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집
전경린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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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다산북스 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자기만의 집 이라는 제목이 무슨 뜻일까?
책을 펼치기 전에 무슨 말일지 곰곰히 생각해보았으나
잘 정리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라는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결국 하나의 생각으로 귀결하는 것을 포기하고 책을
펼쳤다. 2007년에 나온 책을 현재의 시각에 맞게 고친 개정판인 2025년의 [자기만의 집]은 제목마저 바뀌었단다. 원래의 제목은 [엄마의 집]이었다고.

결국 ‘엄마’가 ‘자기만’으로 바뀐 것인데...
책을 펼쳐보니,
30십대에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을 지칭하는
‘386세대’ 의 부모와, 저임금 노동착취에 시달렸어야 하는 ‘88만원 세대’의 딸 의 이야기였다.

부모는 5.18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고
아빠는 20대에 가졌던 물질만능주위로 혐훼되어버린
사회를 극혐하고 비난하며 그 시스템에 맞춰 움직이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가장’으로서 가족 구성원들이 기대하는 안정적인 경제적 수입 등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직장을 여섯번 바꾸고, 모아왔던 돈들을 모두 날려먹는) 그 모습에 엄마는 실망하고 그렇게 둘은 헤어진다.

양육권을 포기한 아빠를 대신해 엄마를 따라 나선
주인공 ‘호은’이는 외가댁에 맡겨져서 가끔 엄마를 만나며 상실감에 젖은 어둡고, 시니컬한 사춘기와 성장기를 보낸다.
그러다 엄마가 하루 15시간씩 일하며 모은 돈으로 구입한 언제될지 모르는 재개발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십수년된 낡은 아파트로 들어가 엄마와 함께 살게 되지만, 새로운 사랑을 찾은 여자의 모습을 엄마에게서 본 호은은 또다른 상실감에 빠지며 적응하지 못하고 대학진학과 동시에 기숙사로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탈출한다.

스물한살 어느날.
말도 없이 학교앞에 초록빛으로 빛나는 눈을 가진 중학생 여자아이 승주를 데리고 나타난 아빠는 엄마에게 데려다줘라 라는 말만 남기도 혼자 떠나버리고 당황스럽지만 방법이 없는 호은은 엄마집으로 향한다.
(초록빛으로 빛나는 눈을 보고 예전부터 아빠 옆에서 있어왔던 한 여자를 떠올린 호은은 그 여자애를 마냥 곱게 바라 볼 수만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을 침범당한(심지어 모르는 여자애까지 하나 더)엄마는 애를 돌려보내기 위해 아빠를 찾아 나서고,
(아이러니 하게도 그 모습은 단란한 가정처럼 보인다.)
아빠 찾기에 실패한 세 여자는 그렇게 한집에서의 삶을 살아간다.

여러가지의 이야기들을 겪으면서
세 여자는 각자 응어리를 풀기도 하고, 함께 밥을 먹고 청소를 하고 나름의 시간들을 보내며 의도치 않는 성장들을 해나간다.

부모로서의 ‘엄마’와 이성간의 사랑에 생기를 찾는
여자로서의 ‘엄마’ 나의 선택없이 세상에 태어났을 뿐인데 모든 시련은 다 나만 짊어지고 있는 것 같은
두 딸(물론 부모도 다르고 성격, 대응도 다르지만)
이 세 여자의 생각, 말, 표정, 관계가 변해가는 것에서
수많은 의미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작품이 끝난 뒤에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IMF를 겪으면서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가 집을 가진 엄마들의 등장이라고.
그 전에는 가장인 남편의 이름으로 된 집에서 종속되어 살아가는 전업주부 엄마들이 대부분이었다며, 물론 집을 가지게 된 이유가 멋진 것들은 아니다. 미혼모라던가 이혼이라던가...

그래서 2007년의 제목은 [엄마의 집]이었던 것 같다.
이혼하고 딸과 살아가기 위해 마련한 집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2024년 25년이 되면서 1인 가정이 늘어나고 하면서 작가가 의도한 ‘엄마의 집’은 조금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게 아닌가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개정판은 ‘자기만의 집’으로 제목마저 바꾼게 아닌가란 생각을 했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지않고 오롯이 자기로 있을 수 있는 그런 곳. 아직 어린 너가 우는 것은 너 때문이 아니라고 무조건 엄마 잘못이라며 사과하며 안아주는 엄마가 있는, 소속감을 안겨주는 따뜻한 나만의 집.
딸에게도 엄마에게도 그렇게 위안이 되고 의미가 깊은 ‘자기만의 집’인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마냥 편하게 엮을수만은 없는
세 여자의 연대와 각자의 사랑과 삶이란 결국 모순되게도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임을, 무릎을 탁 치게되는 주옥같은 문장으로 잘 풀어두었다.

책을 읽으면서 문장에 표시를 그렇게 많이 하는 편은 아닌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제법 많은 문장에 표시를 해두었다. 문득 이 책을 꺼내 표시된 문장을 찾아 읽는 것 만으로도 흔들리던 삶이 단단하게 뿌리내릴 것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식뿐만 아니라 부모도, 모두 성장해 나간다는 것과 그 성장의 원동력이 집에서 함께 살 부비며 살아가는 것이라는데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띠지부터 적혀져 있는 “생은 시어빠진 레몬 따위나 줄 뿐이지만, 나는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 것이다”라고 고뇌로 가득찬 삶을 포기하지않고 그 안에서 꿈을 꾸고 목표를 정해 단단하고 맑아지는 주인공 호은이 참으로 멋져보였다.
실제로도 내 나이 또래일거라 더 공감이 가기도 했고,
안타깝기도했고, 응원하기도 했다.

난 또 레모네이드도 얼마짜리 레모네이드인들 어떠랴 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정말 크고 싱싱한 레몬을 눈앞에서 몇개나 짜서 만들어주는 만원에 육박하는 레모네이드부터, 이게 레모네이드인가? 싶을만큼 달기만 한 공장에서 찍어내는 레몬이 채 1퍼센트도 들어있지않은(나머지는 합성향으로 대신하는) 레모네이드도 있을것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레모네이드가 된들 실패한 것일까?
오히려 누군가에겐 달달한 레몬향만 첨가된 레모네이드가 입맛에 맞을 수도있고, 접근성이 용이해 많은 사람들에게 이용되고 손쉽게 레모네이드를 접할 수 있게 해줄 것인데 이게 잘못된 것일까?

꼭 남들이 보기에 비싸고 좋아보이는 고급 레모네이드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되고 싶은 레모네이드의 모습이어야겠지만

밝은 미래를 꿈꾸며 학업도 아르바이트도 엄마와의 관계에도 최선을 다하는 호은의 인생은 고급 레모네이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길 수 밖에 없지만 결국 호은이 도달한 레모네이드가 달달한 저렴한 그것이라도 나는 기꺼이, 기쁘게 박수치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싶다. 함께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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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야 - 고전 속 퀴어 로맨스
숀 휴잇 지음, 루크 에드워드 홀 그림, 김하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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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문화사에서 책을 지원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서평단에 신청을 할 때는 설마 되겠어? 싶었고
서평단에 당첨되었다는 안내와 책을 받아들었을때는
큰 문제가 되겠어? 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키스를멈추지않을거야 를 다 읽고 책을 덮었
을때는 이전의 내가 문제였다라는 것을 깨달았고 반성했다. 이 책의 목적이 바로 이런 회개일까? 싶었다.

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에 유명한 연예인이 이른바
커밍아웃을 하면서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처럼 낙인찍히고 말과 시선으로 불태워졌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왕성하게 활동을 해 나가고있고
그 덕에 퀴어라는 사랑의 형태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지고 받아들여지고 소위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가치하에 양지화 되었다.
일종의 잔다르크 같은, 가장 험한 곳에 가장 먼저 몸을
던진 열사같은 사람이었지않나 싶다.
물론 자기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용기였을 수도 있지만 그 사랑법으로 인해 같은 처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고 구원받고 사랑받게 되었으니 퀴어애를 하고있던 하고있지 않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나도 동성애, 퀴어라는 말을 처음 듣고 인지한 것은 이 연예인의 커밍아웃이었다. 그래서 낯선 개념과 아름다운 영상으로 보던 아름답고 선망의 대상이던 사랑의 모습과 달라서 많이 당황하고 거북함이 들었던 것이 온전한 사실이다.

이런 무지로 인해서 동성애라는 것이 없다가 최근에 생겨난,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열심히 다니지도 않았던 종교에서 이성을 사랑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순리라고 말하고 있었고(지금 돌이켜 보면 성경이 쓰여진 그 시간대에도 동성간의 사랑이 있었으니 이런 교리들이 쓰여져 있던게 아닐까? 왜 이런 생각은 하지못했을까) 그렇게 알지못했던 새로운 것이 기존에 내가 알던 세상에 적합하지 않는다는 막연한 기시감만으로 동성애를 거부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을 저자인 손 휴잇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알고있는(한번이라도 얼핏 들어봤음직한) 오비디우스, 호메로스, 플루타르코스, 소크라테스 등의 기원전에 이미 현세에서도 진리가 믿어지고 전공으로까지 배우려고 하는 3000년전의 지식인들의 말과 글에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담겨져있는 퀴어글들을 추려서 한권의 책으로 묶었다.

300페이지가 채 되지 못하는 책에 강렬한 색체와 터치감으로 그려놓은 그림들과 함께 수많은 고대의 이야기들을 보다보면 이 책이 동성애에 대한 책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만다. 그냥 고대 로마와 그리스 시대에서 낭만적이고 절절한 로맨스가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다가 인용된 글을 보여주기전에 그 글들에 대한 짧은 해설이 닮긴 소개를 읽을 때만 아 지금 이 사랑이야기의 두 주인공이 동성이구나를 인식하곤 한다
물론 금방 이러한 것은 잊고 사랑이야기를 읽고있지만.

40여개가 넘는 수천년 전의 동성간의 사랑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동성간의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그 글에서 동성의 주인공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되어있어서 별다른 설명따위 당연히 없기 때문이다
그 시대가 문란해서 그랬을까?
물론 고대 로마에 대한 문란함에 대한 인식이 강하게 남아있긴 하지만, 이것도 엘리트라고 불리는 지식인들이 평가하고 남겨놓은 역사서 때문에 가지는 일종의 선입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로 문란했다더라도 굳이 동성간의 사랑을 선택해야 할 이유는 굳이 없지 않을까?
매력적이고 마음통하는 매력적인 이성들은 어디에나 있었을테니 말이다.
작가는 #키스를멈추지않을거야 를 통해서 종교적인 이유와 같은 다양한 이유들을 통해 꾸준하게 역사에서 퀴어가 삭제되어 왔다라는 것을 지적하고있다. 그 삭제의 역사가 수천년을 이어져오고 있다고, 그러니 그 이전부터 보통의 사랑의 방식으로 동성애는 존재하고 있었다고,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이상하다면 그것을 이상하게 느끼는 현재 우리들이며 이상하게 느끼게 만든 사회의 잘못이라 말하는 듯 하다. 실제로 동성간의 사랑을 하고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불결함의 극치라고 여겨지는 에이즈도 결국에는 그들의 선택에 대해 그들이 짊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 겪지않고 겪어본 것 처럼 겪어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섣부르게 판단하고 인식하게 하는 것.
이게 사회화라는 이름의 교육에 문제점이 아닐까싶다
특히나 보수적인 동양의 문화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퀴어를 상징하는 문양이 무지개지않나.
무지개는 두개의 색뿐이 아니고 단순하게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가지 색이나 들어가있어 다양성을 뜻한단다(물론 과학적으로는 그 색들 사이사이에 수많은 색들이 그라데이션 되어있다. 더 다채롭지않은가)
하지만 나는 다채로움에 주목한다기 보다는 그 다양한 모든색이 결국 빛이라는 하나의 모습이라는 것에 주목하고싶더. 눈에 보이지않는 빛이 프리즘을 통과해 각 파장의 에너지에 부합하는 색으로 보이지만. 결국 모두 빛이지 않나.

어떤 형태든. 결국 원류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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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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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지원
책을 덮으니 그제서야 마음에 휘몰아치던 번개폭풍이 진정되는 느낌이다. 끝없이 일렁이는 바다에서의 긴 항해를 끝내고 갓 육지에 발을 내딛었을 때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익숙하지 않은 간지러움이, 이제는 일렁이지 않는 단단한 육지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사히 육지에 발을 내딛었을때 처럼, 무사함에 대한 안도감과 감사함이 올라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실종된(말이 되지않는 문장이긴 하지만 ‘실종한’도 괜찮을 표현일지도 모르는)친구 석이를 찾아나서는 동이(글을 전개하는 나)와 혜란이를 보면서 이번에는 동이에게 다음에는 혜란이에게 나를 투영하면서 보았다.

11년 전 4월16일 아침에 벌어진, 영화내용이었어도 끔찍했을 배의 침몰과 이태원참사를 이 책 세명의 등장인물과 비슷한 거리감으로 겪은 나는 솔직히 석이처럼 희생자들을 너무나 안타까워하지도 않았다.
동이처럼 엄마의 죽음을 겪은 것도 아닌데도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마음이 솔직한 심정이었던 것 같다
솔직히 내 양력생일 아침에 벌어진 일이라 매년 생일이 되면 마음이 좋지않아서 ‘하필’이라는 생각도 해봤다
그리고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않았다는 것에 선장을 욕하고, 출처가 확실하지않은 인터넷 속의 카더라통신으로 음모론에 동조하고 이러더라 저러더라를 주변사람들과 이야기했었다.

마치 소설 속 동이와 혜란이 처럼...
그렇게 느껴져서 그랬는지 나는 실종되기전에 혜란이 결혼식 청첩장을 주러 나온 자리에서 이태원참사에 너무나 마음을 아파하며 울분을 토하는 석이를 차마 나무래지못했다. 현실이었으면 꼭 오늘 같이 좋은날에 그래야하나, 눈치챙겨라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나는 분명.
하지만 그 말을 하지못했다
무슨 차이였을까.

아마 #영혼에빚을져서 를 읽으면서 조금 더 나와 관련있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평소에 살면서 나의 아픔과 타인의 아픔을 비교하지 말라고, 심지어 같은 종류의 아픔이더라도 사람마다 느끼는 아픔의 강도도 다를 수 있다고 그렇게 믿고 행하며 살아왔는데 개인 대 개인을 벗어나는 일에는 한번도 이러한 원칙이나 관념을 가져야겠다는 마음(또는 시도)를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다가왔다. 이런게 나뿐만일까? 그랬으면 다행이다 싶은데 이렇게 책으로 나올 정도면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러고 있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 또 입맛이 썼다.
어떠한 일로 느끼는 고통이나 안타까움, 슬픔과 같은 감정은 그 일의 객관적인 크고 작음이 아니라 얼마나 그 감정을 느끼는 ‘나’와의 거리가 가깝냐 머냐로 결정된다는 것을 다시한번 깨달았다.
단 한명의 죽음이지만 ‘엄마’를 잃은 슬픔이 수백명이지만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참사보다 비교 할 수 없는 만큼 크고 아프게 느껴지는건 어찌보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비슷한 일들임에도 나와의 거리로 인해 발생되는 이 이중성을, 등장인물들이 봉사활동을 하러갔던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벌어졌던 독재로 인한 대학살과 꺼삑섬 압사사건을 이야기하면서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라고 무심코 헛웃음이 들이켜진듯한 투로 말을 뱉는 석이를 통해 또 한번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더 먼 일이 생기면 기존에 거리감이 있던 일은 조금 더 내 쪽으로 들어와 나의 일이 된다.
이 얼마나 간단하게 재단되는 가치인가

하지만 그래도 아무리 나와의 상대적 거리감이 멀어도
누군가에겐 당사자의, 주변의 일 일수도있고 자기일처럼 마음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아무 도움도 되어주지 못해 죄책감마저 들어하는 석이같은 사람들이 있다라는 것도 나는 안다. 아니 막연히 알고만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내가 당연하다 여기는 다른 일처럼 이러한 마음을 가지려 애쓰고 이해하고 잊지않으려 하며,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않도록 주의해야하는 의무가 있다라는 것을 알게(깨닫게)되었다.

이제 그것을 실천으로 옮길 차례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비참한 일들을 통해 내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성숙해져 가는 것.
이게 예소연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영원에 빚을 진다라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오니 그런 의문이 든다.
실종된 것은 석이 일까,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시선과 관심. 애도하는 마음일까.
그렇다면 이 글은 새드엔딩일까. 해피엔딩일까.

#영원에빚을져서 를 읽으면서 오랜만에 본 표현이 있었다. ‘톧아보다’였다. 틈이 있는 곳 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찾다 라는 뜻의 말이다. 책속의 ‘나’인 동이가 스스로를 톧아보았는데 조금만 더 확장하면 나 아닌 너를, 나와 너가 아닌 다른 이들을 톧아볼 수 있게 되는게 바람직한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거창한가 싶지만 톧아보다 라는 표현의 어감이 투박하고 소박한 듯 느껴져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는데
부담을 줄여주었다.

이 글을 서평단모집으로 작성하는 글이지만 서평이라는 거창한 글도 아니고 글의 모든 내용을 담은 것도 아니다. 하고픈 말을 하게하는 묘한 힘이 실린 소설임은
분명하지만 그 모든 것을 글로 풀어낼 재주는 나는 없다. 이 글을 읽고 끌려서 책을 읽어주면 좋겠지만, 대체 무슨 소리야라며 답답함에 울분을 터트리며 이 책을 찾아읽는 것도 나에게는 성공이다.

다른 의미로 (여러의미로)
난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영원에, 빚을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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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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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현대문학
( @hdmhbook ) 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책을 덮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어떻게 읽은뒤의 감상을 써야할까 어떻게 써야
멋진 글처럼 보일까를 생각하느라 멍해있었던 것이
아니라 왠지모를 탈력감 같은 무기력함이었달까.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으로 돌아온 안규철 작가님의
생각을 훔쳐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BTS알엠RM 에게 한창 빠져있던 시절(그의 오롯함과
영어실력, 예술에 대한 사랑, 독서의 일상화에 빠져
그를 따라하고 싶던 시절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가 추천한 책 중 하나가 안규철 작가님의 전작인
[사물의 뒷모습]이었다. 까슬까슬하면서도 따듯한
촉감을 주는 물빠진 시멘트색(이런색이 있나?시멘트가 물이 빠지긴하나?어쨌든)에 단정한 폰트로 ‘사물의
뒷모습, 안규철 지음’이라 적혀있는 그 책을 처음
열었을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책의 80여 페이지 정도를 읽었을 때 나는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간신히 책을 덮었었다.
술술 읽히지만 왠지 시간을 들여서, 뜸을 들일 수록
점점 더 우러나는 차 한잔처럼 글을 음미하고 싶어서. 맞다. 한번에 다 읽어버리가가 아까웠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왼쪽 페이지에는 그림이 하나 그려져있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짧은 글이 하나 적혀있고
마지막엔 화가의 직인처럼 왼쪽 페이지의 그림의 일부분이 작게 그려져있다.
내가 책을 읽을때 떠올랐던 것은 미술관이었다.
최근들어 미술에 관심을 가져보려 부단히 애를 쓰고 있는데 갤러리나 전시회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면
그림 옆에 제목과 그린 시기, 재료만 적혀져있는,
나같은 문외한에게는 다소 불친절한 설명만이
놓여있어 시간이 정해져있는 도슨트를 기다리거나
유료로 큐레이팅시스템을 별도로 구매하고는 했었다.

이 책을 읽고 떠올린 미술관은 그런 설명을 목이빠져라기다려야하는 곳이 아닌, “친절한” 미술관 이었다.
그림옆에 이 그림에는 어떤 재료가 쓰였으며 언제즈음 그렸는가는 물론, 어떤 생각을 담았는지 작가의 그 당시의 생각까지 고스란히 담겨져있어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관람객이 파악 할 수 있게 해두었다.
그럼에도 면대면이 아니고 글형식으로 남겨져 있어 어떻게 받아들일지, 공감할지 말지(?)는 완전 자유로우니 전시회에서 작가가 직접 해주는 도슨트 보다 편안하기까지 하다.(열변을 토하는 작가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공감한다며 느껴진다며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한 미소를 띄고 식은땀을 흘리던 어느때가 생각나는건 기분탓일까)

하나 궁금한게 생겼다.
이 책에는 그림이 먼저일까 글이 먼저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신간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전작과 같은 재질로 짙은 고동색을 띄어서 크라프트지 같아보이는 표지에 정갈한 손글씨같은 필체로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이라 적혀져있는(심지어 현대문학 70주년기념이라 새겨져있는 짙은 초록색 띠지와의 균형마저 예술이다 이게 예술가의 책이다라고 말하는듯)
이책에 수록되어있는 모든 글과 그림에 해당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은 글을 쓰고 글에서 그림을 끄집어 내오는 사람이라고.

이 책을 지은 안규철 작가님은 원래 서울대에서 조각을 전공하셨단다.
조각은 어떤 작품을 새길까가 아닌 어떻게하면 거대한 재료 덩어리안에 담긴 것을 오롯이 잘 꺼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일이라고 들었던 적이있다.
글을 쓰실때도 그런 과정을 거치신게 아닐까. 그날그날 북한산암벽과 붙어있고, 앞으로는 도로랑 붙어있어
안이 보이기 싫어 멋없이 회색벽돌로 쌓아올린, 그러나 이제는 당당히 그곳의 주인인듯 담쟁이가 빽빽히 자리잡고 있는 집에서 예술가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 아닌, 찾아오는 새들과 식물들, 날씨와 같은 것들을 보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스케치북에 기록하고 스케치를 반복하듯 글을 다듬고, 그 글에서 글의 참모습을 끄집어내 그림으로 남기는 그런 과정말이다.

원래 있는 자연에서, 우리 주위에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자연스럽게 있는 것들을 있는그대로 보고 느끼고 고대로 꺼내놓았으니, 자극적이지않고 시골할머니의 된장찌개처럼 타지살이에 지쳐 힘든몸을 이끌고 기차에 몸을 실을때까지 가기싫다라는 생각이 온 몸을 지배하는 한 청년의 마음속까지 적시는 부모의 집밥같은 담백하면서도 든든한. 그래 이맛이야 라고 말하던 광고처럼(비록 조미료였지만) 거창하게 표현할 필요도, 할수도없는 만족감을 느낀게 아닐까.

거기에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에서는 교편을 내려놓고 주로 말을 하는 사람에서 말을 들어주는,
말을 해주지않으면 고독한 독백이나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으로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러한 예술가의,심지어 거장의 일반인과 다를게없는 소시민적인 사회적, 인간적 모습들도 사회에서 최선을 다하고있는(그렇게 믿고싶다)나에게도 적지않은 위안이 되었다.

작가는 맨 뒤에서 뒷모습을 봐주는 사람이 되자라는
한 시인의 말에 깊게 공감한다.
맨뒤에서 뒷사람의 그림자를 보아주자고. 실물은 진짜, 그림자는 가짜가 아니라 그림자마저도 그 사람이라고, 거짓이 아니라고 잊혀지고 알아주지않는 그림자까지도 관심을 가져주고 사랑해주자 한다.
심지어 그림자를 그리면 보통 칠하는 회색은 실제로는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회색이있다고 기존의 제품을
화가가 따라만들 수도 없을만큼 미묘한 차이의 농도로 조절하는 엄청나게 많은 회색들이 있단다.
그런 회색들을, 그런 회색들을 담고 있는 그림자를 어찌 단순히 그림자취급, 가짜취급 할 수 있겠느냐며
어찌생각하면 그림자가 그 사물의 진짜 모습일 수 도있다고.
흑과 백이 아닌 흑에서 백으로 까지의 그 사이에 수많은 채도의 회색들을 모두 관심을 가지고 보아주자고 말한다.

이 글 처음에서 내가 고백했던 무기력감, 또는 탈력감은 투박한듯 하면서도 투박하지않고 오히려 담백한,
글임과 동시에 그림인, 그림을 꺼내어내는 이 글에서
느낀 나의 남루한 말솜씨로는 표현 못 할 만족감이었던가보다.
한 청년의 할머니의 된장찌개요, 오랜만에 집에오는
자식을 위해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한 엄마의 집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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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시간 - 100곡으로 듣는 위안과 매혹의 역사
수전 톰스 지음, 장혜인 옮김 / 더퀘스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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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시간”은 피아노가 지금의 피아노의 형태가 아니던 시절, 피아노의 원류라고 여겨지는 하프시코드 때 부터 지금 피아노 형식의 초기형태인 포르테피아노를 거쳐 지금의 피아노 시대까지,
18세기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부터 현대작곡가를 넘어 21세기 현재 재즈피아노까지.
그리고 또 다시 현대의 클래식으로 이어지는
말그대로 피아노의 역사 300여년을 단 100곡으로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가 엄청 유명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것이 하프시코드를 위해 작곡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글렌굴드가 바흐의 스페셜리스트로
통하는 이유가 최초로 피아노로 골드베르크를 녹음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바흐는 글렌굴드가 최고지~”라며 피아노협주곡을
들어보라고 추천하는 너스레를 떨고다녔으면서.

이런 단편적인 지식의 습득으로 끝났다면
이책도 내가 이전까지 혼자 해보던 잘못된 방향의
시도 중 하나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의 시간”은 다양한(처음들어보는)
작곡가의 곡들을 시대순으로 나열해 준다는것이
내가 기존에 했던 방식과의 차이이자 정답이었다.

QR코드를 찍으면, 수전톰스가 엄선해준 명연주를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어서 수전톰슨이 설명하고있는 곡의 각 악장에 대한 설명을 눈과 귀가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피아노콘체르토같은 긴 곡들이 아니면
눈으로 글을 읽는 속도와 귀로 음악을 듣는 속도가
얼추 맞아떨어진다는게 “피아노의 시간”을 읽는
하나의 즐거움이다 작가가 의도한 즐거움일까)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중구난방으로 습득한
지식들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한계로
인해 왜곡되고, 잊혀진다고.
그러나 지식을 더 오래 더 정확하게 기억 할 수 있는
방법이있단다. 바로 하나의 기준을 잡고 그 커다란
기준안에 하나씩 지식을 나열하여 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지식의 척추라고 하더라)
이 책은 내가 갈망하던 피아노에 대한 지식들을
시대의 흐름이라는 커다란 기준으로 시간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자연스레 피아노의 발전과정도 기억 할 수 있었고
바흐부터 시작해서 그리그 베토벤 쇼팽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등등의 클래식 작곡가들을 거쳐
전공생이 아니면 생각해보지도 못했을 현대작곡가들까지 심지어 클래식만 생각해서 염두해 두지도 못했던
재즈까지 나의 피아노에 대한 지식척추를 굵고,
튼튼하게 만들어 주었다.

물론 300여년의 피아노 역사를 설명하기에는,
100곡은 터무니없이 적다.
수전톰스가 책 속에서 말했 듯, 5000여개 이상을
수록해도 부족하겠지만 그런 책은 존재할수도 없고
아무도 선뜻 열어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문칼럼니스트가 아니라 수십년동안 피아니스트로
활동해 오면서 자기가 연주하기 즐거웠던,
평론가나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던, 코로나로 인해
연주를 하지 못하면서, 다양한 곡들을 되돌아보면서
의미있었던 곡들을 엄선해서 골라낸 100곡을 들으며
배우다보면 작가가 100곡을 엄선한 것이 얼마나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이 담긴 일인지 새삼 깨닫게된다.

(오히려 연주자라는 전공자가 되면
연주해야하는 곡에 관한 작곡가,시대,배경,악보에서
작곡가가 주문하는 내용들에 매몰되어서
피아노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생각 할 기회가 없다라는
말을 듣고 흠칫 많은 생각을 했다
마치 하나의 학문에서 석사 박사과정을 밟아나가는 것
같은 느낌인 것 같아 슬프게도 어렴풋이나마
공감 할 수 있었다)

QR코드로 연주를 듣고, 다 듣고나서야 다음 곡으로
넘어가다보니 생각보다 진도가 더디게 나갔지만
“피아노의 시간”을 읽은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어릴적 아무생각없이 엄마손에 이끌려 처음 열쇠구멍자리 ‘도’를 두르려 소리내고 바이엘 상권을 처음 열던순간보다 더 뜻깊고, 어찌보면 진정으로 내 삶에서
처음으로 피아노와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100곡의 ‘바이엘’을 시작으로,
사이사이에 얼마나 다양한 곡들을 끼워넣을 수 있을지
확실한건 이책을 만나기전에는 막연하고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었던 것이 이제는 어찌 해야할지 길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책을 덮은 이제는
내 인생에서 두번째이자 처음으로 의미있는
‘소나티네’ ‘하농’ ‘체르니’들을 만날 시간이다

그 어떤 척추동물들보다 빽빽한,
피아노에 대한 지식의 척추를 가진
척추동물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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