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의 꿀
렌조 미키히코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8.5






 무심코 읽었을 땐 알아차리지 못했다. 예쁜 표지나 띠지에 적힌 출판사의 화려한 선전 문구, 그리고 작가의 이름에 혹해서 집은 책이다. 제목이 '조화로운 꿀'을 의미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조화造花였다. 가짜 꽃의 꿀이라니. 그 모순된 의미만으로도 구미가 당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난 잘 모르는데 일본 추리소설계의 거장들 중에는 색다른 별명을 가진 작가가 있다고 한다. 작중에 토막 시체가 많이 등장하는 시마다 소지의 경우엔 '토막의 시마다'라는 별명이, 그리고 이번에 읽은 작품의 저자인 렌조 미키히코는 유괴를 작품 속에 자주 다뤄서 '유괴의 렌조'라고 불리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재밌는 별명이 붙은 경위가, 그러니까 그 정도의 별명이 붙을 만큼의 '전문성'이 내심 궁금했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유괴를 다룬 추리소설이라 하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게임의 이름은 유괴>나 요코야마 히데오의 <64>가 당장 떠오르는데, 유괴라는 설정도 수많은 작가에 의해 다양한 변주를 일으키며 획기적이면서도 천인공노할 방식으로 작중에 등장해왔다. 하지만 시작과 끝이 비교적 비슷한 경향이 있어서 이번 작품도 솔직히 대단히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이건 정말이지 유일무이의 유괴극이지 않나 하며 감탄하며 읽게 됐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돌아가신 작가한테는 약간 죄송한 말일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연식이 차서 그런지 유괴극을 둘러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비극과 추태, 범인의 이미지 같은 것이 어딘가 고루한 감이 있어서 실망스러웠던 것은 있다. 범인의 노림수는 추리소설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매우 신선했고 놀라움을 안겨주기도 해 재밌었지만 그 정체에 한해서는 어째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어서 괜히 민망해질 정도였다.


 그 외에도 아이를 유괴당한 가족이 안고 있던 어두운 비밀이라든지 그것이 드러나는 과정과 인물들의 심리 묘사도 식상한 경향이 있었다. 작가의 작품은 <백광> 밖에 읽지 못했는데 그 작품과 느낌이 상당히 비슷했지만 10년 가까이 차이 나는 두 작품 간의 출판 시기 동안에 작가에게 무슨 일이(매너리즘인가) 생겼는지 이번엔 그렇게 통찰력 있다거나 감성적인 부분이 달렸었다. 어쩌면 이는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인해 몰입감이 저해되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드라마적인 요소가 아니더라도 이 작품의 유괴극만은 정독할 가치가 있다. 자신은 유괴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돈은 필요없지만 준다고 한다면 받겠으니 아이를 먼저 돌려받으면 그 다음에 돈을 주라는 등 일반적인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밀고 당기기'가 그야말로 대박이었기 때문이다. 액수를 부르니까 너무 많다면서 반을 줄이고 보통 돈을 받고 아이를 주는데 그 반대로 하자고 거듭 강조하는 식의 믿을 수 없을 만큼 평화주의적인 범인의 언동에 아이의 가족은 물론이고 유괴 사건의 전문 수사원들과 그걸 읽는 나까지도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그런 태도를 취함으로 인해 범인이 무얼 노리는지 궁금해서 계속 읽을 수밖에 없는 몰입도나 그 뒤편에 도사렸던 범죄의 저의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에 아낌없이 박수를 치게 되는 소설이었다. 막판에 100페이지에 걸쳐 사족을 펼쳐서 흥이 급격히 떨어지긴 했어도 당분간 이런 유괴극은 잊혀지지 못할 것 같다. 최근 읽는 추리소설들은 트릭적인 면보다는 드라마적인 부분에 더 감탄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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