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통계에 따르면 여성의 고용률이 60%지만, 정작 무직율은 30%를 넘어간다고 한다.
'일자리 없음' 만큼이나 불안한 쉴 수 없음으로부터, 청년 백수들은 자신들이 프롤레타리아트임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 학위를 딴 박사들은 룸펜 생활을 청산하지도 못하고, 아직도 경제적 낭만을 품는다.
우리는 「수정주의 비판」에 관해서 다뤘던, 여러 수정주의 흐름에 대한 견해를 먼저 보고했다. 앞선 기회주의가 가진 오류를 안고, 신자유주의로 편승된 부르주아 담론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를 무마시키고, 오히려 성별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도 자주 지적했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보고가, 이와 같은 임금 생산으로부터 복무해야만 하는 직업군들로 살펴 볼 때도, 치명적일 수 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고 우기는 꼴이 된 현대 소부르주아지들의 논리적 단면을 매우 잘 보여준다는 점도 들 수 있다. 더불어 소부르주아지들의 중립적 태도에 대한 수 많은 비판에도 가세했다.
부르주아지들은 일부 여성 노동자들과도 무관한 ‘성별 갈등’을 꺼내어 시민 사회론의 일부로만 국한시켰다. 탁상공론식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도 다루고자, 허기를 고심하던 시민 사회 운동이 보여준 결과를 장담할 수 있는가. 계급 투쟁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존재를 무시한 권리 장전의 부가물일 뿐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여전히 자신의 사적 소유가 시장 경제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는 안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며, 자본가들의 또 다른 밑거름이 되어, 여전히 소유 재산을 옹호한 결과만 빛내주고 만다.
여성 노동에서 임금 착취를 판가름하기 이전에도, 성별과 세대 갈등을 더욱 부추기거나, 부르주아지들이 심어놓은 끄나풀들은 이전부터 투쟁을 헷갈리게 만들거나, 어렵게 조장해왔다. 특히나 사회주의 운동을 한답시고, 그저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할 어떠한 자본주의적 장치도 없다는 극단적인 의제를 내세운다는 점에서도, 우리에게 노동 현장이란 시민 사회, 연대 운동에만 기댄 호소로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제2인터내셔널 시기의 콜론타이, 체트킨의 영향력 아래에서 아직까지도 부르주아지들도 내거는 경제 성장이라는 동기가 성정치가 되어 그대로 답습할 정도니까.
서로에게 맞장구나 치는 '아리따운' 사람들이여, 소부르주아지들이 펼치는 양비론에 숨어, 똑같은 양시론만큼, 우리의 팔랑귀들이 펼치는 논리적 어리석음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은가. ‘적들에게 평화를 외치는’ 타협주의자들이 어떻게 사회배외주의를 지지해서, 부르주아지들의 반동론을 더욱 지지하는지를 우리는 늙어가는 개들로부터 목도하고 있다. 좌익 수정주의가 우리를 얼마나 감시하려 들고, 더욱 설득시키고자 하는지를. 여러분의 친애하는 동지가 때로는 적이 될 수 있기에, 이 또한 얼마나 모함을 자초하는가!
"계급 없는 사회에서 성별 없는 사회를 꿈꾸는 자들이여, 성별 없는 사회를 빌미로,
계급 투쟁을 삭제하는 자들에게는 또 얼마나 관대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