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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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전편을 읽었을 때 후속작이 나오긴 나오겠구나 하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이렇게 빨리 출간될지 몰랐다. 소재의 특성상 일본 추리소설 팬들도 잘 모르는 시리즈일 텐데 이렇게 농인의 인권을 다루는 독특한 추리소설 시리즈의 후속작을 만나볼 수 있는 건 대단히 감격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농인의 인권에 관심이 많았지? 웹툰 <나는 귀머거리다>를 접한 이후로 개인적으로 농인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를 종종 찾아봤지만 그래도 결코 대중적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시대가 변하고 있는 중이긴 한가 보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 후기에서 인권 단체 쪽으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집필 중임을 엿볼 수 있었다. 1편 <데프 보이스>를 쓸 때만 하더라도 아는 농인이 없었다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걸까,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는 전편에 비해 인권에 대한 이야길 더 많이 해 추리소설이 아닌 다른 장르로 노선을 선회한 느낌이다.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인 것이 농인의 인권도 인권이지만 어쨌든 수화 통역사 아라이의 이야기가 궁금해 후속작을 읽는 것이기도 해 장르는 크게 중요치 않다. 아라이가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이야기 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든 그의 독특한 배경에서 비롯된 시선이 있기에 이 시리즈는 얼마든지 특별하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상당히 비극적이지만 농인에겐 무척 일상적인 일을 다루고 있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 농인들이 의료 전문 통역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된 진료를 받기 힘들어 벌어지는 일들, 의료계 종사자들이나 통역사를 알선하는 사람들이 직업 의식이나 장애인 인식이 결여돼 농인의 고충을 이해하며 그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무신경함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특히 의료계 종사자들이 농인을 다른 환자와 지나치게 똑같이 대해 - 그들은 119 전화도 걸기 힘든데 - 지금 사회가 농인을 위한 배려가 있는 사회라 보기엔 인프라나 인식 등 여러 면에서 아직 부족하단 걸 아라이의 시선으로 적잖이 엿볼 수 있었다. 

 사회적인 문제 못지않게 아라이 개인적으로도 앞으로 힘든 일이 벌어질 것을 예견하는 요소가 이 첫 수록작에서만 두 가지 나온다. 첫 번째는 아라이의 조카인 쓰카사가 농인임에도 일반 학교에 들어가려다 현실적인 문제로 벽에 부딪쳐 엇나가게 된 이야기, 그리고 아라이와 미유키 사이에 딸이 태어나는데 그 아이가 농인이라는 것이다. 전편에서부터 자녀를 갖길 거부했던 것이 바로 태어날 아이가 농인일 것 같아서였는데 어떻게 보면 아라이의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쿨 사일런트' 


 이번 수록작에선 딸에게 어렸을 때부터 보청기를 끼울 것인지 아니면 농인으로서 관련 학교에 보낼 것인지 논의하는 아라이와 미유키의 부부의 고뇌와 아라이가 농인 모델 HAL과 일을 같이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전자에선 전편에서 '농인이라도 자기 자식이라면 굴하지 않고 키울 것'이라고 아라이에게 말한 미유키가 정작 농인인 딸이 태어나자 부모로서 심각히 고민하는 모습을 통해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음을, 특히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는 다른 부모보다 고민이 곱절로 든다는 걸 보고서 아라이가 결혼이나 아이 갖는 것을 그토록 망설였으며 왜 매사에 거릴 두며 살았는지 비로소 와 닿게 됐다. 확실히 현실은 만만하지 않다. 

 농인 모델 HAL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인기를 얻은 것은 당연히 외모의 덕도 크지만 그가 농인이기 때문도 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장애 사실은 어렸을 땐 우울한 기억을 가져다줬지만 모델 일을 하자마자 대중은 값싼 관심으로 하여금 그가 농인이란 것이 '쿨'하다며 판타지를 부여하기에 이른다. 참 엄청난 통찰력이 아닐 수 없는 것이, 실제로 일본 연예게에 비슷한 사례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실화든 아니든 간에 실제로 충분히 벌어지고도 남을 일이라 가장 가독성이 높았던 이야기였다. 농인이라 쿨하다고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수화나 구화가 조금이라도 쿨하지 않다 싶으면 자중하라고 하고, 그가 어떤 드라마에 농인 역할로 출연함에도 정작 농인의 정서를 반영하지 않는 캐릭터 설정에 심한 혼란을 유도하는 점 등이 예사롭지 않게 현실적인 묘사였던 나머지 나 또한 그런 식으로 장애인에게 이상한 환상을 품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됐다. 



 '조용한 남자' 


 아라이와 미유키 부부가 자신의 딸 히토미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 정한 다음에 등장하게 된 이 수록작은 특이하게 아라이가 아닌 이즈모리 형사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그의 시선을 통해 아라이가 득녀한 뒤에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간략히 엿볼 수 있었는데, 농인 가정에서 자란 아라이지만 농인 딸을 키우는 건 전혀 다른 일인지 가정에서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가 신원 불명의 농인의 출신지를 알아내기 위해 시간을 조정해 발품을 팔았다는 것이 어느 정도 일탈을 위해서가 아닌가 싶었다. 비틀린 시선일는지 모르지만 마냥 인간애가 발동한 것으로는 보여지지 않았다. 

 물론 단지 일탈을 위해서 능동적으로 움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수화를 사용하는 농인의 죽음에 남다르게 반응하는 아라이는 이윽고 TV 속에서 찍힌 수화의 내용과 농인의 고향까지 알아낸다. 그렇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됐을 것이다. 소설에선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위에서 얘기한 일탈하기 위해서 말고도 아라이는 농인 자녀가 나이 들어가며 어떤 삶을 살아갈까 이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난 것처럼 보였다. 부모로서 자기 자식을 사랑으로 키울 테지만 세상은 장애인인 자신의 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 현실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은 잘 키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아라이의 불안함 내지는 모종의 각오가 느껴지기도 했던 이야기였다. 



 '법정의 웅성거림' 


 이 이야기에선 크게 두 가지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모두 쌓아온 긴장감에 비해 싱겁게 해소돼 마지막 수록작치고 아쉽게 읽혔다. 쓰카사와의 해묵은 감정이 이런 식으로 해소돼도 되나, 좀 더 극적인 전개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첫 수록작에서의 불길한 암시가 무색해지고 말았고, 회사에서 자신이 장애인이라고 직장 내 따돌림을 했다고 고소한 농인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현재 농인의 처우나 농인에 대한 사회의 부족한 인식을 지적했을 뿐 정작 해당 농인이 무슨 심정으로 회사를 다녔고 고소를 하기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과정은 피상적으로 그려진 감이 있어 묘하게 와 닿지 않았다. 반대로 고소를 당하는 입장도 좀 묘사했더라면 - 가령 그들이 고소 내용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만 보여도 이야기는 훨씬 긴박감 넘쳤을 것이다. - 보다 현실감 있게 다가왔을 텐데... 마지막 수록작은 정보 전달의 성향이 강해서 만족도가 네 편의 수록작 중 가장 떨어졌다. 

 오히려 미유키가 자신의 농인 딸 히토미를 바라보는 시선이 여러모로 복합적으로 보이는 것이 - 혼자만 수화를 가장 못하니까... - 이 시리즈의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아마 후속작이 나올 듯한데 그렇다면 히토미와 언니 미와, 아라이와 미유키 부부 이렇게 4인 가족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 않을까 싶다. 히토미 입장에선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가족 모두가 수화를 할 줄 알아 어떻게 보면 천운을 타고 났다고 해야겠지만, 그건 히토미의 입장일 뿐이고 현실을 같이 살아야 하는 가족들의 입장은 다를 수 있으니 이들 사이에 균열이 나면 어떻게 날 것이고 또 그 균열을 어떻게 잘 봉합할는지 역시 궁금하다. 전편을 읽을 때만 해도 후속작이 더 나올지 반신반의했었지만 이렇게 3편까지 읽으니 4편도 나오고도 남을 것 같다. 부디 내 기대가 빗나가지 않길 바란다. 

어떤 분야든, ‘들림‘과 ‘들리지 않음‘의 장벽을 넘어 세상을 향해 자신의 언어로 자기 생각을 남김없이 전하고 정당하게 평가받는, 그런 누군가가 언젠가는 반드시 나타난다. - 1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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