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오단장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9.7 






 11년 전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요네자와 호노부의 책이다. 추리소설이라 부르기엔 좀 뭐하지만 일본에서 출간했을 당시 여러 일본 추리소설 랭킹에 이름을 남긴 저력이 있는 작품이다. 일단 내가 딱 잘라서 추리소설이라 부르지 못하겠다는 이유는 결말이 읽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리들 스토리'의 형식을 취하는 작품이기에 적어도 확실한 사건 해결이란 구성을 취하는 것이 공식인 추리소설과는 코드가 다른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저평가 받아야 된다는 건 아니지만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에겐 약간 당혹스런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리들 스토리의 형식을 취하는 점을 제외한다면 나는 이 소설이 제법 훌륭한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두 개 이상 제시되는 사건의 진실 후보들이나 그 진실에 접근하는 근거가 생전에 용의자였던 작가가 썼던 다섯 편의 소설이란 점, 그 소설들이 읽는 이의 성향에 따라 해석이 극과 극으로 나뉠 수도 있는 점 등 자꾸 상상과 추리를 불러일으킨다는 측면에서 여지없이 몰입도 높은 추리소설이라 여겨졌다. 그렇다 보니 추리소설의 결말이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도 스스로에게 던져봤다. 추리소설의 결말이란 작가가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장 결점이 없는 결말이며 그 결말을 위해 처음부터 철저히 디자인되는 것이 추리소설의 특징이다. 독자가 결말을 접했을 때 충격을 받고 일말의 의문이 남지 않도록 버릴 장면 하나 없이 빈틈없이 몰입을 유발하는 동시에 결말을 예측 불가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추리소설의 공식인데 <추상오단장>은 이런 점에서 추리소설에 훌륭히 부합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의 시놉시스를 처음 접했을 땐 독자로서 여러모로 몰입할 구석이 적어 보였다. 고서점에서 일을 거드는 주인공 요시미츠에게 어떤 여성으로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생전에 썼던 소설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니까 단순한 일상 추리소설인 건가 예상하기 십상이다. 자극적인 사건도 없고 이야기의 분위기는 시종 우울하고 실제로 작중의 시간대가 버블 경제 직후라 등장인물들이 그 여파에 찌들었고, 그래서 아버지가 쓴 소설 한 편을 찾으면 10만 엔 - 지금 환율로 약 100만 원이지만, 90년대 초니까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 이란 수상하지만 매력적인 보수의 의뢰를 요시미츠가 받아들이는 당위성이 성립하게 된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추리소설에서 사건을 해결하려는 동기에 돈이 많이 개입한 것만큼 몰입이 잘 안 되는 경우도 없는데, 신기하게도 이 작품에선 그런 반감이 덜했다. 

 요시미츠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일일 줄 알았던 소설 찾기는 여러 지인을 통해 의외로 수월하게 찾아내는데 그 소설들의 내용이 하나같이 기이하다. 요시미츠 입장에선 소설만 찾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지만 소설 분량이 짧기도 하고 나름대로 발품을 팔아 구한 만큼 읽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10만 엔이란 값어치가 있는 소설인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을 테고... 아무튼 그렇게 읽은 소설들의 내용은 외국을 여행 중인 화자가 남편과 아내와 딸로 구성된 어떤 가족에게 벌어지는 모종의 비극적인 사건을 목도하는 공통된 전개를 펼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찾은 소설도 그렇고 그 이후에 찾은 소설들도 화자가 방문한 외국이 어디냐만 다르지 실질적으로 원인이 어떻든 이 가족에게 비극이 닥친다. 특이한 점은 비극이 벌어지기 일보직전에 그 여부를 알 수 있는 문장을 적지 않고 끝내는 리들 스토리란 점인데, 그 점에서 모두 같은 작가의 작품임을 - 다른 필명으로 발표된 작품도 있었다. - 알 수 있었다. 


 의도치 않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뢰인의 아버지가 남긴 소설을 전부 읽은 독자가 된 요시미츠에게 의뢰인은 아버지가 남겼던 소설들의 결말을 알려준다. 생전에 아버지가 소설의 결말만 따로 적어놓았다고 하는데 그 결말들이 특별한 반전도 없고 오히려 없는 게 더 나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냥저냥한 내용인 지라 되려 요시미츠로선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다. 애당초 왜 전부 리들 스토리로 집필했으며 따로 결말을 적어둔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진실이야 아무래도 좋을 미스터리와 남은 소설들의 행방을 쫓느라 요시미츠는 잠시나마 삶의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이 소설을 남긴 의뢰인 아버지의 생애와 그가 실제로 살인사건의 용의자이기도 했단 점을 알게 되면서부터 소설들이 달리 보이게 됐고 몇몇 우연한 기회와 발상의 전환을 통해 숨겨진 다른 하나의 진실의 가능성과 마주하기에 이른다. 

 단기간에 리들 스토리 여러 편을 접하다 보니 소설의 결말을 독자의 해석의 몫으로 남기는 게 참 까다로운 일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추상오단장>은 리들 스토리 특유의 '독자의 해석의 몫으로 남기는 결말의 필요성'에 작가 나름대로 당위성을 부여해본 작품이며 이를 통해 결국 소설에서 결말의 여부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역설해냈다. 소설 내적으로는 읽는 이의 믿음이 진짜 진실따위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 적어도 그 소설들을 쓴 저자 입장에서 말이다. - 보여준 점, 소설 외적으로는 결국엔 다섯 편의 작중 소설말고도 <추상오단장>이란 소설 자체도 리들 스토리였으나 단순히 설정과 결말 처리방식 말고도 몰입감을 자아내는 분위기나 캐릭터들의 진중함 등 자잘자잘한 요소들이 섞여 낯선 소재임에도 충분히 만족하고 덮을 수 있음을 경험케 한 것이 그 근거다. 사실 아마도 진실일지도 모르는 미제 사건의 내막은 10년이 흘러 다시 읽은 지금도 납득이 안 가고 전반적으로 읽는 내내 우울한 작품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독특한 지점들 덕분에 꼭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소설의 인상이 전부 달라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모름지기 소설이란 결말이 가장 중요하고 특히 추리소설이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한데, 그 탓에 심할 때는 반전이나 결말 외엔 크게 남는 게 없는 작품도 있어 만족도가 없다시피 한 경우가 허다했다. 요즘들어 소설일수록 공감의 여지가 많은 인물이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법이고 이 세상 거의 모든 독자가 삶의 결말을 맞이하기 훨씬 전이란 것을 - 직전이라 하더라도 절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생각했을 때 완벽하고 확실한 결말이 때론 몰입도를 떨어뜨리기도 한다고 여겨왔는데, 그런 와중에 오랜만에 다시 읽게 된 <추상오단장>의 내용은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트릭이긴 했지만 그냥저냥한 작중 소설들의 결말을 통해 마무리 못지않게 과정 역시 중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과정이 중요하단 말은 성과 중심의 세상에서 참으로 간과되기 쉬운 말인데, 새로운 다짐을 하기에 매우 적절한 연초에 의외의 깨달음을 주는 이 작품을 접하니 그 깨달음이 더욱 깊이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통상적인 추리소설의 공식을 따르지 않지만 소재, 분위기, 몰입도 등이 화려하진 않아도 독보적인 구석이 있는 터라 왜 내가 10년 전에 읽었을 때 다시 읽자고 생각했었는지, 왜 요네자와 호노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자고 생각했었는지 떠올랐다. 작가의 대표작이자 최대 흥행작으로 주로 '고전부' 시리즈, <인사이트 밀>, <부러진 용골>, <야경> 등이 꼽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 작품들을 밀어내고 이 작품을 대표작으로 꼽고 싶다. '청춘'을 독창적인 시각에서 다루는 작가의 개성의 정수를 경험해볼 수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고전부' 시리즈나 '소시민' 시리즈도 청춘을 제법 잘 묘사했지만 <추상오단장>의 성숙함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자 후기에서 나온 '청춘이 끝나가는 지점'에 슬슬 내 나이대가 걸쳐져 있기 때문일까. 설명이 되지 않지만 주인공의 심정에 공감이 가서 더욱 정이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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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
하현 지음 / 빌리버튼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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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내가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이유는 최근 독학하고 있는 스페인어에 대한 에세이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사서 읽기로 결심한 이유는 저자가 서문에서 '배움이란 무릇 숭고해야 한다고, 세상은 지금껏 나를 그렇게 가르쳤지만. 아니, 왜 꼭 그래야 하지?' 라고 말한 것이 퍽 공감됐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괜히 읽었다고 후회한 이유는 저자가 자신의 가벼운 배움의 의지에 너무 당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을 괜히 사서 읽었다고 후회한 이유는 입으로 불면 활자가 반절 이상 날아가버릴 만큼 가볍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어보단 스페인어를 배우는 일상에 초점이 가있긴 했지만 기실 저자의 일상 기록 정도로 받아들이고 읽으면 부담 없이 읽히고 제법 유익한 점이 없는 것도 아니라 전반적으로 가독성은 괜찮았다. 스페인어의 다양한 관용구나 배울 때 어려운 부분은 그래도 저자가 학원을 다니며 배운 보람이 있게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가며 소개하기에 언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가령, 스페인어는 내가 아는 한 알파벳으로 이뤄진 언어 중 정말 적혀있는 대로 읽기만 하면 될 정도로 발음 체계가 명확해 진입장벽이 낮아 보였지만, 단어의 성별 구분이 매우 엄격해 마치 한자로 넘어가면서부터 급격히 난이도 상승하는 일본어처럼 첫인상에선 예상되지 않는 심오함이 가득한 언어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단어의 성별 구분이야 제2외국어가 프랑스어였던 내게 아주 생소한 개념은 아니었지만, 주어의 성별에 따라 동사와 조사의 형태마저 바뀌는 게 꼭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나 이슬람의 남녀 구분보다 엄격하게 느껴져 역시 이 세상에 쉬운 언어란 없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밖에도 스페인어 공부의 여러 자잘한 고충이 묘사되지만, 실질적으로 '스페인어는 첫인상에 비해 결코 쉽지 않은 언어다' 라는 걸 제외하면 이 책을 읽고서 남는 게 딱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부분은 일기의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에세이집에서 흔히 느껴지는 단점으로, 가볍게 읽혀서 부담이 없다는 장점을 없애버리고도 남는 터라 스페인어가 첫인상과 많이 다른 어려운 언어임을 저자가 알려줬듯이, 굉장히 매력적인 책이리라 예상하게 만든 프롤로그와 달리 끝맛은 그닥 좋지 않은 책으로 기억에 남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가 배움에 대한 호기심은 있어도 의지가 박약한 편이고 그에 대한 자기합리화도 심한 편이라 나도 모르게 '이럴 거면 언어 공부는 자제해야지' 하고 속으로 쓴소릴 하게 됐다. 

 너무 신랄한 말이긴 하지만 수록된 에세이들의 질적 수준이 그리 고르지 않고 그나마 괜찮게 읽은 것도 깊이가 기대보다 떨어지기에 어쩔 수가 없다. 뭐, 가볍고 부담없는 글을 쓰는 것도 능력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며 또 나 역시 배움이 엄청나게 숭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기본적으로 작가의 글을 따라가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하지만 각각의 글의 연결고리가 의외로 허술해 갈수록 흡입력이 떨어졌고 개중엔 스페인어와 전혀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내용의 글까지 있어 탄식이 나오기도 했다. 너무나 뜬금없는 나머지 그 글의 자체적인 완성도를 논하는 게 무의미할 지경이었다. 이를테면 저자는 자신이 통학하는 홍대 근처가 어느날 달리 보였다는 취지로 낙태죄 폐지와 '검은 시위'에 대한 글을 썼는데, 난 아직도 그 글이 왜 수록됐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글이기도 하고 편집 과정에서 이 글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작가나 편집자나 그 나물에 그 밥인 것 같아 이 책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떨어지게 됐다. 아직 책은 150페이지 더 남았는데. 


 거기서부터 기대를 떨어뜨린 덕분인지 저자가 자신의 스페인 공부를 흐지부지하게 끝내게 됐더라는 내용의 글이 별 감흥 없이 읽힌 건 불행 중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자꾸 얘기하지만 배움이 꼭 숭고할 필요는 없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했다. 왜냐하면 나는 배움이란 숭고함 이전에 즐거움이 우선돼야 한다고 평소부터 생각해왔기 때문인데 정작 저자는 숭고하지만 않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어 공부에 엄청난 즐거움을 느끼지도 못하는 듯해 읽는 나도 마찬가지로 별로 즐겁게 읽히지 않았다. 

 물론 순수하게 즐거워야지만 배움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자격증 취득 및 스페인으로 유학이나 여행을 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것도 훌륭한 동기일 텐데 문제는 저자는 어느 동기도 갖고 있지 않고 기왕 기회가 있으니 배워본다, 정 안 되면 글감으로 다루면 되니까 하고 어느 순간부터 의무적으로 수강에 임하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꼭 숭고하지 않더라도 명확한 목적이 있었더라면 책의 무게감이 확 달라졌을 텐데, 저자는 자신의 의지박약을 인정하면서도 그대로 발전없는 채로 시간을 보내 글도 흐지부지 끝내버린다. 


 '이럴 거면 애당초 배우지 말지' 라고 속으로 많이 생각했지만 그 말로 내 감상을 정리하지 않겠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심차게 뭘 배우기 시작했다가 그렇게 흐지부지하게 끝내버리기 일쑤잖은가. 나도 그렇고... 그리고 저자는 적어도 이런 흐지부지한 에피소드로 책 한 권을 완결냈으니 소정의 성과는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에 공감이 가는 사람들도 - 특히 스페인어의 문법에 질려 포기한 사람들 - 적잖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선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아,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하고 읽을 수 있는 책, 비꼬는 말이 아니라 이런 위로를 주는 책은 정말 필요하다 생각한다. 나쁘게 말하면 반면교사 삼기 딱 좋은 책이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말하라지. 

 허나 한 사람의 독자로서 얘기하건대 저자가 사람으로서가 아닌 작가로선 영 정이 가지 않았다. 이제야 독학으로 스페인어 어휘를 익히고 있는 내가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저자는 책의 제목에 넣은 '스페인어'라는 소재에 대한 전문성을 살리기보단 저자 자신의 감상을 적어내는 것에 주력했다. 작가가 자신의 주관을 글에 녹여내는 것은 중요하지만 비문학적인 요소, 스페인어의 역사나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 등 다각도에서 접근했더라면 적어도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생각난 자신의 과거를 풀어내기만 했던 것보다 훨씬 풍요로운 내용의 책이 됐을 것이다. 


 나라고 꼭 책의 내용이 풍요롭지 않았다고 깎아내리고 싶진 않으나 결정적으로 저자가 자신의 글을 치밀하고 진지한 자세로 임한 것 같지 않아, 말 그대로 배움이 숭고할 필요는 없다며 자신의 글에도 숭고함을 불어넣지 않은 듯해 독자로서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제목에 스페인어란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 하나로 읽은 주제에 너무 혼자 실망하고 폭언을 하는 것 같아 조금 찔리지만, 책의 제목처럼 정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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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티사르의 자동차 - 현대 예멘 여성의 초상화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페드로 리에라 지음, 나초 카사노바 그림, 엄지영 옮김 / 미메시스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10 






 실화가 가진 압도적인 힘이 있어 두 번째 접함에도 압도당하며 읽었다. 예맨에 일 때문에 가본 경험이 있는 스페인 만화가의 작품으로 예맨 여성 인권의 현주소를 낱낱이 드러낸다. 앞서 말했듯 작가의 창작이 아닌 '어느 예맨 여성'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그래픽 노블'의 특성에 따라 그림보다 문장을 따라가며 읽는 맛이 상당했던 작품이다. 예전에 읽을 때는 잘 느끼지 못했던 부분인데 문장력이 상당히 뛰어났는데 아무리 그래픽 노블이라지만 엄연히 만화에 속하는 작품에 문장력에 감탄해보긴 처음이었다. 다시 곱씹어볼 만한 문장은 이번에 읽을 땐 없었지만 워낙에 작품의 분위기가 분위기인 지라 그냥 작품 자체가 뛰어난 문장처럼 읽혔다. 

 처음 이 작품의 모델이 된 '어느 예맨 여성'은 예맨의 문제는 종교가 아닌 그 이전부터 이어져 온 '관습과 전통'이라는 종교가 문제임을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쉽게 말해 이슬람교는 거들 뿐이란 것이다. 여담이지만 쿠란의 구절을 쓴 무함마드 입장에선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 쿠란을 쓸 당시와 지금 시대를 동일시할 순 없으니 어느 정도는 고리타분하고 폐쇄적인 마음가짐과 환경에서 그 구절들을 적은 것이겠지만, 후대의 이슬람교와 관련된 문제들은 그 쿠란을 교묘하게 자기들 입맛대로 오독한 것에서 비롯되니 이슬람교 전체를 싸잡아 욕하기도 뭔가 애매하단 생각도 든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이 작품의 주인공 인티사르부터가 샤를리 엡도의 풍자 만화를 바보같다며 비판하는 등 딱히 이슬람교도인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눈치가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인티사르는 예맨이란 나라의 막장스러움, 자신의 아버지는 틈이 날 때마다 씹지만 이슬람교를 근본적으로 혐오하는 장면은 없었다. 아주 나쁘게 말하면 세뇌당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실상 이슬람교를 실제로 겪어보지 않은 입장인 나 같은 독자는 실제 그 종교를 믿으며 본인 나라에서 특정 성별로 살아감에 있어 어떤 기막힌 고충이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게 그나마 이 책을 읽는 동안 감정을 격해지지 않게 억누를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동양권과는 비교가 불허한 여권의 후진성이 작품 전반에 걸쳐 여과 없이 묘사됐다. 사실 동양이라고 어디 가서 여권 신장이 잘 이뤄졌다고 할 순 없지만 상대적으로 예맨 같은 나라랑 비교했을 때 뭐든 위엔 더 위가 있구나 하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신을 가리는 니캅을 시작으로 흡연하는 여성을 바로 창녀 취급하거나 아버지의 말 한 마디에 진학과 취업과 결혼이 당사자의 의지완 상관없이 결정되고 번복따윈 용납하지 않는 것, 여성 혼자선 담배 한 갑 구매할 수 없는 것 등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이래저래 도가 지나쳐 일일이 언급하며 화를 내는 게 입 아프고 열불나는 사례가 줄지어 소개된다. 


 그래도 이 작품을 결말까지 읽을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주인공 인티사르일 것이다. 사회 분위기상 여성 혼자서 운전을 하는 게 용납이 안 되는 상황에서 퇴근할 때 도로에서 자신의 자동차로 스릴 넘치는 드라이브를 펼치는 도입부는 제법 흥미로웠다. 고작 여성이 운전하다는 이유로 얼굴 붉히며 달려드는 남성 운전자도 정상은 아니지만 그런 상황을 대처하는 인티사르의 대범함도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좋은 의미에서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상당한 자산가의 자제이고 또 그 꼰대 아버지를 상대로 학업이나 취업처럼 중대한 문제에선 절대 타협하지 않던 인티사르였기에 느닷없는 광란의 레이스따윈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티사르의 상황이 그나마 나은 건 그녀의 성격 덕분이 크지만 이런 성격조차 바로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싫어하는 아버지의 재력에서 어느 정도 비롯됐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인티사르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다른 나라도 아니고 작중 묘사에 따르면 예맨처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제약이 많고 나라 자체가 빈부 격차가 극심한 나라에선 가장의 재력이 곧 그 집안 인물들의 정체성을 살펴봄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요소임엔 분명하다. 즉 인티사르의 비극은 그나마 다른 예맨 여성에 비해 가방끈도 길고 어느 정도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버지 덕분이란 걸 본인이 결코 모르지 않는다는 것에 있는데... 이는 굳이 예맨이 아니라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 그늘에 사는 자식이라면 다 공감할 여지가 많은 부분이라 여겨졌다. 내가 이 책을 5년 전에 읽을 때와 다르게 인티사르의 이야기가 부분적으론 내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결정적으로 느낀 부분이기도 하다. 인상적인 변화긴 한데 참 씁쓸하구만. 


 따지고 보니 이 작품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원동력인 인티사르의 성격이 어느 정도는 아버지의 덕도 있다는 결론이 나와 책이 전에 없이 씁쓸한 뒷맛을 안겼다. 하지만 반대로 결말을 다다르니 씁쓸함이 아닌 감동이 밀려왔다. 낡아빠지긴 했어도 애지중지 타고 다닌 인티사르의 자동차가 아버지에 의해 이복 남동생의 운전 연습용으로 넘겨졌을 때 인티사르는 자신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남자인 친남동생과 함께 자동차를 몰래 태워버린다. 제아무리 낡아빠졌어도 남이 망치느니 자기가 끝을 내는 게 맞다며 눈물을 머금고 태워버린 것이다. 물건의 제값이 어떻든지 간에 자신의 소유를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과 그 물건을 빼앗기느니 과감히 자신의 손으로 끝을 내는 행동이 참으로 주체적인 모습이지 않은가 싶었다. 

 비록 인티사르의 자동차든 주체적인 성격이든 아버지의 제력에서 비롯된것일지언정 어쨌든 인티사르의 것이기도 하며 이는 변함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계속 이런 마음가짐과 행동력이 뒷받침된다면 아버지나 다른 남성의 방해로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더라도 그녀에게 어떻게든 활로가 열리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인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니 너무 낙관적인 생각은 당사자 입장에선 역겨움을 유발할 수도 있다. 허나, 이 작품의 제목에 다른 무엇도 아닌 인티사르의 '자동차'가 들어간다는 것에서 인티사르가 마지막에 자동차를 대한 태도에서 인생의 활로를 개척할 만한 약간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었기에 저 낙관적인 생각을 포기하고 싶진 않다. 


 때론 자신의 소중한 것을 스스로의 손으로 없애면서 얻게 되는 자존감도 있는 법이다. 우리가 그 자존감을 얻고 지켜나간다면, 어쩌면 답이 없어 보이는 삶이 실마리를 얻은 듯 유려하게 흘러갈는지 모른다. 실제로 이 작품이 마지막까지 씁쓸하게 읽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난 내 낙관적인 해석에 더욱 애착이 간다. 반면교사를 삼긴 좀 그렇지만, 예맨처럼 힘겨운 나라에서 저런 결말의 이야기를 접하니 다가올 새해가 전보다 밝게 느껴졌다. 이 기운이 부디 오래 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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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미술관 산책 미술관 산책 시리즈
전원경 지음 / 시공아트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9.4 






 읽기 전엔 런던 유명 미술관들의 대표작을 소개해주는 평범한 미술 서적인 줄 알았다. 물론 런던 미술관에 대한 선망을 품고 있기에 펼친 책인 만큼 제아무리 평범하더라도 나름대로 만족하며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서문을 읽고서 정말이지 본문의 내용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저자는 런던의 유명 미술관들만이 아닌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역사적으로, 또는 미술을 전공한 저자 스스로 생각하기에 중요한 미술관도 몇 곳 다뤘음을 서문에서 밝혔다. 일단 그 점이 흥미로웠고,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단지 그 미술관의 대표작이 아닌 런던이나 영국 전체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그림 위주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즉 유명하더라도 예컨대 고흐나 얀 반 에이크, 벨라스케스의 그림처럼 내셔널 갤러리를 대표하는 그림이더라도 영국 역사와 무관한 내용의 작품이라면 뒤에 '이외에 꼭 보아야 할 그림'으로 간략히 정리해놓은 것이 제법 신박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이런 의문도 들 것이다. 영국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메이드 인 영국'은 건물과 경비원밖에 없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인데 오로지 영국 작가의 작품만으로 책 한 권을 채우는 게 가능한가? 오죽하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일 적에 여러 나라에서 하도 많이 훔친 나머지 양심에 찔려 입장료를 안 받는다고 수군거릴 정도니 정말 말 다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농담은 농담으로 치부하고 싶지만 영국의 화가라고 하면 기껏해야 터너밖에 떠오르지 않아 저자의 서문이 흥미로우면서 반신반의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노르웨이에 여행갔을 때 그 나라에 뭉크를 제외하고도 정말 멋진 화가가 많다는 걸 알았으니 영국에도 꼭 터너가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않게 훌륭한 화가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 꼭 세계적으로 유명해야 멋지고 훌륭한 화가인 것은 아니니까... 


 이 책을 읽고 언젠가 런던을 방문한다면 이 그림들은 꼭 봐야지 하고 구체적인 리스트가 머릿속에 작성됐다. 대표적으로 내셔널 갤러리에선 폴 들라로슈의 <제인 그레이의 처형>,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 <비, 증기, 속도>, 모네의 <웨스트민스터 하구에서 본 템스 강>, 르누아르의 <우산>을, 코톨드 갤러리에선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루소의 <톨게이트>가, 테이트 브리튼에선 윌리엄 홀맨 헌트의 <깨어나는 양심>을, 조지프 라이트의 <대장간>, 터너의 <노엄 성의 일출> 등이 보고 싶었다. 개중엔 런던이나 영국과 크게 상관없는 작품도 있고 그저 좋아하는 화가의 대표작이거나 아니면 저자가 소개한 작품의 내용이 흥미로워서 보고 싶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국립 초상화 미술관이나 테이트 모던에서 작가가 소개한 작품 중엔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없었다. 

 오해해선 안 될 것이 국립 초상화 미술관의 경우엔 소개되는 그림들이 전부 영국의 위인이다 보니 역사를 공부하는 느낌이 들어 가장 이질적이면서 어떤 의미에선 가장 흥미로웠지만, 바로 역사를 공부하는 듯한 그 이질감 때문에 순수하게 그림으로서 끌리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다. 반대로 테이트 모던은 폐공장을 현대미술관으로 바꾼 것으로 유명하며 개인적으로 방문해보고 싶은 곳이지만 현대 미술의 특성상 난해하고 기괴한 그림이 많고 - 특히 베이컨의 작품이 그렇다. - 작가가 소개한 작품들 중 영국 문화나 역사를 대변하는 작품이 없어서 읽는 동안 그 이상의 흥미가 생기진 않았다. 오히려 이 미술관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더 인상적이었다. 예전에 런던의 도시 계획에 관한 책을 읽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간혹 예산을 감축한 탓에 임기응변으로 오래된 건물을 활용한 공간이 크게 각광받는 케이스가 참 많은 것 같다. 정말 인간 만사 새옹지마랄까. 


 생각보다 소개된 작품의 수도 많았지만 저자가 너무 어렵게 글을 쓰지 않아서 좋았고 영국 역사를 잘 모르더라도 맥락 파악에 문제 없었던 것이나, 또 너무 자전적인 이야기에 빠진 나머지 글이 감상적으로 흐르거나 삼천포로 빠지지 않은 것도 이 책에 대해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저자는 자신이 소개한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테크닉적으로 얼마나 뛰어난 작품인지 설명하기보다 저자 자신의 눈으로 정성스럽게 관찰한 결과를 들려주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그 어투 덕분에 진입 장벽이 낮아져 자칫 지루하고 나와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은 그림들의 이야기가 꽤 재밌게 스며들었다. 

 아까 저자가 서두에서 밝힌 집필 방침이며 그 예시로 든 두 그림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참으로 흥미롭기 그지없었다고 말했었다. 확실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위에서 런던에 가서 보고 싶은 그림들 중엔 저자가 소개해주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그림도 많다. 가령 산업혁명을 최초로 화폭에 담은 화가인 조지프 라이트의 이야기나 모네가 런던에 잠시 살았었다는 사실, <제인 그레이의 처형> 속 비극적인 역사는 나처럼 역사나 미술 전공이 아닌 사람이 따로 알기에는 시간이 필요할 만큼 낯선 이야기인 터라 저자가 쏟아내는 이야기에 잠시나마 지적 욕구 및 갈증이 적잖이 해소됐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아는 만큼 보이긴 하지만 모르더라도 알기 위해 노력한다면 시간이 조금 걸릴 뿐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결국 이 책을 쓴 저자도 처음부터 완벽히 모든 이야길 알고서 집필에 임한 것이 아닌 집필하는 도중에도 미술관에 몇 번씩 들러 이야길 풍성하게 만든 것에 가까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저자가 미술관에 몇 번씩 들르는 동안 겪었던 에피소드나 개인적인 감상, 그림의 배경을 공부한 뒤에 달라진 인상 등을 들려주니 작품들을 직관하지 않았음에도 간접적으로나마 감상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즘처럼 인쇄물이 풍족해진 세상에선 책에 수록된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간접 체험을 하는 느낌은 받기 쉽지 않은데 저자는 그 어려운 걸 해냈다. 정말 미술관을 사랑하는 작가라 그럴까, 그림을 살펴보는 자세나 열정 등 참 본받아 마땅한 작가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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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엮다 : 상
미우라 시온 원작, 쿠모타 하루코 그림 / 미우(대원씨아이) / 2019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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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라고만 이 작품을 소개하면 솔직히 별로 재밌어 보이진 않을 것이다. 원작 소설가가 미우라 시온이며 원작이 일본서점대상을 수상했고 인기에 힘입어 실사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는 얘기까지 들어도 사전 만드는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을까 싶을 것이다. 내 경우엔 지금 이렇게 포스팅을 쓸 때도 사전을 꽤 많이 참고하는 터라 사전 자체가 익숙하지만, 어떤 사람에겐 어쩌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잡지 않은 책이 사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밌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을 수밖에. 내 나름대로 사전을 많이 본다고 한 나도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리 재밌을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배를 엮다>는 '대도해'라는 이름의 사전을 편찬하는 사람들의 13년 간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사전의 이름은 말의 바다를 나아가는 배이며 작품의 제목은 배라는 이름의 사전을 엮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의미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 개봉된 영화의 제목은 '행복한 사전'이었는데, 그 제목도 아주 관련이 없는 제목이라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원제가 훨씬 낫다고 본다. 물론 '배를 엮다'라는 말이 일상적인 표현이 아니다 보니 이해는 하지만. 아무튼 넘쳐나는 말의 홍수 속에서, 또 내가 알고 있는 것 같은 단어여도 막상 사전적 정의를 말하라고 하면 입이 잘 벌리지 않는 언어의 어려움 속에서 묵묵히 시간을 다해 사전을 편찬하는 사람들의 고군분투가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간혹 일할 사람이 부족해서, 또는 회사의 재정 문제 때문에 사전 제작 자체가 엎어질 위기에 처하지만 그때마다 잘 수습해 결국 사전 출간에 이르게 된다. 


 13년이라니, 객관적으로는 참 길고도 긴 시간이지만 원래 정성을 다한 책은 그만큼 시간이 드는 법이다. 대체로 소설도 따지고 보면 10년이 넘게 구상되고 집필된 작품이 아주 많다. 특히나 사전은 치우치지 않은 언어의 정확한 풀이를 살펴보는 책이므로 오히려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들이는 게 중요할 것이다. 이 책은 사전 만들기의 전문성, 언어를 어떻게 풀이해야 하며 사전엔 어떤 종이가 적합하며 어떤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지 제법 디테일하게 소개된다. 요즘엔 사전을 인터넷 사전만 보거나 영어 사전만 보는데 작품을 읽다 보니 종이로 된 사전을 언제 한 번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 됐다. 비단 이 작품 속 캐릭터들 못지않게 우리나라에서 사전을 만든 사람들도 적잖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냈을 테니까.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순전히 지식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란 점에서 고매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난 이 작품을 영화로 먼저 접했고 원작 소설도 읽었고 만화로 세 번째로 접하게 됐다. 만화가 영화나 원작 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인물의 감정 표현이나 묘사가 조금 더 발랄하고 적극적이며 알기 쉽다는 것이다. 이 점 덕분에 주인공 마지메와 카구야의 연애 이야기보다 만화에선 니시오카의 열등감이 더 흥미롭게 묘사됐다. 어떻게 보면 니시오카의 열등감이 작품 전체에 걸쳐 중요하기 그지없는 부분인 지라 만화의 연출이 실로 적합했다고 여겨졌다. 보통 마지메처럼 사교성 떨어지는 캐릭터가 주인공인 작품의 경우 그들의 성실함과 전문성을 높여주며 그와 다른 사교성 높은 사람들, 소위 말하는 인싸에 속하는 사람들을 두고 경박하다면서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선 반대로 그렇게 홀대를 당하는 인싸가, 아니면 정말로 내실 없게 살거나 그렇게 산다고 푸념하는 인싸가 화려하지 않은 삶이어도 내실 있게 사는 마지메 같은 캐릭터에게 형용하기 힘든 열등감을 품는 대목이 - 그런 와중에도 둘 사이에 아주 바람직한 우정이 형성된다는 것도 - 신선하면서 정말 그럴 수도 있겠는데 싶어 굉장히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작품을 통해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 언어의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이야길 접할 수 있던 것도 좋지만, 그저 자기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과 끈기, 이른바 장인 정신의 가치란 것을 엿볼 수 있어 더욱 애정이 갔다. 캐릭터들이며 소재며 이래저래 사랑스러운 작품이지만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라는 자칫 생소하고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길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고매함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장인의 이야기란 대체로 그런 법인가? 작품의 결말을 생각하니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내심 이 만화를 읽기 전엔 과연 원작 소설의 내용이 만화로도 2차 창작될 만한 내용이었나 싶었지만 읽는 동안 만화가 더 편한 독자들에게도 <배를 엮다>의 내용을 전할 수 있으니 참 다행이라며 역시 괜히 만화로 나온 게 아니구나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애니메이션까지 볼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어느 장르로 치환되더라도 재밌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정말 대단한 원작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을 둔 다음에 소설이랑 영화도 다시 볼 생각이다. 내용이 가물가물해진 다음에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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