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부메의 여름 1 - 시안 코믹스
쿄고쿠 나츠히코 원작, 시미즈 아키 그림, 강동욱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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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재미와는 별개로 선뜻 추천하기 까다로운 작품이 있는데 교고쿠 나츠히코의 '교고쿠도' 시리즈가 그에 해당할 것이다. 그의 데뷔작인 <우부메의 여름>은 600페이지가 넘는데 이게 시리즈에서 가장 분량이 짧음에도 진입 장벽은 낮지 않다는 게 놀라운 일이다. 분량도 분량이지만 특유의 장광설과 난해함이 그 시리즈의 매력이자 고질적인 단점이기도 할 텐데 이러한 부분이 너무 겁이 난다면 이 만화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래도 원작이 소설이라면 가급적 소설 먼저 읽어보라고 말을 하는 편이지만... 나도 <우부메의 여름>을 펼치기 전에 거부감이 만만치 않았던 지라 - 여담이지만 아는 형이 생일 선물로 주신 책이다. 선물로 받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걸렸을지... - 만약 만화가 있었다면 아무래도 이쪽에 먼저 손이 갔을 것 같다. 소설과 만화 둘 다 읽어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내용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만화가 원작을 잘 재현했고 장벽은 당연히 만화 쪽이 훨씬 낮다. 시각적인 재미는 물론이고 원작에서 느낄 수 있었던 장광설의 묘미도 알기 쉽게 잘 살린 편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만화로 다시 읽으니까 원작의 문제점이랄까, 약점이랄 만한 게 눈에 띄기도 했는데;; 일단 우울증 환자 세키구치가 화자가 됨으로써 원작이 300p이면 끝날 걸 600p로 늘어낳듯 만화도 2권이면 끝날 내용이 4권으로 늘어난 격이었는데 이게 다시 읽으니까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뭐 이렇게 암시에 잘 걸리는지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어 세키구치는 어떤 의미에선 화자로는 실로 부적절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군다나 에노키즈도 탐정이면서 사건 해결은 몰라라 - 다른 건 몰라도 신고도 안 하는 건 좀... - 하는 것도 지금 다시 보니까 너무 의도적인 연출이었다고 생각된다. 너무 의도적으로 후반부에 기대감을 줘서 경우에 따라선 사건의 내막에 실망한 사람도 적잖았을 듯하다.

 소설을 읽고 만화로 보니까 더 그렇게 느끼는 걸까, 거의 1/3 가량을 교고쿠도의 추리로 펼쳐지는 전개가 소설로 볼 땐 별 느낌 없었는데 만화로 보니까 너무 쉴 틈 없이 몰아쳐 되려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애당초 사건의 진상이 아주 논리적이라 볼 수는 없으므로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건 힘들다 하더라도 몇몇 부분, 이를테면 몇몇 인물이나 저주가 갑자기 등장하는 등 복선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약간 디테일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사건의 내막이 어떻게 보면 논리적이라기 보단 최대한 말이 되게끔 억지로 갖다 붙인 느낌이 든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요번에 그 부분이 강하게 의식됐는데 여러 우연의 일치가 작위적이긴 해도 전부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서 시리즈의 매력은 잘 살렸다고 본다. 이른바 신개념 고품격 괴담이랄까. 괴담이라는 표현을 작중 교고쿠도는 질색할 것 같지만 제아무리 인간의 손에 의해 벌어질 만해서 벌어진 일이라지만 괴이하다는 말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이 영화로도 나왔다는데 영화는 어떻게 나왔으려나. 캐스팅이 어마어마하던데, 궁금하다.

 다른 게 아니라,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 그림체도 만만찮게 충격적이었다. -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었을 주제의식은 잘 살려서 그게 무엇보다도 다행이었다. 찾아보니까 이 만화를 그린 시미즈 아키란 작가가 아예 교고쿠 나츠히코의 작품 만화화를 전담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여러 작품을 그렸더라. 어쩐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더니... 왜 데뷔작을 이렇게 늦게 만화화했는지 모르겠지만;; 시리즈의 대표작인 <망량의 상자>부터 만화화된 작품이 많아 그 작품들도 보고 싶어졌다. 물론 소설을 먼저 읽은 다음에 만화로 볼 텐데 그렇게 되면 실제로 만화로도 읽기까진 꽤 시간이 걸릴 듯하다.



 https://blog.naver.com/jimesking/220491874682

 이건 원작 <우부메의 여름>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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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눈 3
미치오 슈스케 글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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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은 한때 국내에 많이 출간됐는데 요즘은 그의 이름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그 작가가 신선하지만 드문드문 무리수가 있는 작품을 종종 썼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초창기에 발표한 작품들을 읽었을 때 그런 경향이 있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내용이 가물가물하지만 본격미스터리대상을 받았다는 <섀도우>에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 작가, 거품이네 했을 정도로.

 <등의 눈>은 미치오 슈스케의 데뷔작으로 왠지 모르겠지만 아직 우리나라에 정발되지 않았다. 더 의문인 건 만화로는 출간됐다는 점인데,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하고 호러서스펜스 대상 특별상을 수상했다고 해 궁금하던 참에 잘된 일이다. 만화를 보면서 그림체가 그닥이라고 생각해보긴 오랜만이었지만 그래도 코이케 노쿠토 작가의 나름 개성적인 그림체는 작품이 지향하고 있는 공포소설의 느낌을 잘 연출하고 있어 짧은 분량 동안에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작품을 읽으면 교고쿠 나츠히코의 데뷔작 <우부메의 여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 어느 뭐로 보나 <등의 눈>이 한 수 아래였다고 본다. 소설가 미치오와 심령현상 탐구가인 마키비의 조합이 '교고쿠도' 시리즈의 주요 인물과 판박이였고 불가사의한 현상을 대하는 자세도 엇비슷한데 그래봤자 잘 따라한 아류라는 생각밖엔 안 들었다. 이는 소설이 아닌 만화로 접했기에 나온 감상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드문드문 독자적인 시점에서 전개되던 주인공네 주변 인물들의 비중이나 중요도도 애매했고 범인의 정체는 놀라웠지만 후반부의 전개가 너무 급작스러워 아쉬웠고 작품의 제목인 '등의 눈'의 정체도 거의 맥거핀 수준이었던 터라 허무함이 들었다. 되데 독특하고 섬뜩한 설정이라 내심 궁금했었는데 그저 인과관계를 착각한 것으로 넘긴다는 게 약간 성의없다고까지 생각됐다. 이 작품도 미치오 슈스케 데뷔 초창기 때 느낌이 적잖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데뷔작이라 그런지 무리수 혹은 과욕이 느껴졌다. 이게 그래도 언뜻 곱씹어보면 아주 허무맹랑하진 않아서... 그래, 복선도 그만하면 교묘하고 충분했으니까 추리물의 도리는 지켰다고 봐야겠지.


 심령 현상에 대한 통찰은 '교고쿠도' 시리즈에 못 미치고, 작품 내적으로 그렇게 두 번 돌아볼 부분도 딱히 없어 따로 덧붙일 말은 없다. 소설로 읽으면 어떨지 궁금하긴 하지만 출간이 돼야 읽든가 말든가 하지... 요즘 국내에서의 미치오 슈스케의 인지도를 생각하면 가능성은 적지만 나중에 정발이 된다면 읽어보지 않을까 싶다. 물론 터무니없는 가격이 책정되면 고민 좀 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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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지는 중입니다
안송이 지음 / 문학테라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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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제목만 보면 페미니즘 도서인 것 같은데 의외로(?) 저자의 스웨덴 적응기를 그린 내용이었다. 한국에서 스웨덴어를 전공하고 지금까지 20년 넘게 스웨덴에서 살고 있는 작가의 짤막한 일기를 엮은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스웨덴이란 나름 신선한 배경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보통의 책이라면 스웨덴이라는 특이점을 큼지막하게 어필하겠지만 이 책에선 배경이 스웨덴일 뿐 결국엔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려는 작가의 뜻에 맞게 겉보기엔 심심해 보이는 제목과 표지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요즘 같이 소설이건 에세이건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는 시대에 참 보기 드문 책이었다.

 간간이 스웨덴과 한국의 문화 차이에 대해 쓴 글도 있긴 하지만 만약 이 책을 스웨덴 문화를 알고 싶어서 펼쳤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 나 같은 독자를 말하는 거다. 저자가 느꼈을 컬쳐쇼크나 스웨덴 문화 길라잡이 같은 걸 기대했던 나는 심심하게 전개되는 글에 약간 당황했고 개인적으로 이런 글을 그닥 좋아하지 않아 살짝 후회도 했지만 저자가 워낙에 진정성 있게 글을 써서 그런대로 몰입하며 읽을 만했다. 단, 출판 목적으로 집필되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 사이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간극이 있는데 이 책은 그야말로 후자에 가까웠던 지라 확실히 글의 밀도가 좀 낮은 편이긴 했다. 글의 방향성을 탓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심심하게 읽히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과시하듯, 또는 무언가를 어필하려고 안달이 난 글과는 거리가 있어 그에 걸맞게 편하게 읽힌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저자의 딸 선물이가 자폐아 판정을 받고 남편과 이혼하고 직장 사람들과 교류를 나누는 등의 내용이, 저자로선 민감할 수 있는 내용이 과장되지 않게 편안하게 스며들었다. 근래 겪어본 적 없는 편안하기 이를 데 없는 독서였는데 그래서 인상적이라면 인상적이었다. 누군가 덤덤하게 술술 읽을 수 있을 책을 찾는다면 이 책을 추천할 거 같다. 스웨덴 관련 책으로는 말고. 개인적으로 따로 한 번 더 언급하고 싶을 만큼 인상 깊은 내용은 없었지만 - 저자의 길이 꽃길인 건 아니지만 저자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을 잘 정리하고 용기를 내고 있어서 끼어들 틈이 적기 때문인 것 같다.  - 편안한 문체만은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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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칭
꼬마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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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예전에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될 때 꽤 재밌게 봤던 작품인데 단행본으로 나온 줄은 최근에야 알았다. 같은 작가의 <PTSD>를 읽었을 때도 느낀 거지만 꼬마비의 작품은 단행본으로 접했을 때 더 구성이 알차다는 느낌이 든다. 동료 작가들의 후기를 수록된 것도 재밌고 이 책의 경우엔 작품의 주인공 노조기의 일기가 별책으로 수록돼 기대 이상으로 작품의 여운을 짙게 만끽할 수 있었다. 작품이 10화 안팎으로 완결이 나는 지라 주인공 노조기나 나카무라 후미히메의 내면을 단편적으로밖에 엿볼 수 있었는데 일기까지 접하니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 잘 스며들었다. 초판 한정으로 수록됐다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꼭 찾아 읽길 바란다.

 작품의 제목대로 이 책은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주인공을 바라보는 형식의 작품이다. 적어도 작중에선 노조기의 내면은 극히 적게 묘사되고 대체로 그의 친구 종원의 시점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종원의 시점에서 봤을 때 노조기는 자기만의 도덕적 틀에 갇혀 융통성도 없고 그래서 때로는 타인에게 기만적이기까지 한 인물로 비춰진다. 나도 그러한 시선에 동의하고 노조기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인정한다. 이는 노조기가 나카무라 후미히메에게 푹 빠졌다는 방증일 텐데 일이 이쯤 되니 나는 사랑이란 감정이 꽤 무섭게 느껴졌다. 흔히 사랑은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지만 경우에 따라선 이해불가한 공포를 낳는 극단적이고 감정적인 현상임을 시사해주는 사례겠다.


 글쎄, 작중 사랑의 형태가 극히 드문 종류의 것이란 걸 확실히 해두고 싶다. <데스노트>로 유명한 오바 츠구미/오바타 타케시 콤비의 또 다른 작품 <바쿠만>에서도 이보단 건전하지만 역시 극단적인 형태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남주와 여주가 10년 가까이 거의 만나지 않다가 서로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 - 모리타카의 만화가 애니메이션화하면 아즈키가 그 작품의 여주를 연기하는 것. - 결혼한다는 건 픽션으로는 아름다울지언정 현실적으로 보면 심히 불안하기 짝이 없는 사랑이다. 픽션 속 트루 러브를 너무 삐딱하게 바라보는 거 아니냐고 누군가 딴지를 걸 듯한데 트루 러브를 너무 강조하는 픽션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건 현실을 등지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싶다.

 물론 <바쿠만>에서도 그렇고 이 작품 <3인칭>도 그렇고 작중 사랑의 형태를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못을 박아두긴 한다. 하지만 <3인칭>이 주제적인 면에서, 그리고 제목에서부터 타인의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는 점을 잘 강조했다고 본다. 사랑을 떠나서,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그래봤자 3인칭의 관찰자 시점에선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개인적이란 것, 그래서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단 것을 말이다.


 노조기가 AV 배우를 AV 배우인지도 모르고 사랑에 빠졌건, 그럼에도 무모하게 도쿄까지 와서 찾아 헤매건 - 자기 기분 나쁘다고 애먼 친구한테 4가지 없게 말한 건 문제지만;; - 그 둘이 결국 만나 단기간이라도 연인 관계였건 간에 노조기를 문제적 인물이라 잣대를 들이대는 게 과연 가당한 일인지 생각해봐야만 한다. 아무래도 별책으로 수록된 노조기의 일기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 - 일단 처음엔 그림이 없고 글만 있어서 당혹스러웠으나 꼬마비 작가가 문체도 좋아 술술 읽혔다. - 아까도 말했듯 노조기의 일기인 만큼 본편에선 미처 와 닿지 못했던 것과 달리 노조기의 내면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진실됨은 물론이고 실제로 AV 배우를 비롯해 사회적으로 유난히 천시당하는 직업군의 사람과 연애를 할 때의 정서적 고충이나 외국에서의 외국인과 살아가는 고충 등을 - 여담이지만 노조기는 돈이 많기도 한 모양이다. 그녀를 찾기 위해 도대체 일본을 몇 번이나... - 현실적으로 잘 그려낸 편이었다.

 본편만 봤을 때는 허무맹랑하다고 여겨졌던 이야기가 일기까지 접하니 정말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일로 다가왔다. 원래도 나쁘지 않게 본 작품인데 이 일기를 기준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이란 개연성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내 설득력을 부여하는 작품인데 <3인칭>이 그에 아주 부합했다. 아직도 노조기의 행보와 그가 일시적으로 맺은 결실이 판타지에 근거했을 뿐이란 건 지울 수 없지만 그럼에도 처음엔 부정적으로 느껴졌던 노조기란 인물의 변화와 성장을 그렸다는 점에서, 그리고 끝까지 단편적인 정보만 남긴 채 퇴장했음에도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한 나카지마 후미히메의 존재감 덕에 이 이야기는 연재할 때보다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런 형태의 트루 러브가 아직도 일각에선 잘해봤자 흥밋거리로 소비되고 말 거란 걸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접한 꼬마비 작가의 작품이 단행본으로 많이 출간됐던데 이 작품을 보니 그 단행본들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작품들도 단행본으로 나오면서 수정되거나 덧붙인 내용이 있다면 꼭 다시 접할 가치가 있을 테니까.

그 일방통행이란 말, 들어도 그 사람한테 듣고 싶어. - 9화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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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성의 사내 필립 K. 딕 걸작선 4
필립 K. 딕 지음, 남명성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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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만약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겼다면 세계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되는 대체 역사 소설의 대명사격인 작품. 이 작품은 단순히 소재만 독특한 게 아니라 대체 역사 소설의 존재 의의에 대해 살펴본다는 점에서 꽤나 남다르게 다가왔다.

 듣기만 해도 흥미로운 설정에 비해 막상 내용은 난해한 편이었는데, 처음엔 내가 독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여겼지만 얘길 들어보니까 원래 필립 K. 딕이 소재는 기가 막히게 뽑지만 문체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은 - 생활고를 위해 글을 빨리 써야 했던 작가라 퇴고를 많이 못했다고 한다. - 작가라고 한다. 글쎄, 난해함과 문체의 부족함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저번에 읽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읽었을 때도 느낀 거지만 이 작품도 한 번은 더 읽을 가치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 작품도 제법 난해했는데...


 추축국이 세계대전에서 승리해 독일과 일본이 세계를 양분한다는 설정을 처음 들었을 땐 정말 어마어마한 디스토피아물이겠거니 하고 예상했다. 굳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추축국이 인류에 끼친 악영향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데 승전까지 했더라면 그보다 더한 생지옥이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작중 묘사되는 세계는 생각보다 암울하지 않다. 패권을 잡은 국가가 다를 뿐 흘러가는 방향은 별반 다르지 않았달까. 이 책이 집필된 시기가 한창 미국과 소련이 냉전을 치를 때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 대치 상황을 독일과 일본이 대신하는 양상으로 대체됐다. 역시 예상한 대로 작중 세계에선 인종 말살 정책과 식민지 파괴는 일상이 됐지만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적응을 했다는 게 충격이면 충격이었다.

 나름대로 적응을 했을 뿐더러 역시 그 안에서 기득권이 있고 그 기득권에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이엔 아우슈비츠행을 피해 골격 자체를 수술한 유대인들도 존재했다. 이와 같이 구체적인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만 바뀐 채 큰 틀에서 보면 세계가 흘러가는 방향은 엇비슷했는데 - 60년대 SF 소설답게 뜬금없이 우주로의 진출 운운하는 건 사뭇 달랐지만. - 그런 와중에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 라는 소설이 존재 자체만으로 등장인물들 사이에 크게 화두에 오른다. 그 소설은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추축국으로부터 승리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대체 역사 소설 속의 대체 역사 소설이라니, 마치 거울 속에 있는 거울을 마주한 - 꼭 <이갈리아의 딸들>의 결말이 연상됐다. - 느낌이었다. 그 소설은 작중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시대 자체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미국이 대공황을 극복하고 세계의 패권을 잡는다는 내용에 매료되고 나치는 물론 일본은 소설 속 내용에 분노하고 수수께끼의 저자를 잡으려고 안달이다. 하지만 그 기득권 안에서도 현재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도 역시 그 소설에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매료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가장 최선의 세상'이라는 스피노자의 말이 있다. 이 말은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한 것 같아도 사람 마음이란 그렇게 자기 생각대로 풀리는 것이 아니다. 대체 역사 소설이 그냥 역사 소설보다 흥미로운 이유는 소설의 내용을 통해 현실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이상을, 혹은 까딱 잘못했다간 마주했을지 모를 재난을 간접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 바뀌지 않는 현실에 때로는 더 큰 실망이나 허탈감을 금치 못할 수도 있다.


 이 소설이 다소 난해하게 읽히는 이유는 대체 역사 소설이 현실에 안기는 박탈감을 읽는 사람 마음에 따라 해석이 갈리게끔 결말을 맺었기 때문이 클 것이다. 사실 나도 아직까지 헷갈리는데, 결국엔 무엇이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서 끝나지 뭔가. 어떻게 보면 등장인물들 중 그 누구의 욕망도 실현되지 못한 채 끝나 허무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이는 다르게 보면 우리가 흔히 대체 역사 소설에 기대하는 바를 철저하게 외면한 작품에 대한 반감의 발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흔히 대체 역사 소설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를 좀 더 긍정하기 위해 읽는 것 같은데 이 소설은 어떤 역사적 변수가 있었든지 간에 지금 현재와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 말해 여러모로 예상을 뛰어넘었다. 60년 전에도 물론이고 지금 봐도 시대를 앞서간 주제의식인데, 참 답도 없는 허무주의긴 해도 대체 역사 소설에 대한 통찰이 정말 허를 찌른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 시대를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이게 정말로 60년 전 통찰이란 말인가.


 최근에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던데 그 드라마도 봐야겠다. 그 드라마도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와 <블레이드 러너>처럼 큰 틀만 같고 별개의 작품이라 해도 무방하다지만 - 아니나 다를까 리들리 스콧이 연출을 했다고 한다. - 그래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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