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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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이 작품 주인공인 이름인 미숙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자 이름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내 또래인 90년대생 중에도 간혹 있을 텐데 실제로 미숙이들이 다 '미숙아'라고 놀림을 받는지는 잘 모르겠다. 결국 미숙이도 미숙이 나름이긴 하지만, 요즘 세상에 이름이 미숙이라고 해서 미숙아라고 놀리는 건 너무 노골적일 뿐더러 아재 개그라 핀잔을 들을 수도 있으니 정말로 그렇게 놀리는 사람은 적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세상의 따돌림은 훨씬 더 교묘하고 비겁하고 잔인하니까. 차라리 대놓고 미숙아라고만 부르는 건 귀여운 수준이지. 본작의 미숙이의 고통을 폄훼하자는 건 아니지만, 세상이 점점 나쁜 쪽으로 진화하고 있어서 정말 별 감상이 다 나오게 된다. 

 80년대 중후반 출생의 여성이며 가난한 집안에다 언니가 있고 시인인 아빠를 둔 미숙은 나와 크게 공통 분모가 없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여러 이유로 학창 시절을 잘 보내지 못했고 친구가 극히 적고 그 얼마 되지 않은 친구와도 사이가 소원해지는 일련의 전개는 내 삶과 맞닿은 부분이 많아 알게 모르게 꽤나 감정 이입했던 것 같다. 큰 틀에서, 아주 큰 틀에서 봤을 땐 이 작품도 페미니즘을 근간에 뒀다고 할 수 있으나 내겐 그보단 역경을 딛고 일어선 주인공의 성장 만화로 읽혔다. 이래저래 메시지 보단 몰입에 더 초점을 둔 작품이므로 어두운 작풍임에도 생각보다 부담 없이 읽히는 게 일품인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가장 골때리는 요소 중 하나로 수틀리면 상대를 비방하다 못해 손찌검을 날리기까지 하는 미숙의 아버지를 꼽겠다. 꼴에 지가 남자고 가장이니 어떤 식으로든 권위가 무시되는 걸 견디지 못해 저러나 싶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가장이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서 분량이 은근히 많지 않음에도 등장할 때마다 역겨웠다. 그래도 국어 교사들 사이에선 이름이 알려졌을 정도로 괜찮은 시를 썼던 모양이지만 - 그런데 전공의 특성상 시인인 교수를 많이 봤지만, 실제로 인격적으로 어른이라 느껴지거나 닮고 싶은 사람은 내 경험상 정말 거의 없었다. - 예나 지금이나 시인은 직업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집안 살림에 별 보탬이 못 됐을 테니 실질적 가장은 미숙의 어머니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길 외조하는 아내 앞에서 찍소리도 못해야 정상인데 주인공네 아버지는 어떻게 된 일인지 등장하는 장면의 반 이상이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는 장면이다. 돈 잘 벌어오는 회사원이라면 아내를 패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미숙의 엄마가 사람이 무른 것인지 아무튼 집안의 위계 질서가 신기할 정도로 유일한 남자인 미숙의 아버지 중심으로 돌아가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진짜 요즘엔 좀처럼 상상도 못할 풍경이다. 

 그럼에도 미숙이네 학교의 국어 교사는 아버지의 새로운 시집은 언제 나오냐며,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남다르시다'며 칭찬을 하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국어 교사는 시집만 보고 한 발언일 테니 악의는 없었겠지만, 안 그래도 아버지 닮아 필력이 좋은 것도 탐탁찮은 미숙에게 그 말은 거대한 반발을 샀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심리적 저항감이 없었다면 재이가 아닌 미숙이 문단에 진출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기 그지없는 일이다. 


 재이에 대한 얘기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주변에 친구와 자기 스스로의 상하 관계를 구분하며 상대를 깔보는 사람이 참 많은데 재이도 결국 그 많고 많은 쓰레기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한결 같이 쓰레기였던 아버지보다 미숙에게 더한 배신감을 안긴 인물인데, 처음엔 미숙과 재이 둘 사이의 우정이 어딘지 심상찮아서 이 만화가 백합물인가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 사실 이 부분은 지금 생각해도 모호하다. - 이내 미숙의 가정사를 허락 없이 '문학적으로' 만천하에 까발리는 만행을 저질러 둘의 관계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가슴 아프게도 미숙에겐 재이 입장에선 '만만한 쪼다'로 비쳐진 걸 제외하면 잘못한 점이랄 게 전혀 없고 재이는 철면피라도 깐 듯 나중에 아는 친구를 통해 미숙의 안부를 물을 정도로 무신경하단 것이다. 그렇다 보니 진짜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고 상식이라는 가치에 기대기엔 세상엔 비상식적인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탄식을 시종 굳은 표정인 미숙이 대신 내가 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3부에서 언니가 죽고 남자친구를 만나고 집에서 키우던 개를 미숙이가 독립하면서 데려와 이름을 본래 자신이 정했던 '절미'로 바꾸는 전개를 내내 불안하게 지켜봐야 했다. 언니의 죽음도 결국 아버지가 남긴 유전적인 문제가 원인이라 더 비극적이었는데, 나는 내심 미숙이에게 이보다 더한 비극이 닥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남자친구도 지금까지의 분량 안에선 꽤 건실한 사람인 듯하고 절미도 미숙이가 극진히 보살펴 자기 똥을 먹지 않는 등 우려했던 것에 비해 여운과 희망이 넘치는 결말이라 가볍게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속시원히 해결된 갈등도 없고 적절히 죗값을 치른 인물도 없지만 그럼에도 상관없이 세상은 돌아가고 주인공인 미숙 역시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열린 결말에서 독자인 나 역시 까닭 모를 정도로 큰 위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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