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슬럼버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9.5


 아직까지도 팬들 사이에서 이사카 코타로의 대표작으로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골든 슬럼버>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초장부터 대부분의 전개를 다 알려주는 독특한 도입부와 과거와 현재로 시점이 자주 변경됨에도 집중을 유지하고 묘한 쾌감을 선사하는 연출의 도주극은 두 번째 읽어도 여전히 드라마틱하고 아련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야기를 만들 때 결말과 반전 못지않게 전개와 연출도 중요함을 아주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주인공 아오야기가 도움을 받는 방식과 사건 3개월 후에 아오야기가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무사 생존했음을 넌지시 알리는 연출이 특히 감명 깊었다. 이후에도 작가는 <마리아비틀>, <사신의 7일> 같은 걸출한 작품을 집필하지만 역시 이 작품이 대표작으로 꼽히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사람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변하지 않는 것인지 자문하게 됐다. 아오야기를 돕는 사람들은 아오야기가 그럴 리 없다, 아오야기 같은 소시민이 극단적인 테러리스트로 변했을 리 없다고 믿으며 물심양면으로 그를 돕는다. 사건의 전말을 아는 독자 입장에선 실로 믿음직한 아군이지만 객관적으로는 이들의 믿음이 순진한 걸 넘어 작품의 편의를 위해 작위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재밌겠다는 이유로 돕는 기루오나 정부를 믿을 수 없다며 아오야기의 무죄를 부정해주지 않는 몇몇 등장인물의 모습이 더 현실적이었다. 그렇게 느꼈는데......


 최근 뉴스에서 두 명의 유명인이 구설수에 오르면서 이 작품의 내용이 달리 보이게 됐다. 왜, 한 명은 구속됐고 한 명은 입장 해명을 해야 하는 그 두 명 말이다. 그들로 인해 현실을 외면하는 팬들과 비난하는 여론에 편승해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요새 적나라하게 드러나 뉴스나 유튜브 등을 접할 때마다 눈살이 절로 찌뿌려진다. 두 명 중 한 명은 나도 꽤 좋아했던 사람이기에 나도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지만, 한편으론 사람은 정말 변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기도 했다.

 내 생각에 선한 사람이 타락하는 경우나 타락한 인간이 갱생하는 경우 모두 가능성은 극히 적은 것 같다. 선함은 곧 자부심이고 스스로에 대한 강력한 자기 억제력이 전제돼야 가능한 것이기에 타락을 의식적으로 자제하고, 반대로 한 번 선을 넘어 타락해버렸다는 낙인이 찍힌 인간은 어느 순간 일이 순조롭게 풀리다가도 스스로에 도취돼 선함을 추구하기보단 선한 척을 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이건 내 생각이다. 하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안 좋게 말하면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라는 말을 사람들이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데엔 다들 직간접적으로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명백히 제3자인 나도 유명인의 몰락에 심기가 불편하거나 박탈감을 느끼는 등 갈피를 잡기 힘들 지경이다. 그러니 몰락한 당사자나 주변인이나 한 번 교류를 가졌던 사람들이 설령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어리석은 태도를 취한다고 해도 그게 그렇게 현실적이지 못한 모습은 아니리라. 라는 생각을 하니 <골든 슬럼버>에서 아오야기를 돕던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은 더 공감이 가게 됐다. 아마 나도 비슷한 상황에서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일 것 같고 내 믿음을 관철하고자 노력할 듯하다. 대놓고 하느냐 마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아오야기의 아버지는 등장할 때마다 어록이 대단해 귀감으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치한이 왜 최악의 범죄자인지 설파하는 것부터 인상적이었는데 테러리스트의 아버지라며 압박하는 기자들을 향해 내뱉는 일갈은 이 작품의 백미였다. 자식을 감싸는 게 부모의 도리라지만 그 정도로 느닷없이 압박이 들어오면 위축될 법도 한데 오히려 기자들한테 그들이 갖춰야 할 직업윤리를 지적한 건 정말 대단했다. 지금 뉴스에 끊임없이 이름이 거론되는 두 유명인 중 한 명은 사실상 결론이 나버렸고 나머지 한 명이 언론의 중립적 태도가 굉장히 절실한 상황인데, 경솔하게 뉴스를 꾸미는 언론인들이 작품의 449~450페이지의 구절은 꼭 읽어줬으면 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느니 뭐니 전부 일리가 있는 일이지만 어쨌든 남의 인생이 걸린 일이잖은가. 사건의 진실이 어떻든 간에 부화뇌동을 조장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마땅하다.


 작중에서 큰 사건을 덮기 위한 희생양으로 아오야기가 지목된 것처럼 지금의 두 유명인도 실제 잘못 유무는 차치하고 희생양으로써 다뤄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린 이 상황 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고 그걸 덮으려고 누가 이 난리법석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신을 곤두세우는 게 상책일 것이다. 물론 잘못한 사람이 욕을 먹는 거야 당연한 거지만 <골든 슬럼버>를 읽으니 언론을 비롯해 큰 기관에서 나온 정보는 아무리 그럴싸해도 일단 의심해봐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됐다. 이러다 음모론자가 되어버리겠구만.

하지만 치한이란 말이야, 무슨 말로 둘러대도 용납이 안 되는 거야. 치한 짓을 할 수밖에 없는 극한 상황이란 게 난 도무지 떠오르지 않거든. 설마 아이를 지키기 위해 치한이 되었습니다, 같은 상황은 없겠지. - 228~229p

어차피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에요.
훌륭하신 놈들일수록 그렇지. 남의 말을 전혀 안 들어줘. - 250p

치켜세웠다 버리는 게 세상 사람들 취미야. - 257p

돈이 아니야, 뭐든 자신의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걸라고. 너희는 지금 그만한 짓을 하고 있으니까. 우리 인생을 기세만으로 뭉개버릴 작정 아니야? 잘 들어. 이게 네놈들 일이란 건 인정하지. 일이란 그런 거니까. 하지만 자신의 일이 남의 인생을 망칠 수 있다면 그만한 각오는 있어야지. 버스기사도, 빌딩 건축가도, 요리사도 말이야. 다들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가며 한다고. 왜냐하면 남의 인생이 걸려 있으니까. 각오를 하란 말이다. -449~4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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