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틸다 (양장) - 로알드 달 베스트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김난령 옮김 / 시공주니어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9.7






 즐겨보는 <비정상회담>이란 프로그램에서 '부모님과 정치 얘기를 한다?'라는 의제가 나온 적이 있다. 대부분의 출연자들은 정치 얘기를 해야한다고 손을 들었다. 자신의 입장을 결정하기에 앞서 대화를 통해 다양한 입장의 이야기를 들어야한다는 게 주장의 근거였고 덧붙여서 가족끼리 정치 얘기를 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지만 우리 부모님과 조부모님이 정치를 주제로 숱하게 언성을 높이신 걸 본 터라 어딘지 모범적으로만 들리는 얘기였다.

 그때 캐나다인인 기욤은 자신은 부모와 정치 얘기를 의식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서두를 풀었다. 부모와의 대화는 분명 세뇌당할 여지가 있는데, 분명한 건 윗세대는 돌이켜 보면 항상 '틀려왔고' - 여성, 흑인, 동성애자, 아동, 장애인, 왼손잡이... 이들이 추잡한 편견과 근거도 없는 미신에 희생당했다는 걸 부정해선 안 된다. 지적하는 건 별개의 얘기지만. -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선 보다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윗세대한테 세뇌당해선 안 된다는 게 주장의 내용이었다.


 나는 여기서 기욤이 확실히 외국인인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기욤은 이제 캐나다보다 한국에서 산 지 더 오래됐다고 하고 한국말도 유창하지만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외국인이 따로 없다. 장유유서를 기본 원칙으로 삼는 우리나라에서 저 정도로 윗세대를 시원하게 비판하는 말은 좀처럼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극단적인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가 묵인해왔던 세대 갈등의 핵심을 제대로 꼬집어서 속으로 굉장히 뜨끔했다. 난 왜 기욤보다 일찍 저런 말을 하지 못했던 걸까. 이러니 말 잘하는 사람이 부럽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실 모든 어른이 다 존경할 만한 위인이진 않다. 아직 20대인 나보다도 무식하고 어리석고 열등한 어른을 지위 막론하고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내게 한 번도 모범을 보인 적 없으면서 나이만 많다고 무턱대고 존경받으리라 기대하는 어처구니 없는 어른도, 정말 나이 빼곤 내세울 게 없는 어른을 우리는 적잖이 마주친다. 구태여 말로 꺼내지 않았을 뿐, 분명하게 느꼈던 것이리라.


 로알드 달의 <마틸다>는 이번이 두 번째로 읽은 것인데 다시 읽으니 상당히 무시무시한 작품이구나 싶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동인 마틸다가 하필 최악의 부모 밑에서 나고 자란 것도 모자라 기껏 입학한 학교의 교장이 희대의 사이코이자 아동학대범이라는 설정이 동화틱하게 그려져 수위가 조절된 게 일단 눈에 띈다. 어렸을 적에 읽었을 땐 마틸다의 응징에 통쾌함을 느꼈다면 지금은 마틸다가 용한 나머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천박한 부모에게 물들지 않고 교장에게 기죽지 않은 것은 어떻게 보면 마틸다의 놀라운 재능에서 기인된 것이겠지만 어른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은 마틸다가 그렇게 장하고 부러울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로알드 달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인데 오랜만에 읽어도 유치하지 않았고 이전보다 많은 부분이 와 닿아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작중에서 마틸다는 순전히 개인적인 목적으로 어른을 응징하는데 그게 어린애답게 치기 어린 부분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이 일련의 사단이 근본적으로 어린이, 이른바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하대하는 못된 어른의 막무가내식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일말의 동정심이나 거부감이 일진 않았다. 오히려 못된 어른을 정면에서 부정할 수 있는 사고를 길러주기에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동화라는 생각까지 든다.


 나는 아직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더 많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들 아래에 있는 내가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면 착잡해지곤 하는데 이 책을 읽으니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못난 어른이 감히 내 위에 있으려고 한다면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며, 마치 마틸다처럼 '방도'를 모색하는 현명함을 갖춰야겠다고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부터라도 정당한 반항심을 기르자.

 영화화도 됐다는데 그것도 챙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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