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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동물원 ㅣ 세미콜론 코믹스
다니구치 지로 글.그림, 오주원 옮김 / 세미콜론 / 2014년 2월
평점 :
8.6
얼마 전 별세하신 일본 만화계의 거장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을 읽었다. 그의 작품이라곤 달랑 <선생님의 가방> 밖에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 작품이 너무 괜찮아서 앞으로 많이 찾아 읽으려 했건만... 거장의 신작은 더 이상 만나볼 수 없게 됐지만 평생의 작품들로 이 아쉬움을 달래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번에 읽은 이 작품은 상당히 의의가 있는 작품이었다. 돗토리에서 태어나 양복 재단사의 아들로 살다 교토의 직물 도매상에 취직한 뒤 이윽고 도쿄로 상경해 만화가로 데뷔했다는 작가의 인생을 재구성한 내용이다. 실로 자전적인 이 작품은 내용은 소소하지만 작가의 정수라 불리는 섬세한 감정선과 푸근한 그림체가 어우러져 꽤나 빛을 발한다.
난 만화를 스토리 위주로 감상하는 편이라 그림에 관해서는 좋다, 나쁘다 밖에 말할 줄 모르는 문외한이다. 그럼에도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체가 가히 예술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다. 언뜻 보면 심심하고 기교를 부리는 것도 아니라 평균치의 작화라고 여길 수도 있다. 내가 작가의 다른 작품을 아직 읽어보진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마냥 드라마 중심의 작품만 있는 게 아닌 걸 보면 순전히 작풍에 따라 그림체를 변화시킬 줄 아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이는 차차 확인해야 할 부분이지만 작중에 등장한 짤막짤막한 만화 원고 속 그림이 어시의 작품이 아니라고 한다면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리라.
어느 정도 손길을 거쳐 작품으로 재탄생됐는지 모르겠지만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이 작품은 '만화적이다'라는 관용구가 무색하리만큼 격조가 있었다. 다소 격조가 있는 만큼 어렵거나 할 법 한데 실상 읽을 때는 또 술술 읽힌다. 모든 단편이 이야기적 얼개에 딱 들어맞는 그런 극적인 쾌감은 덜한 편이다. 대신 주인공이 겪게 되는 감정의 편린, 이를테면 풋내기 같은 사랑, 열병, 방황, 시기, 불편함 등이 클리셰랄 것도 없이 제법 현실적으로 다가와 만족감이 컸다. 잔잔한 나머지 되려 신선한 느낌이라 하면 될까?
솔직히 말하면 작품이 기대에 살짝 미치지 못했지만 잔잔함만으로 이렇게 묘사할 수 있다니 다른 작품은 뭔들 재미가 없을까 싶었다. <선생님의 가방> 같이 소설 원작의 작품도 다수 있으니 앞으로 찾아 읽게 될 날들이 사뭇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