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소설
하세 사토시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9.0







 소설을 쓰는 인공지능 시스템과 그를 개발한, 시한부 인생의 과학자의 이야기를 읽었다. 전혀 SF스럽지 않은 제목의 이 소설은 전개도 얼핏 예상되는 바를 따르지 않는다. 내용은 제목처럼 로맨틱하지도 않고 인공지능이란 설정을 위시하는 만큼의 살풍경한 분위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주 예측불허한 소설이진 않았는데 인물의 심리 묘사가 만만치 않아 좀처럼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SF 소설을 자주 읽지 않은 덕분인지 작품은 꽤 신선하게 읽혔다. 일찍이 설정으로써 인공지능은 많이 접했지만 이렇게 순수하게 접근한 작품이 또 있을까 싶다. 인공지능 이야기를 다루는 한편 액션이나 스릴, 혹은 로맨스도 가미한 퓨전 형식의 작품은 많이 떠오르지만 순전히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에 관해 풀어낸 작품은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무려 소설 쓰는 로봇이 등장한다고 하기에 기대가 됐지만 내 예상과는 살짝 다른 양상으로 진행됐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도 기대 이상으로 좋지만 줄창 그 얘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소설을 쓰도록 설계된 인공지능 시스템을 불치병에 걸린 과학자의 신세와 대비시켜 삶의 이야기로 풀어낸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인상적이었다. 참 알기 쉬운 이야기였지만 도처에 깔린 주인공의 기존 윤리에 대한 환멸이나 소름 끼치도록 순수한 인공지능이 선사하는 위로는 적잖은 울림을 줬다.

 SF 소설이 미래 사회에 던져질 문제를 비롯해 장차 마주할 미래의 모습에 대해 상상하는 소설이라면, 이 작품은 가히 모범적인 작품이었다. 과학과 윤리가 충동했을 때의 아이러니와 더불어 인간성마저 낳을 수 있는 과학의 가능성을 목도시키는 등 여러모로 과학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이끌어내는 화두를 많이 던졌다. 또한 소설에 걸맞게 감수성과 언어적 예술성도 겸비해 인공지능이 풍기는 부정적 색채를 덜어냈는데 이게 아주 좋았다.


 작년에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이 인공지능의 압승으로 끝나자 큰 불안감이 일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미래를 자꾸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됐는데 이 작품을 읽으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우리의 미래는 기존의 윤리 의식으로 제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래서 과학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세상은 차가워질 거라고 지레짐작하지만 인간의 과학이 그만큼 인간성이 결여될 것이라 비관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적 소양이 그리 많지 않아 인공지능의 청사진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이 말이 문득 떠오른다. 만화 <플루토>에서 '완벽한 인공지능은 괴로워하고 증오하며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공지능이 인간성에 이르기까지의 알고리즘은 평생 이해할 순 없어도 이 말엔 공감이 간다. 기계의 인간성이 정말 '인간성'이라면 우리 인간이 가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낙관하기를, 우리 미래는 아주 비인간적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여전히 SF는 내게 장벽이 높지만, 이런 작품이 바로 SF라면 다른 작품도 기대가 된다. 앞으로 읽을 작품이 늘어난 게 기쁘기 그지없다.

 

 

 

인상 깊은 구절

 

'죽음'이 가깝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결정적으로 맞닥뜨리는 거야. - 87p


'인간의 재능이나 꿈' 운운하는 이야기 뒤에 오만함이 만연하는 겁니다. 밑에서 기어오르는 자를 걷어차 버리고 싶어 하는 욕구는 실제로 존재해요. 비즈니스 수요라는 것은 그런 욕구에 지탱되고 있어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그것은 이미 기술이 완성되어 있어요. 그런데도 마치 그런 기술이 없는 척하며 건전한 논쟁을 봉쇄해 버리고 싶은 건가요? 인간은 원래 죽는 존재니까, 죽지 않을 수 있는 기술이 완성되어도 계속 죽어야 한다는 건가요? - 114p


어린 시절 꿈꾸던 '미래'와 같지 않은 현재, 그 현재에 대한 복수입니다. 훌륭하게 진보한 세계를 자손에게 넘겨주고 싶어서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복수의 연쇄가 세상을 편리하게 만들어 온 거라고 생각합니다. - 117p


나에게 과학은 저항입니다. 나 자신의 무력함을 극복하고, 부모 세대가 결손을 남긴 불만족스러운 세계를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 과학자가 되었죠. 그래서 나는 미래의 비전이 현실을 이끌고 세상을 바꿔 나가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항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싸우는 길 외에, 미래를 보지 못하고 죽어 간 사람들이나 아슬아슬하게 기회를 놓친 사람들에게, 살아남은 사람이 어떻게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 118p


인간은 '저'처럼 정해진 역할을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에 동기를 자극하기 위해 '소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지어낸 이야기든 허구가 없는 논픽션이든 호오의 감정에 반응하는 '소설'이 없다면, 정해진 역할이 없는 개체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없을 것입니다. - 362p


'미래'는 과학이 배제할 수 없는 유일한 형이상학일 뿐이에요. 과학은 '반증이 가능한 것'을 다루기 때문에 늘 장차 뒤집힐 여지를 남기죠. 과학은 구조적으로 '미래'의 여백을 다 없앨 수 없어요. - 393p


이 작품들이 상품일 수 있었던 것은 언어를 사용하여 독자로부터 1초라도, 한순간이라도 '언어를 빼앗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406p


미스 사만다에게 죽음은 일관되게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불합리하기 때문에 이토록 길게 마음을 점령해 온 것입니다. - 4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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