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의 엄지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0
미치오 슈스케 지음, 유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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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오징어 게임>에서 이런 대사가 있었다. 사람은 서로 믿을 만해서 믿는 게 아니라, 그렇지 않고선 기댈 대가 없으니까 믿는 거라고. 한편 이 소설 <까마귀의 엄지>에선 사기는 신사의 범죄라고 궤변이 나오다가 막판에 사기꾼은 인간쓰레기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 결론의 근거는 사람이 사람을 믿는 마음을 이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엔터테인먼트에 치우친 작품치고 참으로 날카로운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까마귀의 엄지>는 미치오 슈스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기본적으로 밝고 유쾌하고 엔터테인먼트적인 성격이 강하고 작위적인 측면이 적잖은 작품이다.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대표작이기도 한데, 이 상이 이름에 비해 그다지 추리소설 같지 않은 작품도 수상이 되는 반면 <까마귀의 엄지>는 반전과 복선이 탁월한 추리소설이다. 뿐만 아니라 마술과도 같은 성격의 트릭이 작품 전반에 녹아든 동시에 인간애까지 겸비된 나머지 여운이 생각 이상으로 짙게 작렬하는 수작이다. 솔직히 이 반전이 없었다면 너무 그림으로 그린 듯한 힐링 일색의 소동극에 그치고 말았을 텐데, 급조된 반전이 아닌 철저히 계획된 반전이었던 터라 기분 좋게 속고 말았다고 감탄했다. 작위적인 부분까지 계산한 트릭은 신박하기 그지없었다. 덤으로 사기꾼과 조류와 손가락에 대한 메타포가 앞뒤 맞게 나열하며 주제의식을 강조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트릭보다 이렇게 내실을 더하는 게 더 까다롭다고도 보는데 작가가 너무 물 흐르는 듯 유려하게 풀어내 최후반부에 감탄하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난 이 작품을 두 번째로 읽었고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크로즈 썸>도 올해 초에 봤다. 사실상 세 번째 접하는 셈이라 물릴 만도 했고 확실히 후반부 이전까진 뒤에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알면서도 지루하게 읽히긴 했다. 아무튼, 소설과 영화가 다른 점은 초반도 아니고 결말도 아닌 후반부의 알바트로스 작전의 내용이다. 여기서 사기꾼들이 쓰는 수법의 시나리오는 똑같지만 이들이 맞게 된 결말이 디테일하게 다르다. 영화가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성격을 가졌다면 소설은 정반대로 작전이 좌절됐음에도 기분은 후련해졌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개인적으로 소설의 연출이 훨씬 좋고 세련됐다고 본다. 이후 과거에 얽매인 타케와 인생이 망가진 자매가 화해하는 전개는 똑같지만 소설의 연출이 보다 인간애가 강조됐고 무엇보다 사기라는 범죄에 대한 작가의 가치관이 느껴져 영화의 각색이 생각할수록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대로 촬영해도 좋았을 것 같은데? 

 처음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사기꾼은 인간쓰레기다' 라는 어떤 캐릭터의 대사가 묘하게 작품 내용과 겉돈다고 생각했었다. 선의의 빅 픽처로 인해 어두운 과거로부터 해방된다는 트릭의 강렬함에 현혹돼 정작 그 직전의 알바트로스 작전에서 주인공 타케가 얻은 교훈을 잊고 있었던 탓이다. 사기는 반드시 성공할 수도 없고 한계가 있으며 무엇보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사람의 믿음을 갖고 논 자는 큰 코 다칠 수 있으니 정말로 어지간한 상황 - 이 작품의 내용에 따르면 복수나 용서는 예외로 쳐도 될 듯하다. - 이 아닌 이상 사기는 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교훈을, 남을 위해서든 자신을 위해서든 그 교훈을 말이다. 


 영화를 볼 때까진 이 작품이 선의의 사기로 인해 인생을 구원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생각했는데, 소설을 다시 읽으니 선의가 없는 사기처럼 쓰레기 같은 행위도 없다는 작가 나름대로의 비판이 구현된 작품처럼 다가왔다. 어떻게 보면 사기를 중심 소재로 다룬 이상 사기의 위험성에 대해 한 번은 진지하게 얘기하는 것이 사기라는 소재를 다룬 소설의 본분일 것이다. 작품은 시종 유쾌하게 진행되느라 그 본분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이 사기꾼이라 주인공의 사기가 성공하느냐 여부가 궁금한 터라 비판이 끼어들 여지가 적었던 것이다. 하지만 의외의 반전과 반전이 담은 주제의식 덕분에 예상치 못한 깨달음, 사기라는 행위의 위험성을 독특하게 전달해 이래저래 예상을 상회해 만족감이 배로 들었다. 

 제아무리 선의든 뭐든, 속는 사람이 알아차리든 못 알아차리든 사기는 위험한 범죄라는 것이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이다. 작가는 캐릭터의 입을 빌려 쓰레기 행위라고 하지만 그렇기엔 작중의 거대한 사기가 낳은 선한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게 효과적이라 그보단 위험하다고 표현을 바꾸고 싶다. 정말 작정하고 사기를 치면 당하는 사람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으며 또 어찌 됐든 간에 인생이 바뀌기에 애당초 남을 속이겠다는 발상 자체가 가볍게 여기기엔 대단히 위험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고 말았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추리소설도 마술이나 사기처럼 사람을 속이기 위해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 간혹 인간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해 속여버리는 작품을 접했을 때 느낀 당혹감이 떠올라 사기는 위험하다는 발언이 그리 과장된 말이 아니겠단 일종의 확신이 들었다. 물론 사기와 추리소설을 동급으로 쳐선 안 되겠지만. 그 안에 담긴 목적이 매우 판이하니까 말이다. <까마귀의 엄지>는 어떠냐고? <까마귀의 엄지>는 한없이 선한 목적으로 집필된 수작 추리소설이다. 

하얀 마음보다는 넓은 마음이 좀 더 낫겠죠.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는요.

사기꾼은 인간쓰레기예요.

사람이 사람을 믿는 마음을 이용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기꾼은 인간쓰레기입니다. - 373~3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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