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지음,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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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이사야 벌린이 죽었을 때 우리나라 신문에도 부고 기사가 났을만큼 이사야 벌린은 위대한 자유주의 사상가이며 철학자, 정치이론가이자 전기작가라고 한다. 나는 이사야 벌린의 저작으로 톨스토이를 분석한 독특한 책 <고슴도치와 여우>를 몇년 전 읽었다. <고슴도치와 여우>는 철학, 역사, 사상, 그리고 경제학의 핵심을 아우르는 고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책이라는데, 나에게만은 어렵고 지루한 재미없는 책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를 선택한 것은 이사야 벌린이 위대한 사상가이며 전기작가라고 일컫어지는데는 이유가 있을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몇년간의 시간차로 이사야 벌린의 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만큼 내 지적수준이 자라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여러번 읽기를 도전했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했던 마르크스의 생애를 다룬 책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요즈음 나는 전기 읽기에 크게 재미를 붙이고 있는데, 한 사람의 삶을 이루는 것은 개인적인 경험, 관계, 일상, 이런것들이지만 그것들은 결국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거대한 이슈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속성들로, 누군가의 생애를 읽는 것은 그 시대를 읽는 것과 같다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을 읽는 것은 귀족과 평민으로 구분되던 봉건사회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로 이어지던 19세기 유럽사회와 그에따른 사상의 변화를 읽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사야 벌린이 서른살이 채 되기전에 쓴 첫 전기라고 하는데, 이 책이 처음 발간된 후 56년간 총 4차례의 개정을 거쳤다. 초판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불과 몇 달전에 출판되었는데, 40년 후 이사야 벌린은 개정판의 서문에서 다시 마르크스의 생애에 대한 글을 쓴다면, 상당히 다른 책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벌린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의 핵심 개념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어떤 방향으로든 변했다는 의미였다.

부제에서도 의미하듯이 마르크스의 개인적 생애보다는 <공산단 선언>과 <자본론>이 저술되던 시대적 상황과 사상 위주로 저술되었다.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라고는 하지만 정치적인 것이 바로 개인적인 것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면에서 나는 좀 더 사적인 마르크스 생애에 관해 읽고 싶었다. 그러한 바램으로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마르크스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헤겔로까지 이어지는 사상의 확장이 버거웠으며, 때문에 자주 되돌려 읽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했다.

고대 세계는 중세로, 노예제는 봉건제로, 봉건제는 산업 부르주아지로 길을 내주었으며, 이러한 이행에는 반드시 투쟁과 혁명이 동반되었다는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은 마르크스 개인의 독창적인 이론은 아니었다. 그 이전에 기술 혁신의 거대한 가능성을 믿었고, 정의와 공정한 박애주의 정신이라는 인간 고유의 심성을 믿었던 생시몽이 있었으며, 계속적인 생산을 위한 경쟁과 비인간화를 막기 해 국가의 개입을 주장했던 푸리에가 있었으며, 그들 사상의 토대에는 헤겔이 있었다. 나 개인적으로 바랐던 마르크스의 사사로운 생애에 관한 정보는 부족했지만,전체적인 맥락으로서 사상의 틀을 이해하고, 많은 사상가들을 알 수 있었던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의 개인적 삶에 관한 기술이 전폭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존심이 강하고 비평이나 비난에 지나칠 정도로 예민했으며, 사람에 대해 관대하게 평할줄 모르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그는 몹시 권위적이었으며, 아부하는 사람을 좋아했다라고 까지 평했다. 또한 벌린은 마르크스가 보기 드물게도 어린 시절에 좌절을 겪지도 않고 억압을 받지도 않은 혁명가이지만, 그의 오만과 독선, 공격성, 세상을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바탕에는 마르크스 자신이 유대인 출신이라는 반발감이 작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는 그의 오만과 독선, 관계를 기피하는 특성이 가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가난이 사회적인 불공정함에서 기인된 것이라는 것을 꿰뚫어본 마르크스에게는 세상에 대해 적대적일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밖에도 마르크스는 조직적인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기억력을 높이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그의 사위의 증언), 외국어 실력을 쌓는데 게으르지 않았고, 무엇보다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천재성과 통찰력은 역시 노력에 의한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체제의 전복을 꿈꾸었던 마르크스는 신경과민이었고, 누군가 자신을 반대하는 것을 참지못한 고집불통이었으며, 누구보다도 권위적인 인간이었다고 한다. 역시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과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반증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자본론>을 한 줄도 읽지 않았거나, 오역해서 해석한 <자본론>을 맹목적으로 숭배하거나 증오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벌린의 지적은 오늘날에도 그다지 틀리지 않은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한줄도 읽지 않았거나 또는 오역된 자본론을 맹목적으로 숭배하거나 증오하는 무리들 중의 하나임에는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에 관해 회의적인 한 사람으로써,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오역없이 이해하는 거름으로 이 책을 바탕 삼을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출판사에 대한 불만이 다소 있었는데, 간간히 눈에 띄는 오자는 몰입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또한 개인적으로 번역서의 경우 오자는 그 불신의 폭이 커서 오역의 가능성마저도 생각하게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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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에 관한 검은책
에마뉘엘 피에라 외 지음, 권지현 옮김, 김기태 감수 / 알마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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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는 4월 27일 예정된 레이디가가의 내한 공연이 영상물등급위원회로 부터 청소년 관람 금지 판정을 받았다. 선정적인 노래가사, 파격적인 의상과 퍼포먼스로 사탄숭배자라 불리기도 하는 슈퍼스타 레이디가가의 공연이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19금이라는것에 청소년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를 말하며, 그 부당성을 이야기 하곤 한다. 또한, 어제 치뤄진 총선을 앞두고는 인터넷과 트위터 등 각종 미디어에 관한 검열이 더욱더 심해질 것이라는 보도로 트위터리안과 블로거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2008년에는 국방부에서 지정한 금서 목록이 알려지면서, 해당 출판인들과 저자들이 헌법상 보장된 '언론 출판의 자유 등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검열이란 이렇게 공권력이나 거대권력이 행하는 강제력이라고만 생각했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미처 생각지 못한 '검열'의 폭에 무척이나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든 조치는 권력을 통해서만 행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 혹은 거대한 힘에 의해 강제되었던 검열은 차츰 사회문화 속에 스며들어 각 개인에게 내면화되면서 자동으로 자기 자신을 검열하는 '자기 검열'로 이어진다. 자기검열은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상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가능성부터 제거하기 때문에 더 나쁘다. 완벽한 자유가 보장된 것처럼 보이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자기검열은 더 농밀하다. 책에서는 자기검열을 검열의 최고봉이라고 표현했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국가권력이 국민을 옭아매는 한 방법으로 검열을 행하고 있으며, 국민의 세계관과 인식의 질서를 국가의 이익이란 명목으로 조절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면 완벽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인데, 그런 생각이 오히려 이책을 읽으며 모호해지고 말았다.

폭력적이고, 음란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하는 메시지가 무분별하게 판치게 될 때, 사회의 도덕성과 안녕을 보장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게 된 것인데, 이 책은 메시지의 유통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뿐만아니라 정부가 검열을 통해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목적이 아닌 은밀한 다른 목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바로 이 책을 읽기 전까지의 내 생각이 었지만, 6장 '청소년 보호의 구실 아래'를 읽으면서 오히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자신이 없어졌다. 폭력적이고 음란한 메시지들을 본 청소년들이 그렇지않은 청소년들에 비해 더 폭력적이거나, 더 자주 혹은 더 많이 탈선할 것이라는 상상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않다면, 내 아이가 교육적이지 못한 메시지를 접하길 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근대 사회학의 기초를 설립한 뒤르켐은 일탈 현상을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주장에 대해 반대했는데, 그는 범죄나 자살의 책임이 '모방'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탈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국가권력의 강화와, 그에따른 강제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범죄와 자살은 '모방'에서 비롯된다고 알려져 있다. 뒤르켐과 이 책의 저자들에 의하면, 국가의 논리에 이미 세뇌되어 있는 나는, 인간의 고유한 심성이라는 것 자체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통제될 때에라야 비로서 '인간적'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검열을 통해 무시되고, 뿌리 뽑혀지는 것은 한낱 표현이나 창조의 자유가 아니라 표현되거나 창조되는 것의 의미, 즉 생각의 다양성이 무시되는 것이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된 자유가 무시되는 것이기 때문에 검열을 거부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물론 나는 이에 동조하고, 또 권력에 의한 검열을 거부하는 것이 맞다라고 생각하는 한편으로는 여전히 표현의 완벽한 자유가 두렵기도 하다. 메시지를 수신하는 각 개인의 인간성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여전히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위해하다라고 판단되는 이미지나 메시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자들에게 정말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았다고 믿어도 좋은 것일까. 유해한 메시지가 범법자 주변의 사회적 변수와 더불어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떨쳐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내 아이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기를 원하는 욕심을 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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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자 : 주진우의 정통시사활극
주진우 지음 / 푸른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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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구입하기 전 알라딘에서 '100자평'을 읽었다. '진실을 갈구하는 이들이 있어 세상이 지탱된다. 부끄럽다. 고맙다. 응원한다.' 이런 메세지들이 대다수인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반은 알만하다고 생각했다. 2011년 <나꼼수>에 열광했고 주진우 기자의 팬카페에 가입하고 간간이 올라오는 그의 타임라인을 주시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퇴임후 <오후의 서울 산책>이라는 책을 낸 것을 보고 '개나소나 다 내는 책, 주진우 기자는 책 낼 마음이 없느냐'는 메세지를 날리기도 했다. 디테일과 꼼꼼함의 대가인 기자 주진우에게서는 읽을 것이 많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나꼼수에 관해서는 여전히 촉각을 곤두 세웠지만, 비키니 사건 이후 그들에 대한 내 관심이 약간은 시들해진 것도 사실이다. 역시 그랬어, 나꼼수도 나름의 권력이였던 거야... 권력관계를 끔찍히도 싫어하는 나는, 나꼼수 역시 다르지 않은 권력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는 순간 세상은 역시 그렇고 그런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꼼수에 관한 열정을 약간의 관심 정도로 수위 조절했다.

한때 누구보다 주진우가 책을 내길 기다렸던 나는, 나꼼수에 대한 관심과는 별개로 약간의 망설임과 함께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책이 도착하기 전에 예외적으로 100자평까지 살펴보았다. 뻔한 내용, 나꼼수에서 이미 들은 내용, 시사인에 이미 실린 글일 것이라는 예측을 확인하는 순서였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난 지금, 나는 무척 기분이 나쁘다. 나쁘다 못해 울적해진다. 어디가서 악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못배우거나, 가난하거나, 이 땅에서 쫓겨나거나.

진정성을 가진 이들은 끌려가거나, 고문당하거나, 수모를 당하거나, 비참하게 죽거나.

어째서 진실은 한번도 이긴적이 없는가.

주진우는 이기고 있는가.

간지, 가오, 멋, 명예... 이런 것들이 밥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이런 것들은 힘이 되지 않더라는 것을 오히려 주진우의 활극을 읽으며 뼈져리게 체감한다.

멋져요, 고마워요, 덕분이에요, 응원할께요, 라고 말하며 정작 내 밥그릇 놓칠까봐 전전긍긍하는 삶의 비루함을 온몸으로 체감한다.

가슴이 아프다. 바른것이 옮음이 아니고, 진실이 정의가 아닌 세상에서 꼴통 주진우 기자를 안 것이 가슴이 아프다.

그의 아내가, 그의 아들이,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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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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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19세기말 뉴욕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필사를 하는 바틀비는 고용주의 어떠한 요구에도 한결같이 답한다.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하지 않겠습니다, 또는 하고싶지 않습니다, 가 아닌 '안하는 편을 택하겠다'는 바틀비의 대답은 본인 스스로의 의지를 좀더 강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

자신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고, 시키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라는, 때문에 고용주라 해도 자신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항의가 아니였을까.

바틀비를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사람이라고 믿는 변호사는 '악한'이라는 꼬리표를 달지 않기위해, 바틀비에게 연민의 마음을 품기도 하고, 실제로 바틀비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줄 것을 제안하지만, 바틀비는 변호사의 아량에도 한결같이 대답한다.

"지금은 좀 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울컥 눈물이 솟았다. 어째서 거부하는 거야, 어째서 너는 늘 다른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선택을 하는 거야.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바틀비는 최고로 남을 불편하게 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불편해지는 그런 경우는 바틀비에게는 없는 것 같다.

타인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우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주와 고용자의 관계가 있겠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있을 것이며, 그보다는 단순히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의지에서의 무조건적 수용이 있을 것이다.

바틀비는 이 세가지를 모두 무시 또는 거부하고 있는 것인데, 도대체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결국에 그는 자신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편을 택했고, 다만 우리는 그 사실을 수용할 뿐이다.

 

좀더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틀비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던 것은 그저,

출근길 전철 안의 빽빽한 공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였기 때문이며, 숨이 막힐 정도로 밀착된 중에도 모두들 한결같이 귀에는 이어폰을, 쾡한 시선은 스마트기기에 꽂은채로 어디로 달려가는지 관심이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의지로 자유롭고 싶은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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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의 화원 북멘토 가치동화 3
이병승 지음, 원유미 그림 / 북멘토(도서출판)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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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보여주어야 할 세상의 참 모습은 어디까지일까. 나는 가끔 내가 아이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미리 알려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곤 한다. 세상은 아름답고, 노력하면 할 수 없는 일이 없으며, 너는 무엇이고 될 수 있다고 한참 꿈을 심어주어야 할 나이이니까 말이다. 알면서도 나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아이와 함께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대한문을 찾았다. 아이는 서너시간 동안을 줄을서서 기다렸음에도 불평하지 않았다. 당시의 분위기는 어린아이라도 충분히 서러울만 했으니까.  아이가 4학년이 되었을 때는 '용산참사 1주년' 현장으로 데려가고, 집들이 불탄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아이는 놀란눈을 하고서 불타버린 낮은 건물과, '세상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입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말했다. "높은 빌딩이 새로 생기면 보기가 좋잖아. 그렇지만, 남의 집을 뺏은건 나쁘다."

5학년이 된 아이에게는 만화 <전태일>을 사주었다. 아이는 전태일이 살던 무렵 서울의 모습에 적잖이 놀라는 것 같았다. 그랬던 아이가 차츰 '바보회'에 주위를 기울이고, 노동법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노동자 김진숙의 강연회에 같이 갈것을 약속하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아이에게도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째서 크레인에 올라 그토록 오랫동안 내려올 수 없었는가에 대해 아이와 같이 들어야 한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우의 화원>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기 보다는, 내가 읽고 싶어 고른 책 이였다. 아이에게 세상의 참모습을 어디까지 보여주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나에게 답을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여우의 화원>에서 아이들의 '용역놀이'가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책을 먼저 읽은 것은 아이였다. 아이는 신용카드를 초등학생에게 쥐어주는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전태일'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리고 쌍용 자동차 사장님이나 한진 중공업의 사장님 같은 사장님들이 조금더 노동자를 배려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아이가 들려준 책에 대한 감상은 세세하거나, 내가 바라는 만큼 폭 넓지 않았지만, 그정도만해도 됐다 라고 생각했다. 너무 심각한 아이의 모습은 오히려 곤란하니까.

 

어쩌면 요즘 아이들은 민수아빠 쪽에서 억삼이와 억삼이 아버지를 바라볼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언뜻 생각하기에 민수아빠인 사장님의 생각은 잘못이 아니라고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여우의 화원' 이야기를 통해 사장님의 생각이 잘못이며, 같이 살아가는 방법이 잘 살아가는 방법임을 보여주었다. 동화이기에 쉬운 결말을 유도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작가는 그러지 않았다. 아이들의 노력과 눈물에도, 민수아빠는 흔들리지 않았고, 아빠의 냉정함은 오히려 어린 민수를 훌쩍 자라게 했다.

그러나 어린 민수가 어른이 되었을때 아빠의 냉정함을 그대로 닮을지, 아니면 아빠와는 다른 종류의 카리스마를 보여줄 지는 알수 없는 일이다. 다만, 민수와 억삼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공존'이 일반적 가치인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만 여전할 뿐이다. 그렇게 될 것을 믿기에 나는 아이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세상은 포장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이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스마트폰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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