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4



스포일러 있음


 시놉시스만 봤을 땐 그렇게 구미가 당기지 않았는데 작년에 출간된 일본 추리소설 중 <명탐정의 제물>과 함께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라 읽게 됐다. 원래 소문에 끌려 부화뇌동하는 걸 지양하는 편이지만 가끔 이렇게 속는 셈 치고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뭐든 결국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지 모르는 법이라니까. 이 소설이 그랬다. 시놉시스만 보면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탈출이 불가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을 다룬 추리소설이었지만 그 안엔 꽤나 기발한 설정과 디테일한 추리, 그리고 뒷맛이 아찔한 결말이 있어 간만에 흡족한 기분으로 책장을 덮었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작가가 1993년생으로 나와 동갑인데 이만한 작품을 쓰고 바다 건너 독자에게 인정도 받는구나 싶어 질투를 넘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단점이 없는 작품은 아니었다. 일단 문장력이 아직 서툰 편으로, 무의미하게 낭비되는 페이지는 없지만 대다수의 문장이 단지 추리를 위해 서술됐다는 느낌이 강해 문학의 묘미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드문드문 노아의 방주를 연상하는 골때리는 상황이며 슈이치와 마이의 대화, 희생에 대한 작가만의 사유 등이 인상적이었지만 어딘지 얕게 묘사됐다는 게 아쉽다면 아쉬운 부분이다.


 빨리 범인과 범인의 동기를 밝혀내야 하는 조급함이 등장인물 못지않게 작가에게도 있었는지 기껏 흥미로운 소재와 화제를 꺼내놓고도 제대로 갈무리 짓지 못해 아직은 분량의 완급 조절이 숙련되지 못했단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겐 전개가 속도감 있다며 좋아하겠지만, 이 작품이 문장력과 소설적 구조가 평범하거나 부족하다는 지적을 이구동성으로 당하는 걸 보면 이 부분은 조금 더 발전이 필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반대로 말하면 추리에 집중을 다한 작품인 만큼 범인이 살인을 세 번이나 저질러야 했던 동기와 이 범인을 지목하기까지의 추리 과정이 빈틈이 없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작품의 스케일에 비해 범인을 지목하는 소거법의 근거가 너무 소박하다는 것이 처음엔 조금 시시하게 느껴졌지만 탐정역을 맡은 인물의 추리나 작품의 복선이 디테일해 이내 감탄하며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반전! 난 이 소설이 반전의 묘미를 제대로 구사한 것만으로 작품과 작가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게 됐다.


 누누이 말하지만 좋은 반전이란 주인공과 독자의 믿음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반전이라 생각하는데 이 작품의 반전이 딱 좋은 반전에 속했다. 희생하는 자가 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생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반전과 그 반전을 감추기 위해 저지른 세 번의 살인도 모두 합리적이라 통쾌하면서도 산뜻하기까지 했다. 그 반전을 슈이치에게 전하는 심보는 전혀 산뜻하지 않았지만.

산뜻하긴커녕 까놓고 말해 기분 더러웠지. 사랑이 좌절된 것도 모자라 자책하며 죽었을 슈이치를 생각하면 마이는 정말이지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범인이다. 굳이 슈이치를 위로하자면, 설령 슈이치가 마이를 위해 남았다가 같이 생존했다 하더라도 이후 그 둘의 행보가 마냥 좋을 것 같진 않다. 이건 가정에 불과하지만 생존을 위해 마이가 벌인 행동과 그 행동을 재빠른 두뇌 회전과 연기력으로 완수한 걸 보면 만약 슈이치와 마이가 같이 가정을 꾸릴 시 그건 그것대로 굉장히 불안하고 위험한 일이라 본다. 훗날 슈이치가 마이의 마음에 안 드는 날에 이른다면 마이가 슈이치를 제거하는 건 어린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일 테니까... 내가 너무 과몰입한 걸까?

 이게 다 절망적인 결말 때문이다. 슈이치의 마음을 테스트한 것이나, 그 테스트의 결과를 굳이 통보하는 마이의 모습은 그녀가 생존을 위해 저지른 세 번의 살인보다 더 무섭기 그지없었다. 방주에 타기 위해 저지른 짓이야 백 번 양보해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방주에 타지 못한 사람을 조롱하거나 침을 뱉는 건 경우가 다르잖은가. 마이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녀도 슈이치에게 기대가 컸는데 그만큼 배신감도 컸기에 그랬을 테지만... 이것 참 곱씹을수록 뒷맛 사나운 결말이다.


 최근 작가의 데뷔작인 <교수상회>가 출간됐고 현지에서도 이 작품처럼 성경 속 소재를 차용한 작품이 출간했다고 한다. 장래가 촉망되는 작가라 앞으로 작가의 다른 작품도 국내에 많이 소개될 듯한데 <방주>의 결말이 인상적이었던 만큼 다른 작품도 속는 셈 치고 펼쳐볼 것 같다. 다음엔 <교수상회>를 읽을 예정인데 기대되는군.

영화에도 나오잖아.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이 자기는 연인이 있다든가 가족이 있다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장면, 그거, 가족이나 연인이 없으면 죽어도 된다는 소리잖아. 이 세상 사람 모두에게 인권이 있다미나, 개중에서 희생자를 뽑는다면 제일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뽑히겠지?
그건 데스 게임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지혜나 체력이 모자란 사람이 탈락하는 데스 게임이 있잖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죽어야 하는 건, 그것과 마찬가지로 잔혹한 일 아닐까? - 230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