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유미작가의 소설이 나왔다는 소식에 바로 주문했다.
10,4cm의 가로에 18.2cm 세로. 내 손바닥 하나 올라가는 크기.
흰색 바탕에 이미 죽은 듯한 나무로 밀어 올려 뚜껑을 연 듯한 상자. 그 속에서 탈출을 하려는 것인지, 상자를 열면 죽이려는 것인지, 한 여인이 왼손에 날카로운 금빛 칼을 들고 서 있다. 고양이 두 마리가 상자의 이쪽 벽 중간 즈음과 저쪽 젖혀진 곳에 위에 앉아 있다. 그리고 같은 모양의 작은 상자에 같은 얼굴을 한 여자가 상자의 뚜껑만 연 채 서 있다. 팝업처럼 당장 튀어나올 듯한 이미지다. 책을 읽고 난 후에 더 눈에 들어오는 표지이다.
바로 책을 읽을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샀지만, 서유미 작가 책은 그렇게 빨리 열어젖혀 읽기에는 아까운 책이다. 기대 만땅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두고, 읽을 날을 정하고, 읽을 장소를 정해서 한잔의 커피를 들고 읽어야 제 맛이 난다. 출판사의 소개글 조차 읽지 않고 읽어야 더 재미나다. 그녀의 책은 한 번 잡으면 멈추지 않고 달리기 때문에 이를 대비하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드디어 그 날이 되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커피로 한 모금 누르고 표지를 열어 읽어 내려간다.
그렇게 나는 경주씨를 만났다. 그녀의 이야기는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이야기. 본 듯한 이야기. 내가 아는 이야기였다. 결혼, 임신, 퇴직, 출산, 육아. 반복되고, 계속되는 경주씨의 이야기는 나를 지치게 했다. 서유미 작가를 소환하여 경주씨를 만나게 한 연유를 듣고 싶을 정도였다. 2cm 두께 안에 있는 경주씨를 밖으로 끌어내고 싶은 욕구들이 올라왔다. 그녀가 마트에서 미스 제이니를 만났을 때 한 행동에서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제발~~ 안돼~~그러지 마’라고 외쳤다.
그리고 지금 경주씨는 카페 제이니 유리문에 미스 제이니가 붙혀 놓은 메모지 앞에 서 있다. 나도 그 옆에 서 있다. 며칠째.
책을 읽고 바로 리뷰를 멋지게 써서 올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경주씨와 함께 멈추어버렸다. 나는 경주씨를 카페 제이니 앞에서 만났고 그녀와 같이 나도 무어라고 적어야 할지 모른 채 서 있었다. 경주씨는 나였다. 지나온 나. 내가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이야기, 본 듯 한 이야기, 아는 이야기였던 것은 바로 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깜깜한 터널 속에 갇힌 듯 헤매던 시간을 다시 기억하는 게 힘들었다. 경주씨가 답답하게 느껴지고 꺼내주고 싶은 생각이 든 것도 그 고립에 그냥 둘 수 없어서였다. 바로 나를 말이다.
경주씨가 나였음이 발견되자 그제서야 눈물이 났다. 책을 읽고 3일 후 책 때문에 울다니. 터널 속의 그때를 다시 곱씹었다, 정리 안 된 그 때의 삶이 이 책을 통해 정리가 되었다. 카페 제이니 앞에 있는 경주씨에게 한 마디 말을 건다. “같이 해요” 이 말을 던지고 나서야 리뷰를 쓸 힘이 생겼다.
며칠 사이 경주씨는 사방에 서 있었다. 길에서도 경주씨가 보이고 뉴스에서도 경주씨가 보였다. 그 터널의 삶은 작고 여린 것에게 폭행을 할 수도 있고, 자아 상실감과 관계의 문제, 생활의 문제 등등으로 모든 것이 다 얽혀 정신까지도 얽혀버릴 수도 있다. 어쩜 우리 사회는 경주씨를 잃어버린 것이다. 흔한 이야기니까 통과의례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한다. 그러나 터널을 통과하지 못하는 경주씨가 많다. 우리 경주씨는 스스로 탈출구를 찾은 것 같아 다행이다. 지나갈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은 경주씨를 안아주고 싶다. 잘했다고, 이제 터널 끝이라고. 잘 될 거라고.
나의 탈출구는 독서였다. 혼자 하는 독서의 위험을 느끼고 독서동아리를 찾았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독서동아리운동을 하는 것 같다. 재작년에는 자원봉사 공모사업으로 “3040엄마들의 안녕하세요” 라는 프로그램으로 10여명의 엄마들과 1년 정도 활동도 했다. 그 중의 몇몇은 나름의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내가 왜 그런 관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일하는지 이 책을 통해 알았다. 그 터널을 통과한 힘 때문이라는 것을. 이 책의 주인공 경주씨처럼 터널을 잘 통과하는 경주씨들이 되길 바란다. “경주씨 같이 해요”
사실, 잃어버린 나를 찾는 탈출구의 초입에 같이 해 준 사람이 있다. 바로 서유미 작가다. 그녀의 글수업은 내 안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있음을 알게 했고 정리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그것이 서유미작가를 찾게 되는 이유인 것 같다. 이번 책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서도 다시 나를 찾게 했다. 나의 이전 좌표와 조금 옮겨진 지금의 좌표를 확인한다. 지나온 세월에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다시 점검한다. 13,000원 10% 할인된 11,700원으로 말이다. 이 적은 돈으로 나에게 엄청난 선물을 준 서유미 작가와 현대문학출판에 감사드린다.
추신: 내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책에 첨부된 박혜진 평론가의 작품해설을 읽었다. 정말 놀라운 평론이었다. 예리하게 짚어 주는 글 속에서 다시 한 번 경주씨에 대한 나의 마음을 정리하며 리뷰에서 평론가가 말한 ‘좌표’라는 표현을 나도 따라 적어본다.
책장 속 2cm를 확보하여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밀어 넣는다. 그리고 톡톡, 고맙습니다 인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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