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라의 돼지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9.8






 한창 일드에 빠졌을 때 찾아본 작품 중 하나인 '트릭' 시리즈가 생각난다. 아베 히로시, 나카마 유키에 주연의 그 드라마 시리즈는 캐릭터 매력도 다분하고 개그나 분위기도 괜찮아서 적잖이 빠져드는 구석이 있는 드라마였다. 하지만 에피소드가 하나씩 끝날 때마다 제목처럼 트릭을, 아니면 그밖에 다른 부분에서 깊이를 더하면 정말 최고의 작품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늘 남는 드라마이기도 했다. 이런 게 바로 TV 드라마의 한계라고 제멋대로 주억거린 기억이 난다.

 <오늘 밤 모든 바에서>와 <인체 모형의 밤>의 저자 나카지마 라모의 대표작인 <가다라의 돼지>는 내가 '트릭' 시리즈에서 느낀 아쉬움을 완벽하게 보완하는 작품이었다. 그 아쉬움을 정말 기대 이상으로, 아니 필요 이상으로 보완했다고 볼 수 있는데 정말이지 저자의 기이함이 모두 집약된 최고의 작품이었다. 항상 그렇듯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작품치곤 하나도 추리소설 같지 않았지만 - 이 상은 정말 추리소설가가 썼다면 어떤 작품이든 주는 것 같다. 매 수상작들이 재밌으니까 그냥 넘어가지만... - 끝나는 게 아쉬운 몰입감을 자랑했다. 700쪽이 넘는 소설이 그러기란 쉽지 않은데... 좀 더 길게 써주지.


 보아하니 일본에선 1부, 2부, 3부를 각각 나눠서 출간했던데 그렇게 나누는 게 좋을 만큼 각 파트별 작풍이 제각각이었다. 한 작품을 읽으면서 이렇게 방대함과 다양성을 느껴본 적도 없는데 다시 말하지만 정말 나카지마 라모다웠다. 적는 게 못다 귀찮을 정도로 살아 생전 기이한 행적을 펼친 작가답게 작품도 만만찮았다. 번역자 후기에서도 얘기가 나왔지만 정말 번역하는데 고생했을 것 같다. 성서나 불교 등의 종교 용어에다가 스와힐리어, 아프리카 주술, 케냐 여행기 등 일반적으로 쉬이 다룰 법한 내용이 거의 전무해서 읽는 입장에서는 흥미로웠지만 역자 입장에선 곤혹스러웠을 듯하다. 비슷한 작풍의 작가로 꼽히는 교고쿠 나츠히코도 같은 이유로 작품 번역이 더딘 걸로 알고 있는데 정말 번역가들이 존경스러워졌다.

 주인공인 오우베와 그의 가족들, 지인들이 일본과 아프리카에서 겪는 기이한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 여정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트릭을 쓰는 사이비 교주와 한 판 붙고 아프리카의 대주술사와 거나하게 몇 판 붙는 내용이다. 근본은 엔터테인먼트 소설이지만 작품을 지탱하는 뼈대와 살들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차서 그야말로 읽는 맛이 넘쳐났다. 신비한 마술의 세계와 마술의 위험성을, 그리고 앞서 제시한 세계관을 작가 자신이 뒤엎는 주술의 향연, 아프리카 견문록, 무술 대결, 호러와 액션으로 마구 점철된 만큼 읽는 보람이 있을 정도였다.


 개성 강한 캐릭터들의 등장도 작품 몰입의 한 축을 담당했다. 딸을 잃은 아픔을 알코올로 푸는 민속학자 오우베의 서글프리만큼 웃긴 내면에서부터 그의 아내 이쓰미의 방황, 대련에 눈을 뜬 조수 도만, 통과 의례를 통해 의젓해진 초능력자 기요카와와 오우베의 아들 오사무, 트릭으로 사기를 치는 이를 고발하는 미스터 미러클이나 자유분방한 성姓 편력을 자랑하는 루이 선생, 아프리카 여정의 가이드인 무앙기나 악덕 프로듀서 마가이, 그리고 바키리... 각각의 캐릭터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그들의 활약을 기대하는 맛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캐릭터를 '해리포터' 시리즈처럼 다루는 면이 있어 - 두 작품을 읽은 분은 이해하시리라... - 시원섭섭한 부분도 있었지만 세계관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살아있는' 느낌으로 잘 빚어내지 않았나 싶다.

 워낙에 즐길 요소도 많고 순수한 엔터테인먼트를 지향하는 것치곤 시사하는 부분 또한 많아서 바로 다시 읽고 싶은 작품이었다. 그리고 긴 작품의 공통점 중 하나인 완독의 뿌듯함도 안겨주는 등 끝맛도 상당히 좋았던 작품이었다. 비록 내제한 세계관과 분량, 기대됐던 재미를 온전히 다 끌어내지는 못해 아쉽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이야기일 뿐, 그럼에도 읽기 전에 기대했던 그 이상을 이미 보여줬기에 아주 기분 좋게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이제 국내에 출간된 작가의 작품을 거의 다 읽었는데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솔직히 작품이 더 출간될 가망이 없어 보이는데...

사람은 각자 잘하는 게 있다고는 하지만, 정말이지 학자는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는 거야. - 32p




마술사는 서커스 천막에서 나와서는 안 됩니다. 밖에는 돈이 지천으로 뒹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건처럼요. 마술사는 마술사라는 자신의 간판을 떼기만 하면 성인, 영매, 예언자, 초능력자...... 뭐든 될 수 있지요. - 1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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