스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책에서 유시민 대표도 밝히고 있지만 사실 국민은 이상이니, 이념이니 하는 관념보다는 실제로 자신이 원하는 행복한 삶을 실현시켜줄 정치인과 정부를 원한다. 실제적인 삶의 행복에, 정치적 사상적 옳고 그름은 뒷전이 될 수 밖에 없다. 국민 개개인이 이념적으로 사상적으로 훌륭한 삶을 상상하기에는 현실적인 고통은 너무 크고,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유능한' 정치인에 목이 마른 것이다. 여기서의 '유능'이란, '나를 잘 살게 해줄,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실체적 유능을 말한다. 민중이 원하는 것은 공동체의 행복을 우선해 나 개인의 행복 실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이 행복한 사회가 진정 행복한 사회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9장, '정치인에게는 어떤 도덕법이 요구되는가'를 읽으며 나는 유시민 대표가 이 책을 진보세력과의 연합에 목적을 두고 썼다는 확신을 얻었다. 보수주의와는 달리 진보주의는 말 그대로 진보한다. 진화하고 변화한다. 그런데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공인된 지배적 사유습성을 바꾸려하는 시도는 불온한 것으로 본다는 베블런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진보적이라는 것은 탄력적이라는 말과도 비슷한것이 아닐까. 진화와 전진은 한가지 사상만을 고집해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연합하고 섞여야 하며 다양성을 인정하는 집단이 진정한 진보집단이 아닐런가 하는 생각도 가능하다.  

유 대표는 베버의 말을 인용해 정치인에게 필요한 자질 세가지로 열정과, 책임의식과 균형감각을 강조했다. 자신의 정치철학을 피력한 것이라고 보는데, 국민들이 연합정치를 정치적 권력욕이 아닌 진정한 책임의식으로 볼 수 있도록, 연합에도 발빠른 계산보다는 진정성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역시 말발보다는 글발이 멋진 유시민 대표다. 정제된 그의 글은 그가 철학이 있는 정치인 임을 보여준다. 명예욕에 눈 먼 이론가이거나, 권력욕에 눈이 먼 정치꾼이 아닌, 합법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를 국민을 위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할 책임의식과 자신의 이론과 자신의 정치활동에 대한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성찰하는 균형감각을 지닌 정치가 유시민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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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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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라는 책 제목은 마치 연애 심리학 내지는 실연극복 심리학 정도의 내용을 상상하게 한다. 더불어 야릇하게 다리를 포갠 표지그림 마저도 지하철에서 책을 펴들고 앉기에는 민망한 정도이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자본주의시대에 무수한 유혹과 욕망으로 부터 피로를 느껴본 사람이라면 읽어야 할 인문학서라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보고,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진정 필요치도 않은 물건에 대한 욕심을 고민했기 때문에, 그러한 고민들이 삶에 피로를 더 해준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닫았기 때문에 이 책을 욕망할 수 밖에 없었다. 

 

강신주, 그는 참으로 친절한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였다. 고전을 읽기에 도움을 받고자 선택했던 책이었다. 고전 서평서도 아니고, 개론서도 아니며 참고서도 아니었던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 에서는 내가 생각한 종류의 도움은 받을 수 없었지만 한가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강신주는 참 친절한 철학자로구나.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 그 생각은 더 깊어졌는데, 읽기에 수월하지 않을 보들레르, 짐멜, 부르디외, 좀바르트, 보드리야르 등등의 인문학자들의 책들을 참으로 친절하고도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고전에 대한 도움은 <철학이 필요한 시간>보다는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 더 구체적으로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지금 시대에 이 땅에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혹은 행복으로 알아라' 라는 말을 들으며 성장했다. 남녀차별과 신분차별이 심했던 조선시대가 아니라 성차별, 계급차별이 없는 것처럼 포장된 현대에 또, 노력하면 누구나 잘 살수 있다는 논리의 자본주의 나라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라는 뜻의 말이였는데, 나는 진정 그것이 감사한 일인줄 알고 성장했다. 그리고 게으름과 낙오는 죄악이므로 부지런히 노력하고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구조화된 구조, 구조화하는 구조 아비투스인줄도 모르고. 가능성의 장으로서의 미래를 믿으면서. 

 

이 책을 읽으며 막연하게 뜬구름 잡듯이 눈치를 채고 있는 자본에 대한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자 덜컥 겁이나기도 한다. 산업자본이 개인을 노동자와 동시에 소비자로 만들고, 노동자도 소비자도 산업자본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된 지금, 산업자본으로부터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내가 해야할 일들이 너무나 막연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생산-소비 협동조합을 주장하기도 하고, 자본주의에 종속된 삶을 거부하는 이들이 지역화폐 우동인 '레츠'를 고안하고 실제로 '레츠'를 사용하는 공동체들도 있다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산업자본으로 부터 무엇보다 자유스럽고싶지만, 취업을 거부하고 소비를 떠나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어쩌지 못하겠기 때문이다. 고작 내가 한다는 것이 우리 아이는 종속된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하는 막연한 생각뿐이고,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할까하는 데는 우왕좌왕할 뿐이다.  

 

아직은 더 많은 책들을 읽고 자본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산업자본을 이길 대안에 대해서도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겠다는 결론 밖에는 없다. 그렇기에 부르디외라든가, 보들레르, 하비, 벤야민 등등의 저술들을 읽어볼 용기를 이 책을 통해 얻었다. <꾸리찌바 에필로그>와 <녹색평론> 등에서 보았던 지역화폐 '레츠'에 대해서도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 또, '사용가치'와 '기호가치'를 헷갈려하지 않는 소심한 소비자가 되겠다는 결심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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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서재 -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의 책이 되었다
한정원 지음, 전영건 사진 / 행성B(행성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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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들을 찾아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책이란 무엇인지,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책은 그들에게 어떤 것을 주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만큼 책을 좋아하는지, 추천하고 싶은 책은 어떤 것들인지... 이런류의 북멘토를 찾는 기획은 많다. 요즘처럼 독서가 '대세'인 때는 더더욱.  

  이 책 역시 그러하다. 각계의 명사들을 만나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그 외에, 내가 이 책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그들의 서재였다. 서재는 보여지는 '무엇'이다. 그 무엇은 서재 주인의 지식임은 말할 것도 없고, 서재 주인의 세월이기도 하고, 심성이기도 하며, 욕망이기도 하다. 책에 미친 사람들은 안다. 서재라는 보물창고의 의미를. 그들의 서재를 보면서 어떤 어떤 책들이 꼽혀있는지를 꼼꼼히 들여다 보았다. 법학자 조국의 서재에서는 공지영의 <괜찮다 다 괜찮다>, 박완서의 <오래된 농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발견했다. 그가 왜 감성의 법학자인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자연주의 살림꾼 이효재의 서재에서는 만화방만큼이나 많은 만화책더미를 본다. 세상에나! 그녀에게서 품어져 나오는 꿈을 꾸는 듯한 아련한 포근함의 근원을 알 수 있었다. 

 

  나에게도 딱히 서재라고 이름하긴 뭣한 공간이 있긴 하다. 일단은 거실을 서재로 꾸민 셈인데, 책은 거실 외에도 공부방, 주방, 침실 할 것없이 침범하고 있다. 서재라고 이름한 거실만으로는 책을 다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책이라면 발에 치일 정도로 여기저기 쌓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히 언제 어느 순간에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것이, 이 책의 멘토들과 닮은 점이라고 나 혼자 뿌듯하게 웃어본다. 또 나는 책을 읽을때 꼬리물기를 통해 다음 읽을 책을 고르는 편이다. 예를 들면, 교보문고 사장인 김성룡의 서재를 볼 때 제레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읽을 책은 <공감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런식의 꼬리물기 독서법은 이 책에 등장하는 북멘토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갖은 독서습관이다. 이 또한 나를 무척이나 흐뭇하게 한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이들의 서재를 통해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여기저기 중구난방으로 산재해 있는 책들을 분류하는 법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조윤범은 한 때 책을 출판사별로 분류했다고 한다. 그래야 색깔별로, 혹은 디자인 별로 보기 좋게 정리가 되기 때문이라고. 솟대예술가 이안수는 딱히 책을 분류하지 않는다고 한다. 피가 돌듯 순환하는 책등의 제목을 보면서 그대로 또한 하나의 책으로 느낀다고 한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 분류법이냐. 내가 책을 분류하지 못하는 것은 낭만보다는 게으름이것만 그냥 그런대로 낭만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누군가 나에게 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어준다면 '중독'이라고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겠다고 생각했다. 한 권에 책에 매료된 사람이라면  '책'이란 물건에서 평생을 놓여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꼭 드는, 마음을 울리는 단 한 권의 책은 그 다음 책으로,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지며, 그렇게 이어진 책들은 결국 '내'가 되고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만난 멘토들은 모두 어린시절부터 글자에, 책에 매료된 공통의 기억을 갖고 있다. 제법 풍족했던 어린시절을 보냈던 이들은 말 할 것도 없고, 가난으로 책 한권 변변히 살 수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도 모두 한 글자라도, 한 권이라도 더 읽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유년을 보냈다. 그들은 중독된 것이다. 또 다른 세상을 책에서 만난 것이다. 그 세상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 본 사람은 평생 고개를 돌릴 수 없다. 요즘 아이들, 독서교육 열풍이지만 딱히 독서교육 이랄 것이 없다. 아이를 중독시킬 그 한 권의 책을 만나게 해주면 그걸로 평생 그아이는 책에서 놓여날 수 없을테니까 말이다. 

 

  나는 멋지고 폼나는 서재는 갖지 못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고, 충분히 빠져들 수 있는 나만의 서재. 이 책을 읽고나자 나의 공간, 나의 서재가 더더욱 소중해지고 나를 중독시켜준 '책'들이 무척이나 고맙게 생각된다. 나는 평생 중독된 채로 살아갈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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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의 기술 -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즐기며 공부하기
가토 히데토시 지음, 한혜정 옮김 / 문예출판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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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늦게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한지 꽤 오래 되었음에도, 무엇인가 배우고자 하는 욕망이 아직 사그러들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막상 공부를 시작하자 오래전 공부할 시기에, 좋아서 혹은 스스로 원해서 공부했던 적이 없었음을 깨닫았다. 학교는 으례 가는 곳이려니, 공부는 하라니까 하는 것이거니,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사람노릇하며 살 수 없다고 하니 그런것이려니, 혹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부모가 속상해 하니 해야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나는 공부에 관한 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생각은 지금 막상 하고싶은 시기에, 하고 싶은 공부를 시작하자 더 강렬해졌다. 그래서 지금 뒤늦게 시작한 '공부'가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다.
  생각해보면, 내가 학교에 다닐 시절에는 누구나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는 지지리도 가난해 학교에 다니기 위한 최소한의 돈도 마련할 수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시절이 변했고, 요즘에는 자신이 스스로 원해 학교를 그만두고 홈스쿨링을 하는 아이도 있고, 정규 학교교육 대신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많다. 물론 체제에 종속시키지 않겠다는 부모의 의지를 따르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중학교를 졸업할 나이쯤 되고 보면, 아이 스스로 학교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자신이 주체적으로 홈스쿨링에 매진하는 아이들도 많다. 그들을 볼 때면 대견하다는 생각이 앞서고, 누군가 틀을 정해주지 않아도,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그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막상 내 아이가 상급학교에 진학해야 할 나이에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자신의 의사를 강하게 표한다면, 부모인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학교에서 시키는대로 하는 모범생이 되길 바라지 않아 아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가르치려 노력하고 있지만, 그래도 정규교육을 거부해서는 체제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은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아이가 평생을 종속되어 살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궤도를 이탈한 별로 방황하기를 바라지도 않기 때문에 그 불안함이 작지는 않다. 아이에게 스스로 만족할 만한 점수면 엄마도 족한다고 말하곤 하지만, 내면 깊숙히 들어앉은 타율 중심의 기준점을 어떻게 떨쳐 버릴지가 부모된 자로서 늘 하는 고민이다.

  이 책을 쓴 가토 히데요시는 '학교 교육'을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학교교육이란 본시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이므로 주체적인 공부를 교육하는 곳은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공부란 모름지기 스스로 배우고 깨닫아 가는 과정인데 학교는 대체로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시험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으로 전락한지 오래이다. 책의 내용이 70년대의 일본 교육을 바탕으로 쓰여졌으나, 지금의 우리 나라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학교에서 질문하는 아이는 예나 지금이나,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골치거리 일 뿐이다. 왜냐하면 주어진 문제가 아니면 해결할 줄도, 해결할 수도 없는 수동적 인간형을 지향하는 것이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이기 때문이다.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은 체제에 순응하는 지식인, 기술자를 양성하는 것으로 그 목적을 다한다.

  최근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들이 모인다는 카이스트의 자살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한쪽에서는 외국의 유명대학의 자살률도 만만치 않은데 굳이 카이스트만 문제삼는 이유가 뭐냐며 핏대를 올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자식을 둔 부모라면 무엇인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피부로 직감할 수 있다. 먼저 인간이 되는 교육을 받았더라도, 지치고 힘들때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도움이 되어주고, 될 수 있는가를 배웠더라도 그렇게 쉽게 스스로 목숨을 끓을 수 있었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정해준 틀 외에 내가 스스로 정한 틀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더라면 그것만으로도 살 이유는 충분하지 않았을까.

  이 책은 평생 공부해야 할 이유와 공부를 통해 발전하는 자신을 발견하자는 자기계발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모와 교사가 반드시 읽어야 할 훌륭한 자녀 교육서이며, 교사의 지침서이기도 하다. 지식만을 전달하고 전수받는 요즘 교육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행복한 한사람을 키워내기 힘들기 때문에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씌여진 시기가 1974년 이라는데에 깜짝 놀랐다. 무려 36년이나 지난 지금,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복간될 만큼의 새로운 내용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평생 공부', '주체적인 공부'는 '공부'라는 작업의 정석이며 상식일진데, 그 상식은 늘 무시되어 왔고, 지금 현재도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또한번 크게 놀라며 이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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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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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의 <언어의 감옥에서>를 읽고 프레모 레비를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아우슈비츠로 부터의 증언 문학(이것을 문학이라고 표현해도 좋다면)으로 빅터 프랭클린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잘 알려져 있다. 나 역시 읽지는 않았으나 빅터 프랭클린 박사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그러나 프레모 레비에 관해서라면 서경식의 책을 통해서가 처음이다. 그리고 <언어의 감옥에서>를 읽은 후부터 바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점점 젊은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의무로, 동시에 위기로 본다.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위기, 귀 기울여지지 않을 위기.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넘어서 혹은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는 어떤 근본적인 뜻밖의 사건을 집단적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 과거에 이런일이 벌어졌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레비는 자살하고 말았던 것일까. 사망률이 90-~98퍼센트인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한 40년간의 증언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레비는 '인간'이라는 종에서 희망을 잃어버렸기에 자살했을지도 모르겠다. 수용소에서는 모두가 인간이 아니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한시도 쉴 수 없었으며, 점점 인간다운 품위를 잃어가던 수감자도 한 인간을 짐승의 단계로 까지 끌어내린 감시자도. 그리고 소용소의 존재를 묵인했던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과, 그의 증언에 귀기울일 줄 몰랐던 직접 수용소를 경험하지 않은 후대의 우리들까지도 레비에게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의문을 품게 했을지 모르겠다.  

 

레비는 이 책을 희생자의 한탄이나 복수심 때문에 쓴 것이 아니라 했다. 무엇보다 있었던 사실을 증언하고자 했다. 사심에 눈이 가려 제대로된 증언을 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것은 용서와는 다른 것으로 그는 비극의 역사가 제대로 심판되어지길 원했기 때문이다. 레비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과 웅변술로 사람들을 현혹했던 히틀러에게만 책임을 돌려서는 안된다고 쓰고 있다. 그보다는 비인간적인 명령을 수행한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런 문제없이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은 도처에 있고, 무의식적인 행위 속에서 권력에 맹종하게 될 때 나 자신도 어쩌면 그런 종류에 인간일 수 있다라고 경종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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