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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안의 작은 새
가노 도모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8.5
거의 10년 만에 다시 읽은 가노 도모코의 일상 추리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자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유리기린>보다 더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아마 10년 전에 읽었을 적엔 '내 마음대로 뽑는 최고로 재밌게 읽은 일본 추리소설 best 20' 중에 한 작품으로 꼽은 것으로 기억한다. 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니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일상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숨은 보석 같은 작품일 것이라 생각한다. 일단 여자 주인공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이야기의 전반적인 분위기, 수록작들 모두가 이야기에 깊이가 있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추리의 질과 반전의 놀라움이 매우 뛰어나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일상 추리소설의 미스터리의 농도나 질을 얕잡아 보는 것 같은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늘 느끼지만 일상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처럼 핏빛 범죄가 동원되지 않는 사건을 다루는 내용일수록 순수한 추리의 힘이 더욱 빛나는 것 같다. 분석해보자면 일상 추리소설은 아마 대개 앉은 자리에서 이야길 듣는 것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안락의자 탐정물이며,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다루지 않는 장르의 특성상 경찰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래서 탐정역을 맡은 주인공은 경찰의 도움 없이 혼자서 두뇌의 힘을 발휘해 사건의 내막을 밝혀낸다는 점에서 더 경이롭지 않나 싶다.
수록작 중에 가장 재밌었던 건 세 번째 수록작 '자전거 도둑'이고 나머지 수록작은 각기 다른 이유로 조금씩 아쉬웠다. '사랑스럽고도 강인한 여성에게' 라는 서두에서처럼 페미니즘적으로 의미가 있는 수록작도 있었고 장래의 진로를 걱정하거나 꿈이 좌절됐거나 하는 어둡고 탄식을 자아내는 사정을 다루면서 보다 문학성에 치중된 느낌이 없잖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경향이 나쁘단 뜻은 전혀 아니지만, 정작 이야기의 골자가 되는 사건의 양상이나 동기가 너무 싱겁거나 그 풀이가 난해하거나 그 사건을 풀어낸 주인공의 추리가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로 우월하거나 혹은 운이 작용해서 어딘지 불만족스러웠다. 뭐, 이만하면 괜찮은 일상 추리소설들이지만 '자전거 도둑'의 짜임새나 여운이 워낙 좋아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였다.
캐릭터의 매력이나 주제의식도 너무나 중요하지만 추리소설이란 모름지기 추리소설적 사건의 대두와 명쾌한 해결이 있어야만 비로소 좋은 소설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자전거 도둑'은 정말 괜찮은 추리소설이었다. 내가 봤을 땐 이 작품이 <유리기린>의 표제작 '유리기린'보다 더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할 만했다. 자전거를 훔친 도둑의 사정, 어딘지 석연찮은 도둑의 태도, 나중에 밝혀지는 사건의 내막 등이 예측불허하면서 논리정연해 아주 인상적이었다. 특히 이 자전거 도둑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동원된 우산 도둑 이야기도 꽤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인 동시에 공감도 자아내 단숨에 몰입감을 끌어냈다.
돈을 때려박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반드시 흥행하는 것은 아니며 결국 아이디어와 연출력이 돋보이는 시나리오가 호평을 받듯 추리소설도 소재와 사건의 선정성, 빽빽한 분량이 꼭 독자를 매료시키는 건 아니다. '자전거 도둑'이 아이디어와 연출력이 매우 돋보이는 일상 추리소설계의 걸작까진 아니긴 하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라도 작가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다는 걸 충분히 엿볼 수 있는 수작이었다고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작가가 이 책을 통해 강조해 온 주제의식의 측면에선 살짝 동떨어진 작품이란 게 아쉽다면 아쉬운 부분이겠지만 말이다.
요즘 심적으로 여유가 부족한 탓인지 10년 전에 읽을 때와 달리 이 작품만의 인생 예찬에 전보다 몰입하지 못했는데, 주인공과 비슷한 연령대임에도 불구하고 내 시선을 사로잡은 구절이 적은 게 다소 안타깝다. 원래는 두 번 읽었으니 중고 서점에 팔 생각이었는데 이 글을 쓰고 나니까 한 번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읽을 땐 인물의 감정선이나 이야기에 더 몰입하며 읽을 생각이다. 희한한 일이군, 보통 시간을 두고 나중에 읽은 추리소설은 트릭보다 이야기에 집중하기 마련인데 정작 이 소설은 반대로 작용됐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이야기가 시작되려면 일종의 환상이 필요한 거야. - 102p
꿈이라는 건 칵테일에 들어가는 달걀흰자와 마찬가지라서 말이죠.
너무 많으면 비릿해져요. 질투라든지, 욕망이라든지, 그런 요소가 끼어드니까요. - 2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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