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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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현대문학
( @hdmhbook ) 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책을 덮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어떻게 읽은뒤의 감상을 써야할까 어떻게 써야
멋진 글처럼 보일까를 생각하느라 멍해있었던 것이
아니라 왠지모를 탈력감 같은 무기력함이었달까.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으로 돌아온 안규철 작가님의
생각을 훔쳐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BTS알엠RM 에게 한창 빠져있던 시절(그의 오롯함과
영어실력, 예술에 대한 사랑, 독서의 일상화에 빠져
그를 따라하고 싶던 시절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가 추천한 책 중 하나가 안규철 작가님의 전작인
[사물의 뒷모습]이었다. 까슬까슬하면서도 따듯한
촉감을 주는 물빠진 시멘트색(이런색이 있나?시멘트가 물이 빠지긴하나?어쨌든)에 단정한 폰트로 ‘사물의
뒷모습, 안규철 지음’이라 적혀있는 그 책을 처음
열었을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책의 80여 페이지 정도를 읽었을 때 나는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간신히 책을 덮었었다.
술술 읽히지만 왠지 시간을 들여서, 뜸을 들일 수록
점점 더 우러나는 차 한잔처럼 글을 음미하고 싶어서. 맞다. 한번에 다 읽어버리가가 아까웠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왼쪽 페이지에는 그림이 하나 그려져있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짧은 글이 하나 적혀있고
마지막엔 화가의 직인처럼 왼쪽 페이지의 그림의 일부분이 작게 그려져있다.
내가 책을 읽을때 떠올랐던 것은 미술관이었다.
최근들어 미술에 관심을 가져보려 부단히 애를 쓰고 있는데 갤러리나 전시회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면
그림 옆에 제목과 그린 시기, 재료만 적혀져있는,
나같은 문외한에게는 다소 불친절한 설명만이
놓여있어 시간이 정해져있는 도슨트를 기다리거나
유료로 큐레이팅시스템을 별도로 구매하고는 했었다.

이 책을 읽고 떠올린 미술관은 그런 설명을 목이빠져라기다려야하는 곳이 아닌, “친절한” 미술관 이었다.
그림옆에 이 그림에는 어떤 재료가 쓰였으며 언제즈음 그렸는가는 물론, 어떤 생각을 담았는지 작가의 그 당시의 생각까지 고스란히 담겨져있어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관람객이 파악 할 수 있게 해두었다.
그럼에도 면대면이 아니고 글형식으로 남겨져 있어 어떻게 받아들일지, 공감할지 말지(?)는 완전 자유로우니 전시회에서 작가가 직접 해주는 도슨트 보다 편안하기까지 하다.(열변을 토하는 작가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공감한다며 느껴진다며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한 미소를 띄고 식은땀을 흘리던 어느때가 생각나는건 기분탓일까)

하나 궁금한게 생겼다.
이 책에는 그림이 먼저일까 글이 먼저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신간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전작과 같은 재질로 짙은 고동색을 띄어서 크라프트지 같아보이는 표지에 정갈한 손글씨같은 필체로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이라 적혀져있는(심지어 현대문학 70주년기념이라 새겨져있는 짙은 초록색 띠지와의 균형마저 예술이다 이게 예술가의 책이다라고 말하는듯)
이책에 수록되어있는 모든 글과 그림에 해당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은 글을 쓰고 글에서 그림을 끄집어 내오는 사람이라고.

이 책을 지은 안규철 작가님은 원래 서울대에서 조각을 전공하셨단다.
조각은 어떤 작품을 새길까가 아닌 어떻게하면 거대한 재료 덩어리안에 담긴 것을 오롯이 잘 꺼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일이라고 들었던 적이있다.
글을 쓰실때도 그런 과정을 거치신게 아닐까. 그날그날 북한산암벽과 붙어있고, 앞으로는 도로랑 붙어있어
안이 보이기 싫어 멋없이 회색벽돌로 쌓아올린, 그러나 이제는 당당히 그곳의 주인인듯 담쟁이가 빽빽히 자리잡고 있는 집에서 예술가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 아닌, 찾아오는 새들과 식물들, 날씨와 같은 것들을 보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스케치북에 기록하고 스케치를 반복하듯 글을 다듬고, 그 글에서 글의 참모습을 끄집어내 그림으로 남기는 그런 과정말이다.

원래 있는 자연에서, 우리 주위에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자연스럽게 있는 것들을 있는그대로 보고 느끼고 고대로 꺼내놓았으니, 자극적이지않고 시골할머니의 된장찌개처럼 타지살이에 지쳐 힘든몸을 이끌고 기차에 몸을 실을때까지 가기싫다라는 생각이 온 몸을 지배하는 한 청년의 마음속까지 적시는 부모의 집밥같은 담백하면서도 든든한. 그래 이맛이야 라고 말하던 광고처럼(비록 조미료였지만) 거창하게 표현할 필요도, 할수도없는 만족감을 느낀게 아닐까.

거기에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에서는 교편을 내려놓고 주로 말을 하는 사람에서 말을 들어주는,
말을 해주지않으면 고독한 독백이나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으로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러한 예술가의,심지어 거장의 일반인과 다를게없는 소시민적인 사회적, 인간적 모습들도 사회에서 최선을 다하고있는(그렇게 믿고싶다)나에게도 적지않은 위안이 되었다.

작가는 맨 뒤에서 뒷모습을 봐주는 사람이 되자라는
한 시인의 말에 깊게 공감한다.
맨뒤에서 뒷사람의 그림자를 보아주자고. 실물은 진짜, 그림자는 가짜가 아니라 그림자마저도 그 사람이라고, 거짓이 아니라고 잊혀지고 알아주지않는 그림자까지도 관심을 가져주고 사랑해주자 한다.
심지어 그림자를 그리면 보통 칠하는 회색은 실제로는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회색이있다고 기존의 제품을
화가가 따라만들 수도 없을만큼 미묘한 차이의 농도로 조절하는 엄청나게 많은 회색들이 있단다.
그런 회색들을, 그런 회색들을 담고 있는 그림자를 어찌 단순히 그림자취급, 가짜취급 할 수 있겠느냐며
어찌생각하면 그림자가 그 사물의 진짜 모습일 수 도있다고.
흑과 백이 아닌 흑에서 백으로 까지의 그 사이에 수많은 채도의 회색들을 모두 관심을 가지고 보아주자고 말한다.

이 글 처음에서 내가 고백했던 무기력감, 또는 탈력감은 투박한듯 하면서도 투박하지않고 오히려 담백한,
글임과 동시에 그림인, 그림을 꺼내어내는 이 글에서
느낀 나의 남루한 말솜씨로는 표현 못 할 만족감이었던가보다.
한 청년의 할머니의 된장찌개요, 오랜만에 집에오는
자식을 위해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한 엄마의 집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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