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즈키 린타로의 모험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16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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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꼭 저자 자신의 이름(필명이긴 해도)을 내걸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노리즈키 린타로의 작품은 하나 하나 남다르게 묵직하다. 자신의 필명과 동명의 탐정을 쓰는 저자로 엘러리 퀸, 아리스가와 아리스, 그리고 노리즈키 린타로가 꼽히는데, 엘러리 퀸은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많이 읽지 않아서 그런지 그렇게 잘 쓴다는 느낌을 못 받았고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경우에는 왕성한 작품 활동과 명성에 비해 작품별 재미의 편차가 극심한 편에 속한다. 어디까지나 국내에 소개된 작품에 한해서 하는 말인데, 말을 정정해서 미안하지만 그러고보니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탐정이 아닌 조수역에 그쳐서 자기 이름을 내거는 느낌이 덜하기도 한다.

 반면 '고뇌하는 작가'로 불리는 노리즈키 린타로는 이명에 걸맞게 과작을 하는 작가군에 들어가고 꼭 과작이라서 그런 건 아니지만 여느 신본격파 추리소설가 중에서도 돋보이는 필력과 구성을 자랑한다. 한때 열광했었던 우타노 쇼고는 대표작이 다 출간됐는지 이제 좀 시들어지고 만 와중이었는데 참 다행이다. 우리에겐 아직 노리즈키 린타로가 있으니 말이다.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작품이 많은데 기대가 안 될 수가 없다.


 이 책은 단편집이다. 제목은 셜혹 홈즈의 그것을 오마주한 것이다. 단편으로 정평이 났다는 얘기가 무색하게 국내에는 장편만 계속 출간되어 단편의 실체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노리즈키 린타로의 단편이란 어떨까? 초판 한정으로 탐정 퀴즈 노트도 증정한다기에 재빠르게 사서 읽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말 재밌게 읽었다. 원래도 팬이었지만 아주 광팬이 되고 말았다. 추리소설이 줄 수 있는 재미를 두루 갖춘 걸작 단편집으로 최고의 미덕을 꼽자면 재미의 빈부격차가 없다는 점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기준에 한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아무튼 너무나 매력적인 단편집이었다.


'사형수 퍼즐'

 사형수의 의문의 죽음을 다룬 중편이다. 잊을만 하면 거론되는 사형 제도의 딜레마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구조, 노리즈키 린타로의 재빠르면서 논리적인 추리와 추리소설에서 과연 어느 정도의 비극이 허용되는지를 시험하는 듯한 진상이 더없이 인상적이었다. 동기가 참 밑도 끝도 없다는 생각은 들지만 고풍스런 작가의 문체가 나의 당황을 달래주는 등 작가의 패기와 역량이 돋보인 수작이다.


'상복의 집'

 직전에 읽은 단편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런 우리를 우롱하듯 한층 더 강력한 동기를 내거는 작품이다. 내성이 생겼다고 방심한 순간에 비집고 들어와 한껏 씁쓸함을 안겨준다.


'카니발리즘 소론'

 통상적인 추리소설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띄는 작품으로 엽기적인 진상과 그를 추론하는 과정에 튀어나오는 현학적인 대화가 무엇보다 일품이었다. 세상엔 우리가 이해하기엔 너무 넓구나 하고 새삼 아연하게 만들기도 했다. 식인이 원체 역겨운 것이지만 이 작품에서보다 더 역겹(고도 엽기적이)게 다뤄질 수 있을까?


'도서관의 잭 더 리퍼'

 이 작품은 시리즈 속의 시리즈인 '도서관 탐정' 시리즈의 시발점이다. 본격과 하드보일드, SF, 사회파도 다룬 노리즈키 린타로의 일상 추리소설 연작으로 책 좋아하는 사람치곤 이 시리즈를 싫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내가 지금 이 연작을 읽는 게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질 정도로 즐거웠고 특히 이 단편같은 경우엔 책에 대한 애정과 예의범절을 지킨다면 폭풍 공감할 동기가 들어있어 아주 재밌었다.


'녹색 문은 위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트릭도 좋았지만 여주인공이 매력적이어서 더 인상적인 작품이다. 캐릭터의 매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일상 추리소설의 기본기를 구사함에 조금의 어색함이 없다니 반칙 아닌가?


'토요일의 책'

 작가가 속한 일본 추리소설 출판계를 배경으로 한 수준급의 일상 추리소설이었다. 알 사람은 다 알 만한 각종 패러디가 난무해 한바탕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는 등 멀리 '비극 3부작'을 찾을 것도 없이 요 앞에 '사형수 퍼즐'을 쓴 그 작가가 맞나 싶을 만큼 놀라운 변화다. 특정 수식어로 한 명의 소설가를 예단하는 것만큼 의미없는 일도 없다고 절감했다.


'지난 날의 장미는....'

 마지막 작품이라 느껴지는 아쉬움을 완벽히 달래주는 작품. 일상 속 기묘한 수수께끼에 얽힌 감정선과 그 해석에 있어 이다지도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작품도 또 없던 것 같다.


작가 후기

 30페이지 이상이 되는 작가 후기였는데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자세에 감탄해서 감상을 적고자 한다. 다소 사소하게 보일 수 있고 대충 끝맺을 수 있는 문제를 작중의 노리즈키 린타로처럼 끈질기게 추적하여 착실히 내면화하는 작가의 진지함을 읽노라면 어쩌면 이 작가의 작품을 동시대에 읽는 것은 축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되풀이되는 민감한 이슈를 알게 된 것도 고맙기도 했고 작가 개인의 양심도 느낄 수 있는 등(독자로선 아쉽지만) 정말 명품 해설이었다.


 다음에 출간될 노리즈키 린타로의 작품은 무엇일까? 작가 말마따나 '도서관 탐정' 연작은 다신 못 볼 것 같지만 이쯤 되니 뭐가 됐든 아무 작품이나 빨리 나오기나 하라는 심정이다.


p.s 탐정 퀴즈... 풀어봤는데, 내가 이렇게 재능이 없을 줄은 몰랐다. 결과는 절대 노코멘트할 것인데, 정말 만감이 다 교차했다.

이 이야기의 목적은 하나의 우화, 즉 `인간은 비극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란 물음에 우화적인 고찰을 제시하는 것, 오직 그뿐이다. - 9p




국가는 `나`를 살인자로 만들지 않을 의무가 있다. - 77p




법이 힘의 논리에 지배된다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이 비좁은 방에서는 국가나 법제도 같은 것은 어차피 하나의 픽션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는 사형수를 교수대에 매달 팔이 없고, 법은 집행 버튼을 누를 손가락이 없죠. 그러한 개념은 우리의 양심을 지킬 얇디얇은 방패 역할을 할 뿐입니다. 사형을 집행하는 건 늘 우리 몫이니까요. - 81p




출세해서 젋은 애들한테 설교나 늘어놓게 되면 끝장이지. - 162p




탐정소설 같은 건 뇌가 말캉한 기회주의자들이나 읽는 거야. 저급한 트로트하고 마찬가지지.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멜로디와 가사를 꿰맞춰서 만든 거라고. 한없는 개정판과 끝없는 공급의 반복이지. - 211p




그레이엄 그린의 말대로 연민은 애정과 가장 거리가 먼 감정이지. 그리고 증오보다 훨씬 질이 나빠. - 240p




아니면 당신 장기인 비밀 통로를 꺼내려고?

허.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그건 금기라고. - 316p




이것도 그냥 내 추측일 뿐이지만, 만일 자네가 어느 날 갑자기 시력을 잃어서 내일부터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면 어쩔 텐가?

절망한 나머지 실성할지도 모르겠군요.

상상도 하기 싫어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예요.

나도 그렇네. 책을 못 읽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어. - 412~4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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