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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칭
꼬마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평점 :
9.8
예전에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될 때 꽤 재밌게 봤던 작품인데 단행본으로 나온 줄은 최근에야 알았다. 같은 작가의 <PTSD>를 읽었을 때도 느낀 거지만 꼬마비의 작품은 단행본으로 접했을 때 더 구성이 알차다는 느낌이 든다. 동료 작가들의 후기를 수록된 것도 재밌고 이 책의 경우엔 작품의 주인공 노조기의 일기가 별책으로 수록돼 기대 이상으로 작품의 여운을 짙게 만끽할 수 있었다. 작품이 10화 안팎으로 완결이 나는 지라 주인공 노조기나 나카무라 후미히메의 내면을 단편적으로밖에 엿볼 수 있었는데 일기까지 접하니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 잘 스며들었다. 초판 한정으로 수록됐다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꼭 찾아 읽길 바란다.
작품의 제목대로 이 책은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주인공을 바라보는 형식의 작품이다. 적어도 작중에선 노조기의 내면은 극히 적게 묘사되고 대체로 그의 친구 종원의 시점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종원의 시점에서 봤을 때 노조기는 자기만의 도덕적 틀에 갇혀 융통성도 없고 그래서 때로는 타인에게 기만적이기까지 한 인물로 비춰진다. 나도 그러한 시선에 동의하고 노조기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인정한다. 이는 노조기가 나카무라 후미히메에게 푹 빠졌다는 방증일 텐데 일이 이쯤 되니 나는 사랑이란 감정이 꽤 무섭게 느껴졌다. 흔히 사랑은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지만 경우에 따라선 이해불가한 공포를 낳는 극단적이고 감정적인 현상임을 시사해주는 사례겠다.
글쎄, 작중 사랑의 형태가 극히 드문 종류의 것이란 걸 확실히 해두고 싶다. <데스노트>로 유명한 오바 츠구미/오바타 타케시 콤비의 또 다른 작품 <바쿠만>에서도 이보단 건전하지만 역시 극단적인 형태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남주와 여주가 10년 가까이 거의 만나지 않다가 서로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 - 모리타카의 만화가 애니메이션화하면 아즈키가 그 작품의 여주를 연기하는 것. - 결혼한다는 건 픽션으로는 아름다울지언정 현실적으로 보면 심히 불안하기 짝이 없는 사랑이다. 픽션 속 트루 러브를 너무 삐딱하게 바라보는 거 아니냐고 누군가 딴지를 걸 듯한데 트루 러브를 너무 강조하는 픽션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건 현실을 등지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싶다.
물론 <바쿠만>에서도 그렇고 이 작품 <3인칭>도 그렇고 작중 사랑의 형태를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못을 박아두긴 한다. 하지만 <3인칭>이 주제적인 면에서, 그리고 제목에서부터 타인의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는 점을 잘 강조했다고 본다. 사랑을 떠나서,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그래봤자 3인칭의 관찰자 시점에선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개인적이란 것, 그래서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단 것을 말이다.
노조기가 AV 배우를 AV 배우인지도 모르고 사랑에 빠졌건, 그럼에도 무모하게 도쿄까지 와서 찾아 헤매건 - 자기 기분 나쁘다고 애먼 친구한테 4가지 없게 말한 건 문제지만;; - 그 둘이 결국 만나 단기간이라도 연인 관계였건 간에 노조기를 문제적 인물이라 잣대를 들이대는 게 과연 가당한 일인지 생각해봐야만 한다. 아무래도 별책으로 수록된 노조기의 일기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 - 일단 처음엔 그림이 없고 글만 있어서 당혹스러웠으나 꼬마비 작가가 문체도 좋아 술술 읽혔다. - 아까도 말했듯 노조기의 일기인 만큼 본편에선 미처 와 닿지 못했던 것과 달리 노조기의 내면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진실됨은 물론이고 실제로 AV 배우를 비롯해 사회적으로 유난히 천시당하는 직업군의 사람과 연애를 할 때의 정서적 고충이나 외국에서의 외국인과 살아가는 고충 등을 - 여담이지만 노조기는 돈이 많기도 한 모양이다. 그녀를 찾기 위해 도대체 일본을 몇 번이나... - 현실적으로 잘 그려낸 편이었다.
본편만 봤을 때는 허무맹랑하다고 여겨졌던 이야기가 일기까지 접하니 정말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일로 다가왔다. 원래도 나쁘지 않게 본 작품인데 이 일기를 기준으로 더 좋은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이란 개연성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내 설득력을 부여하는 작품인데 <3인칭>이 그에 아주 부합했다. 아직도 노조기의 행보와 그가 일시적으로 맺은 결실이 판타지에 근거했을 뿐이란 건 지울 수 없지만 그럼에도 처음엔 부정적으로 느껴졌던 노조기란 인물의 변화와 성장을 그렸다는 점에서, 그리고 끝까지 단편적인 정보만 남긴 채 퇴장했음에도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한 나카지마 후미히메의 존재감 덕에 이 이야기는 연재할 때보다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런 형태의 트루 러브가 아직도 일각에선 잘해봤자 흥밋거리로 소비되고 말 거란 걸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접한 꼬마비 작가의 작품이 단행본으로 많이 출간됐던데 이 작품을 보니 그 단행본들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작품들도 단행본으로 나오면서 수정되거나 덧붙인 내용이 있다면 꼭 다시 접할 가치가 있을 테니까.
그 일방통행이란 말, 들어도 그 사람한테 듣고 싶어. - 9화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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