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섬 퍼즐 학생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8.9






 외딴섬에서의 보물찾기, 클로저드 서클 속 연쇄 살인, 밀실 살인, 다잉 메시지, 알리바이, 범인 찾기... 여느 때처럼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외딴섬 퍼즐>은 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 추리소설의 로망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파악이 가능하다. 상당히 고전적인 추리소설을 쓰는 이 작가를 처음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신작이 발매되지 않아 이렇게 재독하는 것으로 갈증을 달래고 있는 실정이다.

 개인적으로 최악이라 생각했던 데뷔작 <월광게임>도 다시 읽으면 다르려나 싶을 만큼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은 재독하면 더 빛이 나는 듯 - 하지만 <월광게임>은 읽지 않을 것이다... - 하다. 3년 전, 군대에 있을 때 <말레이 철도의 비밀>과 같이 작가의 진면목을 깨닫게 해준 <외딴섬 퍼즐>은 오히려 다시 읽으니 더 흥미진진했다. 그때는 보물찾기와 연쇄 살인의 조합이 크게 와 닿지 않았는데 지금은 '김전일' 같은 데서 많이 다뤄져서 식상하긴 해도 재밌게 읽혔다. 첫 번째 살인 이후에 주인공네 일원이 뭘 해본답시고 섬에서 보물찾기에 열중하거나 밤바다에 보트를 띄우는 것 등 조금씩 개연성이 떨어지는 장면이 있었지만 의외로 결말, 범인을 특정짓는 과정에 있어서 불필요한 요소는 또 아니라서 여러모로 재독하는 재미가 충분했다.


 후속작 <쌍두의 악마>, <여왕국의 성>에 비하면 분량이나 스케일적 면에선 살짝 약하지만 그래도 작품 내적으론 크게 뒤떨어지는 구석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게 데뷔작 이후에 바로 출간된 두 번째 작품이란 점에서 보면 특히 그렇다. 뭐든 처음보다 두 번째가 어렵다고 데뷔작에 너무 힘을 쏟아 이후 작품이 실망스러운 작가가 있는 반면 이렇게 점점 잠재력을 발현하는 작가도 있는데 89년도 작품이라 신선함이 없지않아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재기 넘치는 작품이었다. 특히 '독자에 대한 도전'을 던지면서 과시된 공정함은 새삼스러울 만큼 감탄을 자아냈다. 꼭 추리소설 한두 권만 읽어본 것처럼 말했나...?

 추리소설은 재독할 가치가 없는 장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아주 동의하지 않는다. 어쩌다 보니 요즘 책을 재독하는 일이 잦아졌는데 예전엔 왜 같은 책을 두 번 읽지 않으려고 했는지 이해가 안 가는 그런 뉘우침의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경우에는 문장도 잘 다듬어져 있고 이야기가 별로라도 캐릭터 드라마에 공을 들여 - 적어도 탐정 주변 인물에 한해서는 확실하다. - 잔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연구회의 홍일점인 마리아의 등장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마리아가 자칫 딱딱하게 읽힐 추리소설 속 세계에 작가가 원했을 감성과 따뜻함이 잘 녹아들게끔 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여덟의 여름>을 쓴 미쓰하라 유리의 해설도 백미였다. 본인이 말하는 것처럼 해설보단 사랑 고백 수준의 애정이 듬뿍 담긴 글이었는데 스포일러가 있긴 해도 시리즈의 탐정역을 맡은 에가미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있어서 흥미롭게 읽혔다. 여느 거만하고 사건 해결만이 목적인 탐정과는 결이 다른 인물로 범인을 밝혀내는 것으로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는 통찰은 흔히 사회파 추리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 나 또한 이번에 에가미를 다시 보게 된 것 같다.

 ...위에서 이 작품의 추리소설로써의 강점을 잘 부각시키지 못한 것 같아 제대로 설파하자면, 작가가 추구하는 연역적 추리가 여지없이 발휘된 수작이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쟀을 때 단 한 명의 용의자가 남아 지목된다면 바로 그 사람이 범인이다. 사건 전부를 파악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런 깨끗한 논리를 추구하며 구축해낸 수수께끼는 깨끗함에 걸맞게 돌파구도 마련된 숨김 없는 게임이라 그저 추리해내지 못한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굉장히 좋은 의미에서 잘 만든 추리소설로 로망과 스토리도 균형을 이루고 있어 이번에도 만족스럽게 완독할 수 있었다. 이미 읽은 후속작 <쌍두의 악마>가 또 기대되기 시작했다.



 인상 깊은 구절


 

선생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실수인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아무리 봐도 그리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억울하게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우아한 생활로 복수하고 있는 것 같군요. - 179p


그렇죠. 이십대 소년 탐정단이잖아요. 내가 말려든 사건은 스스로 해결하자. 이게 우리 신조 아니던가요? - 280p


이런 미스터리는 어때? 불가사의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밀실 상태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공포에 떤다. 이윽고 탐정은 사람들 앞으로 나서서 말없이 그 문을 판자와 못으로 막아 버린다. 그러더니 사람들을 돌아보며 한 마디. '자, 돌아갑시다!'...... - 330p


하지만 인간은 때때로 그런 의도가 없어도, 존재만으로도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가해자'가 됩니다. 인간은 이런 이유 때문에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 446p


운명에 속박당해 자기가 가야 할 길조차 자기 힘으로 정하지 못하고 살아가야 한다면 그런 상태를 과연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 454p

선생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실수인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아무리 봐도 그리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억울하게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우아한 생활로 복수하고 있는 것 같군요. - 179p




그렇죠. 이십대 소년 탐정단이잖아요. 내가 말려든 사건은 스스로 해결하자. 이게 우리 신조 아니던가요? - 280p




이런 미스터리는 어때? 불가사의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밀실 상태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공포에 떤다. 이윽고 탐정은 사람들 앞으로 나서서 말없이 그 문을 판자와 못으로 막아 버린다. 그러더니 사람들을 돌아보며 한 마디. ‘자, 돌아갑시다!‘...... - 330p




하지만 인간은 때때로 그런 의도가 없어도, 존재만으로도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가해자‘가 됩니다. 인간은 이런 이유 때문에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 446p




운명에 속박당해 자기가 가야 할 길조차 자기 힘으로 정하지 못하고 살아가야 한다면 그런 상태를 과연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 454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