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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내가 죽은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영미 옮김 / 창해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8.8
나를 비로소 독서에 흥미를 가지게 만들어 준 작가는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다. 거의 반년 내내 이 작가의 작품만 읽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별로 찾진 않는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렇게 완벽한 스토리 텔러가 아님을 깨닫기도 했고 무엇보다 다른 작가의 새로운 매력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해가 흘렀고 여러 작품을 접했지만 - 앞으로 더 접해야 할 것이고 그 사실이 못내 설렌다. - 히가시노 게이고가 가진 '어떤 센스'에 대해선 여전히 회자되곤 한다.
우리나라 서점가에서 거의 흥행을 보증하는 수표가 된 일본 추리소설가 두 명이 있다. 미야베 미유키와 히가시노 게이고, 흔히 이 둘을 꼽는데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이만한 위치에 올리게 만든 요소 중 제목 짓는 센스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가독성 빼곤 내세울 것 없는 문장이라며 비판받는 그지만 제목에 있어서는 혀를 내두를 만하다. <용의자 X의 헌신>, <성녀의 구제>, <명탐정의 규칙> 등 여러 작품이 읽고나서 더욱 감탄하는 제목들인데 그 중 이번 작품의 제목이 가장 탁월하다고 본다.
옛날에 내가 죽은 집. 도대체 뭔 말인가 싶은 의미심장한 제목인데 생각하면 할수록 잘 지은 제목이 아닌가 싶다. 제법 문학적이기까지 한데 작품의 반전을 부족함 없이 표현했으며 사실 거의 대놓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번이 두 번째 읽는 것이고 무려 8년 만에 다시 읽었지만 여전히 감탄스런 제목이다.
나는 어떤 소설이건 영화건 무엇이건 제목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제목은 깊은 우물 속에 들어갈 때 독자들이 지지해야 할 밧줄과 같은 것으로 작품 감상에 있어서 견고한 토대가 되어 이해를 도와야 한다. 작품 감상의 시작이자 끝을 장식하는 것이 바로 제목으로 특히 제목이 잘 지어졌을 때 우리는 한껏 소름이 돋게 된다. 이 제목이 그런 의미였어?! 하면서.
어렸을 때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그 이전의 기억이 없는 여자, 그녀에게서 사라진 기억의 실마릴 찾도록 도움을 요청 받는 주인공. 이 둘이 동행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단서를 찾아 어느 외진 곳의 저택을 방문하는 둘은 그녀의 아주 어렴풋한 기억과 이 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한 소년의 일기와 마주하게 된다.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일기장이 넘어갈 동안 진행되는 기억 찾기는 예상 밖의 국면을 맞게 되는데...
이미 과거에 벌어진 일을 헤집는 내용에, 또 저택을 뒤지며 돌아다니다가 일기를 읽는 등 전체적으로 정적이고 긴박감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점차 꼬리를 드러내는 오싹함은 물론이고 추리소설다운 복선과 반전도 구축해 읽을수록 빠져든다. 특히 인간에게 있어 기억이 어째서 필요한 것인가 역설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기억을 잃은 사람들이 기억을 찾고자 하는 이야기가 솔직히 접할 때마다 와 닿지 않았는데 이 작품에선 그 의문을 아동 학대 같은 사회적 문제와 결부하여 풀어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시 읽으니 예전처럼 몰입감이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뒤로 갈수록 힘이 붙어 여지없이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그때는 오히려 결말이 심심하다고 느꼈었는데 다시 보니 절도 있게 마무리 지은 것 같아 작가를 다시 보게 됐다. 이 작품은 작가에게 있어 그다지 잘 안 풀리던 시절, 이것저것 시도해 볼 때 나온 작품인데 실험작 같긴 해도 이런 작품이 하나씩 하나씩 자양분이 되어 오늘날의 작가를 만든 것이라 본다. 놓쳐서는 안 될 작가의 초기작임엔 분명하다.
어쩌면 나 역시 낡은 그 집에 죽어 있는 건 아닐까. 어린 시절에 죽은 내가. 그 집에서 줄곧 내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누구에게나 ‘옛날에 자신이 죽은 집‘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곳에 누워 있을 게 분명한 자신의 사체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모른 척한 것일 뿐. - 3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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