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영국 - 노동자 계층 출신 잉글랜드인이 이야기하는 영국 지구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피터 빈트.홍성광 지음 / 틈새책방 / 2025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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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영국의 많은 문제와 마찬가지로 영국인이라는 정체성 자체도 모호하다. 어쩌면 진정한 영국성이란 바로 그 '모호함'일지도 모른다. - 91~92p

포르투갈에서 생활할 적에 낙이라곤 축구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튜브로 축구 관련 영상을 많이도 봤고, 자연스레 이 책의 저자 피터가 패널로 출연한 영상도 자주 접하게 됐다. 그런데 가끔 어떤 영상에서 피터는 본인이 집필한 책을 홍보하곤 하던데 어떤 내용일지 관심이 가서 귀국한 뒤에 찾아 읽게 됐다. 과연 축구를 얘기하지 않는 피터는 사람들의 평대로 신사일는지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내 경험상 방송에서 말주변이 뛰어난 사람치고 글솜씨도 뛰어난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는데 피터는 예외였다. 엄밀히 말해 <지극히 사적인 영국>은 피터 빈트와 홍성광이 공동으로 저자로 참여한 결과물이지만 내용은 피터가, 한국어 검수는 홍성광 씨가 주로 담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축구 얘기 없이도 피터가 풀어내는 영국 이야기는 기대 이상으로 흥미롭게 읽혔다. 혼혈의 시점으로, 또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의 시점으로 바라본 영국은 피터가 보기에도 요상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솔직히 토로하고 있어 전반적으로 그의 말이 신빙성 있게 다가왔다.

책을 읽는 내내 정말 영국은 종잡을 수 없는 나라라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하나의 나라지만 4개의 나라로 이뤄진 연합국이기도 하고, 의외로 풍부한 식문화가 있었음에도 '사람은 자동차고 음식은 연료일 뿐이니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여부가 우선이다'라는 사고방식이라든가, 정치가 됐든 인프라가 됐든 지금 이대로는 답이 없다 싶은 지점에 이르면 모든 것을 확 바꾸지만 그때까진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티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는 것 등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애매모호하고 요상한 점투성이다.

읽다 보면 영국은 우리가 선망하는 것만큼 선진국이지도 않고 신사의 나라라는 호칭과도 전혀 맞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과거의 영광에 얽매인 채 버티고 있는 것이 고작인 나라라는 인상만 강해졌다. 딱 내가 포르투갈에서 사는 동안 받은 느낌이 딱 이랬다. 물론 영국과 포르투갈은 위상이며 체급이 천양지차이지만 결국 영국도 어쩔 수 없는 유럽의 한 국가구나 싶었다.

자신들은 유럽이 아니라며 브렉시트까지 한 나라지만 결국 갖고 있는 정서와 현재 만연한 사회문제가 딱 전형적인 유럽의 한 국가다. 스스로 유럽 이상의 국가라 여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것과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근거들이 어떤 것인지도 알겠으나, 현실을 인정해야 유럽과 연계하여 본인들 앞에 닥쳐있는 위기들을 타개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쓴소리를 하게 되는 대목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경악스러운 부분은 이 나라의 역사 교육의 처참한 실태였다. 섬나라 특징인가... 이 부분은 일본과 판박이더라. 좋은 대학까지 나온 가방끈 긴 피터가 <벌거벗은 세계사>에 출연하기 전까지 아편전쟁이 어떻게 벌어진 전쟁인지, 홍콩이 왜 중국으로 반환됐는지 몰랐다는 것에선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피터가 느꼈던 씁쓸함, 당혹감과 부채감이 글 속에 잘 드러났는데, 그러면서도 영국인으로서의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해 그가 보기 보다 강인한 사람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기 나라를 찬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단 말이 괜히 있겠는가. 하지만 자기 나라의 만행을 알게 된 다음에도 여전히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그 마음을 책에 쓰는 것은 강인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물론 피터가 책에서 영국이 저지른 모든 만행을 지지하거나 오리발을 내밀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냉정하게 얘기해서 세계에 이름을 날리고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나라 중에 다른 나라한테 민폐를 끼친 나라는 영국만 있는 것이 아니다. 침략, 학살, 전쟁, 흑역사 은폐 등 털어서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을 나라는 없다. 당장 우리나라도 베트남 전쟁 때 파병을 보냈다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니 원.

우리 모두 그 나물에 그 반찬이라는 얘길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계사에서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영국을 찍으면 대충 맞는다'는 말을 정작 영국인인 본인만 몰랐다가 <벌거벗은 세계사> 출연이나 다른 외국인과의 대화를 통해 그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을 깨달았다는 피터한텐 동정심이 갔다. 자기가 사랑하는 조국이 엉망진창이고 악질임을 직시했을 때의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가늠도 안 된다. 단지 영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건 도대체 어떤 느낌일는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최근 친일파인 증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밝혀져 후폭풍을 맞은 연예인도 이런 심정이었으려나.

그런데 그 연예인과 피터가 다른 점이라면 바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일 것이다. 그 연예인은 괜히 집안 자랑하다가 이 사달이 난 것이 탐탁찮은지 자필 사과문이나 후속 대처가 어딘지 틀에 박혀있고 수상하기 짝이 없는 반면 피터는 수많은 뻘짓을 질리지도 않고 저지르는 조국의 실체를 정면에서 인정다. 그것이 넘어설 수 없는 영국이란 나라의 본성인들,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나라라과 한들 조국의 과오를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보통은 이런 상황을 도피하려고 하거나 상대와 기싸움을 벌이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인 지라 피터의 모습은 정말이지 신사답게 보였다.

한편 피터의 가치관이나 얘길 풀어나가는 태도가 신사답다고 해서 그가 하는 말이 전부 와 닿는 것은 아니었다. 인도만큼은 아니지만 엄연히 계층이 존재한다는 영국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노동자 계층 출신이고 그에 따른 제약이 분명히 존재하는 나라임에도 자신이 노동자 계층임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피터의 발언은 솔직히 말해 현실을 외면하는 자기합리화처럼 들렸다. 애당초 한국인으로서 넘나들 수 없는 계층이란 개념부터가 와 닿지 않았으니 그의 자부심이 이해될 리가 없다.

내가 제대로 읽은 것이 맞다면, 세상엔 도저히 내가 어쩌지 못할 일들이 산재한데 그 타고난 환경을 탓하거나 혹은 극복하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태도를, 나아가선 완벽한 삶이란 불가능하니 그런 삶을 지향하는 삶을 지양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얘기하면서도 이게 정말로 영국인의 국민성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영국은 살기 고단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 나라에서 나고 자라지 않는 이에겐 특히 고단할 것이다.

그런데 그건 영국만 그런 것은 아니다. 평생 익숙해진 언어, 문화, 환경을 떠나 전혀 다른 나라의 언어와 문화와 환경을 이해하고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환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이해한 척하고 거슬리는 부분이 있어도 참고 받아들이거나 상처 입은 내 마음을 홀로 추스르는 것이 상책이다.

슬프게도 이는 내가 포르투갈에서 포르투갈어 대신 더 잘 배우게 된 것들이다. 그래서 귀국할 때 섭섭하면서도 시원했던 것이리라. 한국에 돌아가면 적어도 익숙한 언어와 문화와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 때문에 나완 달리 타향살이를 오랫동안 하는 모든 사람을 존경하게 됐으며 피터도 마찬가지로 존경스러워졌다. 심지어 체류하고 있는 나라의 말로 책까지 내다니... 방송에서 축구 얘기할 땐 몰라뵀는데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편하고 흥미롭게 읽혔던 것과 달리 의외로 감상은 남기기가 쉽지 않았다. 감상을 남기기 쉽지 않다는 것은 다 피터의 진솔한 글이 내게 남긴 것이 적잖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쉽게 읽히지만 남는 것이 많은 글이 참 좋은 글이지 않나 싶다. 원래도 그의 팬이었지만 더욱 그의 팬이 됐고 앞으로도 방송을 자주 찾아볼 예정이다. 축구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때의 피터는 그야말로 신사라고 누가 그러던데, 그 말이 맞았다!


인상 깊은 구절

한국인들은 영국으로 여행을 와서도 우산을 꼭 챙기고 비가 오면 여행 일정이 망가질까 봐 걱정한다. 그걸 보면 너무 완벽하게 살려고 애쓰는 게 아닌가 싶다. - 2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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