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도시샤대학교 내에 있던 서점에서 발견한 <쌍두의 악마> 원서와 번역본을 함께 찍은 사진이다. 원서는 두 권으로 분권하지 않고 한 권으로 합쳐서 출간했더군. 문고본이라 작고 가벼워 사고 싶었지만, 좋게 말해 그림의 떡이고 결국 애물단지로 전락해 먼지만 쌓일 걸 잘 아는 터라 그냥 구경만 열심히 했다.
어쨌든 10년 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했기에 오히려 좋았다. 처음 읽는 기분으로 추리하며 읽었지만 요번에도 속절없이 추리는 빗나갔다. 사실 난 그렇게까지 근면한 추리소설 독자는 아닌 지라 어느 순간 스스로 머릴 굴리기보단 나도 모르게 인물들의 추리에 쫓아가기 급급했지만 말이다...ㅋㅋ
비록 추리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지만, 탐정역을 맡은 에가미 부장만이 아니라 아리스를 비롯해 여러 인물이 건설적으로 추리를 전개하고 지혜를 모으는 과정은 사뭇 의미 있고 낭만적인 연출이었다. 추리소설의 본분인 추리하는 재미를 정말 잘 구현했으며 결과와 반전에만 힘주느라 과정이 약하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는 여타 추리소설에 경종을 울리는 실로 모범적인 작품이라 생각됐다.
전개를 위해 작위적으로 인물 수만 채워넣은 게 아니라 각각의 인물들이 존재감과 개성이 특출나 작품이 전체적으로 생동감이 넘쳤던 것이나 에가미 부장이 진실을 밝히려는 원동력은 수수께끼를 해결하려는 지적 욕구 때문이 아닌 범인의 악마 같은 계략에 분노했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였던 것도 이 작품의 여운과 호감을 증폭시키는 요소 중 하나다. 자극적이고 휘발적이며 비인간적인 작품 일색이라는 오해를 사곤 하는 추리소설계에 이런 인간적이고 읽을 맛 넘치는 작품이 있다는 건 확실히 좋은 일이다. 이 정도면 거의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한 작품이지 않은가 싶었다.
논리적이면서 깔끔한 범인 지목 과정도 일품이지만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도 압권이었다. 단절된 두 마을에서의 살인을 다뤘고 몇몇 장면은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는데 그 부분을 독자가 상상으로 풀어나가게끔 여지를 남겼다. 이때 범인이 살인을 범하기 위해 혹은 범하기 직전에 지었을 표정과 광기까지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로 <쌍두의 악마>는 밀도 높은 세계관과 설득력을 갖추고 있었다.
수상하기 그지없던 예술가들의 마을은 알고 보니 예술을 향한 형이상학적인 목표 못지않게 인간적인 욕망도 버젓이 있던 탓에 연쇄살인의 물꼬가 터졌던 것, 반대편 마을은 평범한 줄 알았더니 꿈을 향한 광기가 도사리고 있는 등 이 소설에선 두 마을의 대비가 시종 돋보였다. 꽤나 많은 등장인물, 쉴 틈 없이 벌어지는 사건, 적잖은 수수께끼가 나왔고 그 수수께끼를 전부 풀어내지도 않았지만 상술했던 이 작품만의 분위기에 지배당해 오히려 설명이 부족하다는 결핍마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공정하게 추리의 도구를 제시한 덕에 머릴 굴릴 수 있던 것처럼 이 작품은 작가와 독자가 같이 만들어내는 기분마저 느끼게 해줬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용두사미에 무책임한 작품처럼 들리겠지만 실상은 정교한 구성과 세계관이 빛나는 작품이라 강조하겠다. 두 단절된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의 이면엔 범인의 악마와도 같은 계략이 있었고 그 계략의 이면엔 독자의 추리를 유도하는 작가라는 이름의 운명의 신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 작품이 작가의 출세작인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시리즈의 다음 작품인 <여왕국의 성>도 올해 안에 읽을 생각이다. 그 작품도 읽은 지 10년이 지나서 처음 읽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을 듯하다. 그나저나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은 언제 출간하려나? 십 년 넘게 소식이 없는데... 작가가 완성도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는 시리즈인 만큼 시간이 더 걸려도 이해는 간다. 부디 대미를 장식할 그 작품을 차질 없이 접해볼 수 있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