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의 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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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제목을 처음 봤을 때 경관이 흘리는 피라고 생각했다. 표지에 적힌 영어 제목을 보니 <The policeman's lineage>였다. lineage, 경관의 '피'는 바로 경관의 '혈통'을 일컫는 말이었다. 다 읽고 보니 꽤 중의적인 표현이구나 싶다.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best 10'에서 1위를 수상해 언젠간 읽어야지 벼르고 있던 소설이었다. 하지만 분량이 부담스러운 나머지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먼저 집었는데 확실히 이 작품이 제일 재밌었다. 사사키 조의 작품을 많이 읽진 않았지만 이 작품이야말로 작가의 장기가 집대성된 작품인 게 물씬 풍겨졌다. 작가는 후기에서 <경관의 피>가 우리나라 독자들한테까지 읽힐 만큼 보편적인 작품인가 걱정된다는 말을 했다. 그 걱정... 은 기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드라마적인 측면에서나 일본 경찰이라는 특수한 설정을 폭넓게 감상할 수 있다는 데에서 이번 독서의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3대가 주인공으로 그들 모두가 경관인 작품이다. 전후 일본의 민주 경찰이 된 안조 세이지, 쇼와 시대에 접어들어 학생 운동이 불거지기 시작한 시기에 경찰이 된 안조 다미오, 그리고 현재의 경관 안조 가즈야. 무려 60년에 걸쳐 진행되는 이 작품은 경찰 소설이자 역사소설이기도 하다. 3대에 걸쳐 경관직에 몸을 담았던 안조 가家에 닥친 미스터리나 시대에 따라 위상과 업무 내용이 바뀌어가는 경찰의 모습 등 볼거리가 풍부했다.

 읽기 전에, 분량만큼이나 나를 걱정시켰던 부분은 이 작품이 다름아닌 경찰 소설이라는 것이었다. 추리소설 속에서 경찰은 숱하게 등장하지만 이 작품처럼 670페이지가 넘도록 경찰을 얘기하는 작품은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너무 전문적이거나 취향을 탈 것이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 걱정은 반은 맞아들었고 반은 빗나갔는데, 작품 속에 내제된 요소가 워낙 다양해서 경찰 소설이라는 한마디로 묘사할 수 없었다.


 작품을 읽는 내내 현실적인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경찰 소설하면 요코야마 히데오와 같이 사사키 조가 언급되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경험치가 상당한 작가답게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경찰의 여러 모습을 드라마 속 여러 에피소드에 적절히 녹여냈는데 일부 극적인 장면을 제외하면 현실적이기가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실 추리소설보다는 역사 소설의 느낌이 더 강했고 작중 등장하는 범죄와 미스터리가 전체 분량에 비해 비중있게 드러나는 편은 아니라서 상대적으로 결말의 임팩트가 두드러지지 못한 감이 있었다. 이는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었을 때도 느낀 부분인데 작가의 스타일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넘어갔다. 강렬한 범죄나 해결을 그리기 보단 일상 속에서의 자연스러운 개입과 해결을 그리는데 임팩트는 약해도 전체 이야기 흐름은 탄탄해지는... 실로 드라마를 중시하는 작풍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신파로 유명한 요코야마 히데오나 여타 사회파 추리소설과도 다른, 사사키 조라는 작가만의 드라마 구축법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읽는 사람에 따라 밋밋하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어쨌든 분량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선 굵은 이야기가 확실히 전달되는 작품이었다. 추리소설을 기대했다가는 당연히 실망할 테고 화끈한 경찰소설을 기대해도 역시 실망할 수 있지만 그 나름의 기승전결과 흐름을 갖고 있어서 특유의 읽는 맛이 살아 있었다. 주인공이 2번이나 교체되지만 자연스럽고 질리지 않으며 무엇보다 전대의 유지를 이어나간다는, 이른바 '경관의 혈통'을 분명히 엿볼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던 작품이었다.

아니, 경관이 하는 일에 회색지대란 없다. 약간의 정의, 약간의 악행, 그런 일은 없어.

우리 경관은 경계에 있다. 흑과 백, 어느 쪽도 아닌 경계 위에 서 있어.

우리가 하는 일을 시민이 지지하는 한, 우리는 그 경계 위에 서 있을 수 있어. 어리석은 짓을 하면 세상은 우리를 검은색 쪽으로 떠밀지. - 6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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