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인간
심포 유이치 지음, 김난주 옮김 / 들녘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9.3



 

 요번에 여행 갔을 때 읽은 책이다. 큰 부담없이 읽힐 무난한 감성 소설인 줄로만 알고 읽은 책인데 생각 이상으로 빠져들었던 작품이다. 제목의 저 '기적의 인간'이란 수식어가 괜히 남사스러운, 묘하게 오글거림을 동반하면서도 작중에서 딱히 시사하는 바도 없었던 건 아쉬웠는데 그것만 빼면 전반적으로 빼어난 수작이었다.

 교통 사고로 인해 완전히 새로 태어난 가쓰미는 '기적의 인간'이란 수식어로 불린다. 뇌사 판정을 받은 그가 아무리 잘 돼도 식물인간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했는데 수술 후 단기간에 회복되는 놀라운 생명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단, 이전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진 채...


 이야기는 새로운 인격의 아들의 쾌유를 비는 어머니의 글로 서막을 연다. 병으로 어머닐 잃고 홀로 살아가는 처지에 놓인 주인공이 8년의 입원 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나간다. 생물학적 나이로는 서른이 됐지만 교통사고로 인해 인생을 리셋해서 8살 정도의 경험밖에 없는데 무사히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서 말이다. 그 불안감을 과거라는 이름의 뿌리가 없는 자신에게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 떨쳐내고자 했던 주인공은 집안을 조사하던 중에 의문점이 하나 둘 등장하고 이야기는 겉잡을 수 없는 미궁 속으로 초대된다.

 기억을 잃은 인간의 방황은 그리 낯선 소재가 아니다. '본' 시리즈부터 해서 여러 이야기에서 앞다투어 다루는 소재인데 항상 비슷한 감정선을 다루는 것 같다. 나는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어서 크게 와닿지 않지만 기억이 사라진 사람은 그 자체만으로도 심히 불안한지 그들이 주인공인 이야기에 강한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비록 그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것처럼 중요한 사안이겠지만 지켜보는 우리 입장에선 이보다 더한 추적극이 또 없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추적하는 것만큼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 또한 없는 것 같다.


 과연 그래서 특출난 이야기 구조이진 않았더라도 이 작품이 빠져들며 읽힌 것 같다. 후에 밝혀진 주인공의 과거는 여지없이 범상치 않은 것이었고 그에 얽힌 다양한 인물들의 반응도 예상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소재 자체가 그리 일상적인 소재가 아니다 보니까 작가의 개성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깊이에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심포 유이치... <탈취>, <추신>, 그리고 이번에 3번째로 만나는데 그렇게 익숙한 작가는 아니다. 희한하게 대표작이라는 <탈취>는 그저 그랬는데 대표작까지는 아닌 것 같은 작품은 기가 막히게 재밌다. 인간의 서글프고 쓸쓸한 감정이 드러나는 드라마를 그리는 데엔 확실히 일가견이 있는 듯하다. 그 누구보다 잘 쓴다기 보단 그 누구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는 흡입력을 자랑한다. 본 작품에서도 기억을 잃은 주인공의 처음엔 조심스러운 접근과 충동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후반부로의 진행이 결코 급작스럽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일련의 내면의 변화의 전개가 소름 끼치도록 자연스러웠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뒤로 갈 수록 고조되는 서스펜스와 내막이 드러나면서 동반되는 쾌감도 안정적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그야말로 '묻혀진 수작' 외의 수식어는 떠오르지 않는데 캐릭터 조형에 20년 전의 작품 다운 옛날스러움이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하나 거슬림 없는 휴머니즘이 녹녹히 녹아있어 마지막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의 마지막 방황과 뒤따르는 감정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기만 하다.


p.s 미야자키에 여행 가고 싶었는데 미야자키가 배경이라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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