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필름이 남아 있을 때 - <스트로보> 개정판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7.7






 난 사진을 아주 좋아하진 않지만 '남는 건 사진 뿐이다' 라는 말엔 어느 정도 동의한다. 내가 올린 여행 포스팅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난 여행 중에 사진 찍는 건 꽤 좋아라 한다. 다만 원칙이 있다. 딱 한 번만 찍는다. 비슷한 사진을 두 장 남기지도 않고 잘 나오길 고대하며 셔터를 두 번 이상 누르지 않는다. 이게 일로써 사진을 찍는가,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을 찍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지만 좋은 사진을 위해 집착 혹은 강박 관념을 가진 순간 여행은, 나아가 내 일상은 결코 즐거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가는 어떻게 보면 나한테 있어 가장 동떨어진 직종의 사람이다. 사진이라는 작품을 위해 시간과 공을 들이는 직업 정신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풍긴다. 사진가라고 해도 기껏해야 새로 만드는 여권에 필요한 증명 사진을 찍을 때 만날 뿐이지만 그들에겐 남다른... 그러니까 거리감이 느껴진다.


 심포 유이치의 <아직 필름이 남아 있을 때>는 전적으로 '작가의 말' 때문에 여운이 떨어진 작품이다. 작품 자체는 내 취향과 그리 부합하지 않았지만 사진가인 주인공의 전문성과 특수성을 잘 살린 다채로운 소설이었다. 영화 <박하사탕>, 소설 <내 남자>, <13.67>과 같이 역순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한 명의 사진가가 매너리즘에 빠졌다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에피소드, 한창 여성편력이 심했을 때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한 일, 몇몇 지인의 죽음에 남겨진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등 다양한 이야기가 녹아들어 있다. 이는 한 사람의 일대기이자 일본 근현대사의 이모저모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장치로써 꽤 쏠쏠한 감동을 준다. 그래서 굳이 작가가 한 번 더 되짚느라 구구절절 설명하는 식이 된 '작가의 말'은 식상하고 맥빠졌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에피소드까지가 기억에 남았다. 주인공이 50세, 42세 때 겪은 일들로 전자는 과거 인연이 있던 한 여인의 영정 사진을 찍는 내용, 후자는 한때 관계를 가진 여성 사진가의 죽음에 담긴 사진가로서의 집념을 그린 내용이다. 전자는 드라마가, 후자는 미스터리의 색채가 짙었는데 두 색깔이 과하지 않게 어우러져 볼 만했다. 심포 유이치는 개인적으로 작정하고 쓴 추리소설보다 이렇게 추리소설인지 뭔지 알쏭달쏭한 소설을 되게 잘 쓰는 작가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하면 구성이나 내용, 캐릭터가 그렇게 새롭진 않았지만 사진가의 일생을 다뤘다는 독보적인 지점이 있으므로 해당 소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봐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작중에 드러난 사진에 대한 감성이나 철학이 크게 와 닿지 않아서 나한텐 별로 재밌진 않았는데 다른 독자들은 또 모를 일이다. 그나저나 국내에 출간된 심포 유이치의 작품은 이 작품으로 다 읽은 것 같은데... 내심 허전하다. 더 읽어보고 싶은데 어째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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