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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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스포일러 있음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능수능란하게 발표하는 오기와라 히로시의 추리소설 <소문>은 다시 읽어도 처음 읽는 것처럼 술술 읽혔다. 캐릭터며 전개며 반전이며 못해도 80% 이상은 기억이 나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그 가독성의 비결로 아주 바람직하면서 흐뭇한 경찰 두 명의 캐미를 꼽을 수 있겠다. 흔히 일존 추리소설 속에서 캐리어 경찰과 논캐리어 경찰이 콤비를 이루면 십중팔구 마찰이 생기는데 이 소설은 너무 순조로운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둘이 잘 맞아 수사가 척척 전개된다.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유능한 캐릭터들이 경찰의 본분, 그리고 가족의 본분을 다하려는 모습은 이미 알고 있는 맛임에도 속절없이 탐을 내는 음식처럼 두 번째 접함에도 흡수가 잘 됐다. 요새 심리적으로 지친 탓에 갈등이 비교적 적은 이 작품 속 캐릭터들에 흠뻑 매료된 듯하다. 
 최근 히틀러와 나치의 몰락을 다룬 영화 <다운폴>을 관람하고 난 직후에 이 작품을 읽으니 주요 소재인 'WOM', 일명 소문을 통한 마케팅의 책임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이 마케팅을 적극 구사한 컴사이트의 사장 쓰에무라는 이렇게 변명하는데, 자기네들이 칼을 팔 때 당연히 누군가 이 칼로 사람을 죽이리라 생각하며 팔지 않으니 그 칼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문제라고. 정말 그럴까? 나는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건 좀 팔아보겠다고 연쇄살인마 이야길 꾸며 소문으로 퍼뜨린다는 것도 그리 정상으로 보이진 않지만 라이벌 회사의 제품을 인위적으로 비방하는 내용이 아닌 이상 그 행위를 법적으로 제지할 수단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 소문을 퍼뜨린 것말곤 딱히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은 쓰에무라나 약쟁이에 불과한 아소가 죽거나 검거당할 때 통쾌함을 느낀 이유는 어째서일까? 그건 바로 그들이 인간을 이성적으로만 이해하려는 오만무도함,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사건의 경우엔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을 뿐 들키지 않을 여지만 있다면 더한 짓을 하고도 남을 작자들이란 인상을 강하게 준 탓이리라 본다. 물론 후자의 발언은 당사자들에게 지나친 발언일 수 있겠다. 어쨌든 그들은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지도 저지르라 부추긴 적도 부추길 생각 자체도 없었으니까. 허나 분명 누군가 영향을 받아 살인마로 각성되고 말았는데 과연 WOM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광고 전략인 걸까? 쓰에무라의 비유처럼 과연 칼처럼 무해한 것일까? 글쎄, 칼과 달리 말엔 아무리 허무맹랑할 지라도 분명히 의도가 있잖은가. 그럼 완벽히 무고하다고 할 수 있을까? 
 소문에 부화뇌동해 쓰에무라와 컴사이트를 비방하고 실제로 살해를 저지름으로써 복수를 완수한 여고생들도 마찬가지다. 쓰에무라는 입을 잘못 놀린 대가, 여고생들은 단순하다 얕본 대가를 치른 것이나 다름없다. 좀 지나친 대가지만 WOM의 힘을 맹신했다면 그 부작용도 충분히 경계해야 하지 않았을까.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 못지않게 소문만 믿고 바로 복수에 옮긴 여고생들도 문제지만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연쇄살인마만 죗값을 치르지 않고 스스로에 대한 연민에 취한 채 죽고 말았군. 어쩌면 이게 제일 코미디였다. 그 어떤 향수로도 가리지 못할 역겨운 냄새가 나는 코미디 말이다. 

 여고생들의 은어를 비롯해 광고계의 은어, 형사들의 은어 등 다양한 분야와 업계의 은밀한 요소를 다뤄낸 작가의 시도와 딱히 막히는 구석 없는 문장은 무난함 그 자체라 독서를 어려워하거나 추리소설에 부담을 느끼는 초보 독자들에게 강하게 어필될 만한 요소라 생각됐다. 나도 10년 전에 이 작품을 읽을 땐 아직 독서 경험이 일천해 이 두꺼운 책을 빠르게 독파하는 스스로에 뿌듯함을 느꼈는데, 이렇게 진입 장벽이 낮은 소설은 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면 허접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소문>은 오히려 그 낮은 진입 장벽이 확고부동한 장점으로 다가왔다. 쉽게 쓴다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니까. 
 작가의 약력을 보니까 최근에도 활발히 신작을 발표하고 나오키상을 비롯한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한동안 잘 읽지 않았는데 앞으로 종종 작품을 찾아 읽어볼 생각이다. 일단 나오키상 수상작인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부터 읽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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