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리포트 - 인생 제2막을 위한 융 심리상담
대릴 샤프 지음, 정여울 옮김 / CRETA(크레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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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먹을만큼 먹어서 왜 그러는거야?
나이도 먹을만큼 먹어서 이제와서 나는 왜 이러는 걸까?
남들이 봐도 이해할 수 없고, 내가 나를 봐도 이해할 수 없다. 늦게 사춘기라도 온걸까.
우리 부모님도 나 때 이랬을까? 흔들림없이 나를 키워내고 멋지게 살아오신 것 같은데.

예전 어릴적 봤던 다섯살난 못말리는 친구의 엄마가 삼십대 초반의 설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참 충격적이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의 삼십대 초반과 우리 세대의 삼십대 초반은 천지차이이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아직 어른이 덜 된 것일까. 늦게 온 것 같은 사춘기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그럴 때 찾게되는 철학자가 있으니 바로 카를 융이다. 카를 융은 중년이 되어서야 맞이하는 수많은 심리적 흔들림을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아주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이라 말한다.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진정한 자아와 찬란한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 제 2의 사춘기가 아닌 제 2의 성장통이다.

하지만 전문적인 심리서적을 혼자 끝까지 읽어내는 것이 쉽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특히나 융의 심리학이 그러한지 그의 지식이 녹아들어있는 소설형식의 글이 제법 많다. 하지만 어디에서 융을 느껴야 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만을 좇은 책들이 많다. 재미와 전문성 그 적절한 밸런스를 찾기가 힘든 것이다.

그 밸런스가 잡혀진 책이 #서바이벌리포트 (#대릴샤프 지음 #크레타 출판)이다. <서바이벌 리포트>는 C.G.융 연구소 출신인 융 학파 분석가인 대릴샤프가 가상의 상담자 ‘노먼’과 융 분석가 ‘나’를 찾아오며 심리상담을 진행하는 형식으로 내용이 진행된다.

잠자리를 거부하는 아내에게 상처받고, 일에도 지치고, 그런 일들로 인해 우울해하는 ‘노먼’을 상담하면서 ‘나’도 융 분석학을 배울 때 스스로에 대해 함께 상담하던 분석가를 떠올리면서 융 심리학의 전문적인 내용을 병렬형식으로 다루고 있다.

우리는 ‘노먼’에 이입하기도 하고, 욕하기도 하며 ‘나’의 수련생활을 따라가며 페르소나, 아니마, 그림자 등 융의 어려운 이론들을 자연스럽게 익혀나간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노먼을 다시 일으켜세워준 것은 융의 심리학도 한 몫 했지만, 자기 이야기를 마음껏 꺼내도 말을 자르지 않고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안정되고 경력이 쌓이다보면 나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꺼내는 것이 쉽지않다. 배우자는 나름의 고충으로 지쳐있고, 동년배들에게는 배부른 소리일수도있고, 어린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부모나 윗사람에게 말하면 ‘다 그렇다’며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해결책을 알려주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말을 시작하면 아무런 방해없이 계속 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도 일단 처음을 시작하고 계속 써봐야 방향성이 잡히고 더 나은 글로 나아간다.
말도 시작해서 계속 하다보면 생각이 정리되고 무의식에 머물렀던 것들이 말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것들은 내가 미쳐 몰랐던 것일수도 있고, 애써 외면해왔던 것일 수도 있다.

‘노먼’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뒤집어 쓰고있던,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무의식 속 스스로를 자각하고 그 스스로와 제대로, 솔직하게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묵묵히 들어주어 계속 말을 하게 해서, 속에 담긴 말을 뱉어내게 해서 마주하게 하는 것이 아주 주요했다.

물론 아주 작은 질문들로 방향을 잡아주는 정도만 하고 들어주는 것과 융이 제시한 꿈 분석, 그림 그리기, 글쓰기와 같은 적극적 명상과 같은 기법들이 어우러졌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왜 융 심리학이 널리 인용되는지 조금 알 것 같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우리 모두가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에는 힘듦이, 그 힘듦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가 담겨있다. 융의 심리학은 그것들을 넘어 앞으로의 인생에서 어떻게 오롯한 나로 존재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고 버티는 것 이상으로 생기있고 충만하게 스스로를 채워준다.

이 책은 어떻게 버텨낼 수 있었으냐가 아닌, 마주친 난관들을 어떻게 이용해 결국 도달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인생의 항해일지이다. 생존기‘서바이벌 리포트’라는 이름이 붙은.

인생을 항해하는 또 다른 항해사들 손에 쥐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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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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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하거나 흥분하면 자기도 모르게 호흡이 빨라지는 경우가 있다. 자연스럽게 몸 안에 공기가 평소보다 더 많이 차게 될 것이고 배를 빵빵하게 하고 통증을 유발할 것이다. 배출을 해야하지만 온 사방에 사람이 가득한 사회에서 쉽지않다.
유일한 탈출구인 욕조에서 보글보글 거품으로 겨우 내보나며 살던 열여덟의 카오루는 강압적인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반복되는 시간을 보낼 자신이 없어서’ 학교를 나가지 않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가 마을에서 재즈바를 운영하고 있는 유쾌한 작은 할아버지 가네사다에게 여름동안 맡겨진다.

가네사다는 카오루에게 딱히 조언을 하지 않는다. 점심과 저녁을 챙기고 잘 곳을 내어줄 뿐이다.
카오루는 가네사다의 가게 ‘오부브’에서 일하며 그곳에서 가네사다에게 ‘주워진’ 직원 오카다를 만나게 된다.

오카다에게 요리를 배우고 그가 요리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반복해야만 얻을 수 있는 모습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은 없다. 스스로가 무언가를 반복하며 시간을 쌓아갈 자신이.

하지만 이미 카오루는 자신도 모르게 ‘오부브’에서 천천히 변하고 있었다. 긴장으로 굳어있던 몸과 표정은 이완되었고, 손님접대로 성공적이다.

도쿄로 돌아가기전, 마지막으로 간 바다에서 카오루의 발을 적신 파도가 남긴 거품이 부글부글거리며 터지면서도 남아있다. 그와 동시에 사라진다.

그 거품을 보며 카오루는 자문한다.
나도 이 거품처럼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그러면 그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가네사다와 오카다, 카오루는 직접적으로 고민을 이야기하거나 들어주고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손주를 그냥 강아지 돌보는 정도로 생각했고, 오카다는 물어보면 요리를 언제든지 얼마든지 알려주었지만 그 이상 먼저 나서지는 않았다.
가네사다와 오카다도 서로와 함께하는 미래를 당연히 그리지만 넌지시 내비칠뿐이다.

우리도 지나와서 알지만 어른들이 사랑의 충고라고 했단 말들이 그때의 우리에겐 잔소리었다.
괜한 반발심만 생겼더랬다. 물론 나이먹어서 틀린 말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내 다음세대에게도 그 말들을 하게 되지만 말이다.

결국 무언가를 전해주는 방식의 차이이지 않을까.
그냥 말없이 보여주는 것. 도움을 필요로 할때 포기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 그것이 본인도 모르게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불안으로 몸을 채우던 가스를 욕조에서 편편하게 빼내고 그 빈공간을 채우는 것은 또다른 불안이었다.
그렇게 숨쉬는 모든 순간이 불안하고 걱정하고 마음에 안드는 시기. 사춘기. 그 사춘기를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 반대쪽 통로로 보이는 밝은 빛을 카오루는 ‘오부브’에서 발견했다.

러시아어 오부브는 ‘구두’라는 뜻이란다.
그곳에서 카오루는 아직은 자신없는 앞길을 다치지 않고 걸어나갈 수 있도록 구두를 신고 신발끈을 묶는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닐까.

바다에서 부서지는 거품을 보며 자기 안을 채우고 있는 거품도 사라질 것임을 깨달음과 동시에 자신도 그렇게 사라질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고 그 유한한 시간을 쌓아나갈 무언가를 찾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거품 (#마쓰이에마사시 지음 #비채 출판)은 작가의 유일한 청춘소설이라고 한다. 책 속의 주인공은 카오루라는 청춘으로 보이지만, 곁에 있던 오카다도, 유쾌해야했던 이유가 있던 가네사다도 결국 청춘이었다.

무언가를 꿈꾸고 여전히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한 모두가 청춘이다.
이 책을 읽고 느낄 독자들도 연령대가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느낀다면, 힘을 얻었다면 모두가 청춘인 것이다.

청춘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모두를 위하는, 가장 조용하고 묵묵한, 그래서 더욱 편안한 책이었다.
내 안을 채우던 거품이 빠져나가고 상쾌하고 지릿한 바닷바람이 기분좋게 나를 채운다.

남들과 달라도, 나는 왜이럴까 싶어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더 바람직하게 살아갈 사람이라고 나를 채운 그 바람이 속삭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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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램프 - 2025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바누 무슈타크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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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나는 부커상이 SF소설에게 주는 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트램프 (#바누무슈타크 지음 #열림원 출판)를 읽으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없는 먼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쓴 줄 알았다. 하지만 부커상은 영국에서 출판된 그 해 최고의 책에 수여하는 상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음직한, 어딘가에서는 비슷한 일이 일어났(진행중일)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단편이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한 사람의 이야기라기엔 신이 과연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울만큼 부당한 것들에 둘러싸여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런 비통한 일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발생한다고 생각하니 또 뒷맛이 썼다.

20세기 양차대전을 겪으면서 민주주의가 자리잡고 사람들의 권리가 점차 평등해졌다. 노예, 여성들 까지 모두 차별없는 한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지구 반대편에서 굶고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해 죽는 아이들이 있듯이, 여전히 동등한 한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여성들이 존재했다.

바로 종교 근본주의와 가부장제로 탄압받는 ‘어머니’이다. 누군가의 딸로,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엄마로 가족이게 바치는 희생에 대한 존경을 받아야함이 마땅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12편이 담겨있다. 그 안에서 여성은 끊임없이 출산하고 더이상 애기를 낳지 못하게 하는 수술도 수치로 여겨진다. 그리고 출산 후 제대로 된 휴식도 보장받지 못한다. 그런 친구를 가엽게 보는 여성은 한달이 넘도록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해서 몸을 회복시켜줬던 어머니를 잃는다. 세상을 잃고 돌아온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같은 날 죽은 그 친구이다. 자신은 건강해서 괜찮다며 일주일만에 스웨터를 입고 장을 보러 나왔던 친구마저 세상에 없다.

다른 여성은 최후의 믿을 곳이어야하는 친정이 폭력을 행사하는 곳이고, 아들에게 재산이 다 상속되어 먹고 살기가 요원하다. 무슨 오만과 편견 속 시대도 아니고.

여자는 고등학교까지만 다니면 된다고 영특한 첫째딸은 결혼도 전에 이미 또다른 엄마, 또다른 아내 역할을 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글 속의 여성들은 이런 현실 속을 살아가기만 할뿐 평가하지 않는다. 슬퍼할 뿐 어찌하지 않는다. 내가, 나의 어머니가, 어머니의 어머니가, 또 그의 어머니가 겪어오면서 당연한 것으로 세겨진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적응해버린 것이다.

현실을 더 잘 받아들이고 살아가기 위해서 택한 전략이겠지만 이 여성들이 처한 환경은 생태계와 같은 천재지변이 아니다. 누군가 잘못되었다 목소리를 내야 ‘그런가?’라는 의심이 생기고 그 의심이 환경을 변화시키는 트리거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트 램프>는 그 트리거의 역할을 한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이런 믿기 어려운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고 알았을까? 실제 그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자기 나라 여성이 쓴 책이 큰 상을 받았다고 읽어보면 왜 이 책이 그렇게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는지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디에서 발생하고 있는지 이 세상에 있는 나, 너, 우리 모두가 알게되는 것이다.

문제 해결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꽝꽝 얼어있는 곳에 돌을 하나 던지고 또 던지다 보면 표면에 금이 갈 것이고 결국 깨어져 다시 물이 흐를 것이다. 매말라있던 곳을 촉촉하게 적실 것이고 새로운 환경을 싹틔울것이다.

우리의 눈이, 신경이 미쳐 닿지 못하는 곳이 이렇게 꽁꽁 얼어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문지 해결의 첫 단계인 문제가 있음을 항상 인식하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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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몬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장하나 옮김 / 성림원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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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본격적으로 읽기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일본소설이 제법 괜찮다는 사실이다.
소모성이 짙은 단순한 이야기에도 책을 덮을 때 마음에 따스함이 가득해졌고 문학성에 집중한 별게없는 잔잔한 소설도 잔뜩 쌓인 책을 정리하다보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

여전히 일본은 대중교통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다던데,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기에 문학이 그 사람들을 담아낸 것일까.

그런 일본에서 유명한 문학상을 꼽자면 아쿠타가와상이다. 오직 신인작가에게만 주어지는 상으로 앞으로 일본의 문학을 부탁한다는 기대감을 보여주는 상이다.

최근에 아쿠타가와상이 ‘해당작품없음‘으로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아 바로 직전 상을 수상한 작품이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런 상의 이름으로 제정된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라쇼몬‘ ’코‘ 등의 작품으로 유명세를 얻었던, 서른 다섯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픈 역사를 가진 작가다.

그런 작가의 단편 중 12편을 골라 담은 #아쿠타가와류노스케단편선 (#성림원북스 출판)으로 작가를 처음 마주했다.
유일하게 알고있던 작품이었던 ‘라쇼몬’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한 사람에 대해 평가를 내리거나 판단을 내리면 꼭 반대의견을 덫붙이고 있었다. 왜그럴까 생각하며 주욱 읽어가다 그의 유작이라고 할 수 있는 ‘톱니바퀴’와 ‘어느 바보의 일생’을 보면서 순간 멈칫했다.

‘어느 바보의 일생’은 소설이라기보다 작가의 마지막 유서같은 글이었는데 51개의 짤막한 글들로 이루어진 이 글은 작가의 인생, 생의 마지막에 눈 앞에서 펼쳐지는 주마등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내가 멈칫한 이유는 이 글 속에 들어있는 인물들이 앞에 수록된 단편 속에서 등장했던 사람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이 단편들은 나에게 소설로 보이지 않았다.
작가의 진짜 이야기가 담긴 비밀편지로 보였다.

실제로 그는 태어나기 전 딸을 잃어 정신병에 걸린 어머니를 보며 자랐고, 당연히 받아야할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다. 끊임없이 불안했고 행복을 좇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누구나 행복해야 하니까.

그렇게 자라지 못한 아쿠타가와는 빛보다는 어둠에 집중했다. 천국보다는 끝없이 불타는 지옥을 그려냈다.
그렇게 자신 안을 가득채우고 있는 어둠을 토해내도 빈 부분을 빛으로 채우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않았다.

자신도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으나 기쁨보다는 이 아이는 무슨 죄가 있어 자신과 같은 부모를 만났는지라는 자괴감에 빠지고,(배우지 못한 부모의 사랑과 유전적 걱정이 심했다고 한다.)가장을 잃은 가족의 생계까지 챙겨야 하면서 삶에 부담감이 더욱 심해지고 끝없이 어두워 지는 내면에 침잠하여 바깥세상을, 빛을 결국 보지 못하고 수면제를 털어넣었다.

이런 작가의 스토리를 알고나서 책에 수록된 글을 다시 살펴보니 ‘귤’이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수록된 글 중에 유일하게 세상에 존재하는 빛을 바라보았다. 어린 소녀가 감사의 마음으로 던져주는 귤, 달리는 기차에 담겨있는 인생의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에서 그는 잠시나마 자신이 불안해하며 쥐고있던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놓는다. ‘귤’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았겠다라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끝없이 글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 글은 거짓없이 자신이 바라보고 느껴왔던 세상을 담아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숨쉴 수 없었기에.

글을 쓰기위해 삶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글이라도 썼기 때문에 그만큼이라도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글 자체가 삶이었고 작가 그 자체였던 작가.
그래서 신진작가들에게 온 마음을 다한, 거짓없고 꾸밈없는 참된, 자신같은 글을 써달라는 마음을 담아 그의 이름을 딴 상을 쥐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앞으로 걸어가는 길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알려줄 수 있는 가장 밝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아쿠타가와처럼 괴롭지만은 않기를.
내면에만 집중하지 말고 세상 속 아름다운 오색빛깔들을 만끽하기를, 행복하기를 바라며.

그래야 그도 세상의 빛을 하늘에서나마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후배들의 글로 위안받았기를, 속이 빛으로 가득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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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은 아홉 개의 집 - 반지하 원룸부터 신도시 아파트까지
이규빈 지음 / 새움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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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속에 있는 첫 집은 가게에 딸려있는 작은 단칸방이었다. 아버지가 간판업을 하셨는데 가게안에 미닫이문이 달린 방이 한칸 있었고 그 옆에 조그마한 연탄을 피울 수 있는 수도시설이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다섯살 터울인 내 동생이 태어날 때까지 살았다. 그리고 주인세대가 3층에 살고있는 단독주택의 1층으로 이사를 갔다. 방 두개, 화장실 하나, 부엌 하나, 거실까지.
부족함이 없는 집이었다. 집 건물 외벽과 담장사이 공간에 보일러가 나와있었고, 보일러를 눈, 비, 직사광선 따위에서 보호하기 위해 설치해놓은 샤시에 라면, 과자따위를 비상식량이라는 이름으로 몰래 숨겨두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2층 아이가 부모없이 굶고 있으면 그곳에서 라면하나 꺼내 끓여주기도 하고, 이백미터 남짓한 골목에 전화도 필요없이 큰소리로 이름만 부르면 약속이 잡히던 사람냄새 물씬나는 곳이었다. 이 집에서는 고2때까지 살았더랬다.
그 다음엔 낮은 연립주택의 탑층으로 이사갔다. 부모님이 직접 타일과 문을 교체하고, 내방에는 다다미가 깔아 이국적이면서도 편안한 향이 났다. 비록 수험생이라 집에서 잠만 잤지만 ㅎ
그집 다음에 아파트로 이사갔다가 군대를 다녀와 이층주택으로 이사해서 강아지와 고양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다 일을 시작하면서 혼자살기 시작해 계약기간이 끝날 때 마다 이사를 다녔다. 이사 생각만하면 치가 떨릴만큼.

#나를지은아홉개의집 (#이규빈 씀 #새움 출판)을 읽으면서 저자가 내 또래라 그런지 비슷한 형식으로 집을 옮겨가는 모습이 추억여행을 하게하여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집’이란 무엇인지에 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집’이라는 것을 정의하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내가 ‘집’이라고 생각하는 공간들은 위에 나열한 곳까지였다. 혼자 살면서 여섯번 이사를 했지만 그 중에서 ‘집’이라 생각드는 곳은 작년에 이사온 현재 집 뿐이다.

내가 몸을 누이고 밥을 먹고 비바람을 막아준 곳인데 왜 어떤 곳은 집이고 어떤 곳은 집이 아닐까? 이 질문이 책을 읽는 동안 떠나지 않았다.

혼자사는 집이었어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나는 혼자서도 옆에 있는 사람이 서운할 정도로 잘 지내는 타입이라 그것이 주된 요인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내 스스로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시절에 살았던 곳이 나에게 ‘집’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급하지 않은 사이의 공간에서의 시절동안, 나는 정체되어 있었다.
무언가를 준비만 하던 시간, 요즘 뭐해? 라는 질문이 부담스러워 사람도 잘 만나지 않던 시기였다. 그렇게 나는 꿈도 온정도 박탈당한체 스스로를 그곳에 가두었다.
인생에서 가장 오랜시간을 잠을 자고, 잠 못들며 보낸 방 하나, 거실하나의 그 공간들을 사회에서 내가 무언가를 다시 해나가기 시작하면서 벗어나서야 내가 머무는 곳이 또다시 ‘집’이 되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에서 ‘지은’ 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집은 인간이 만들어 낸 공간이지만 그 공간은 엄마의 자궁처럼, 품처럼 비, 바람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보듬어 키워낸다.
그 품 속에서 어떤 시간들을 견뎌냈는지에 따라 나는 다른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말그대로 ’지어지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그 공간들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그 공간들은 나를 보듬어주고 키워준 곳이 아닐까?
스스로 세상을 외면하고 있었으니 나를 보듬어 준 것은 ’집‘뿐이었다.

그냥 힘들었다며 짙은 검은색으로 스스로 그곳들을 덮어버리고 외면했던 것이다. 그 공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지어진‘것이었다.
그렇게 그 공간들도 나의 ‘집’이 되었다.
그렇게 나라는 개인의 역사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개인의 역사를 말할 때 집은 빠질 수 없다.
그 개인의 역사들이 모여 인류의 역사가 되듯, 개인의 집들이 모여 동네가 되고 도시가 되고 국가가 된다.
결국 역사란 내가 속해있던 공간이 지은 ‘나’의, 우리의 모음이다.
지극히 개인적임과 동시에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집’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보잘 것 없지만 아늑한 내집. 얼른 가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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