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 하 - 수트케이스의 철새
구로다 이오우 지음, 송치민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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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제목의 '가지'는 말 그대로 먹는 채소인 그 가지를 뜻한다. 가지를 둘러싼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가 담긴 단편만화집인 <가지>는 호불호가 갈리는 맛의 가지와 달리 고른 완성도와 재미를 담아낸 작품들이 수록됐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는데, 우리나라가 가지를 유독 호불호가 갈리는 식재료라 여기고 홀대하는 것과 달리 중국과 일본은 굉장히 좋아하거나 평범한 식재료 정도지 질색하며 싫어하는 사람은 적다는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였으면 가지를 소재로 삼은 단편만화집은 나올 일이 없었으리라. 

 그렇다고 오해해선 안 될 게 <가지>가 무슨 가지를 예찬하는 작품이란 것은 아니다. 작가인 구로다 이오우의 경우엔 오히려 가지에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연재를 하며 가지를 공부하게 됐다고 하는데 - 계기가 있다면 마이클 프랭스의 <Eggplant>란 곡을 듣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 이처럼 가지를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작가였기에 이렇게나 흥미진진한 작품들이 수록된 게 아닐까 싶다. 사극부터 SF, 스포츠물과 소소한 웃음이 담긴 일상물 중에 가지가 완전히 핵심 소재로 등장하는 수록작은 몇 편 되지 않는다. 그마저도 가지 말고 다른 채소로 대체가 가능할 정도다. 일례로 가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가 주인공이 가지 반찬이 담긴 도시락을 먹으며 끝나는 등 구색만 갖추는 경우도 있었다. 


 수록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론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안달루시아의 여름'과 '수트케이스의 철새'일 것이다. 이전에 그 영화에 대한 포스팅에서도 한 얘긴데 영화에 비해 원작은 단순하고 담백한 편이다. 하지만 정지된 그림에서도 전해지는 로드레이스의 격렬함과 플롯이 주는 울림은 영화에 뒤지지 않는다. 영화가 워낙 잘 뽑혀서 원작이 초라한 감이 없지 않으니 만약 접한다면 원작을 먼저 접하길 바란다. 굳이 이 두 작품이 아니더라도 다른 작품도 재밌으니 결코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로드레이서 페페말고도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있다. 가지 농사하는 하드보일드한 아저씨의 소소한 농촌 이야기, 프리터족 여자의 빈둥거리는 인생 이야기, 하루아침에 부모를 여의고 동생들과 시골에 있는 친척집에 맡겨져 가지 농사하는 하드보일드한 아저씨와 같이 뭔가를 도모하는 생활력 강한 이야기는 상하 권에 걸쳐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의 이야기엔 특별한 연결고리나 교훈은 없지만 - 어떤 의미에서 가장 '가지'란 소재를 덜 살렸다. - 특유의 나른하고 편안한 분위기와 캐릭터들 덕에 분명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음에도 정이 많이 갔다. 이런 캐릭터들과 비슷한 사람이 주변에 몇 명쯤은 있을 텐데 이런 캐릭터를 맛깔나게 만화 속에 등장시킨 작가의 솜씨가 희한하면서도 감탄스러웠다. 


 반대로 가지의 비중이 꽤나 높은 사극과 SF 작품도 인상적이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사극인 '에도 이른 수확물 먹기'는 화풍도 마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그림체로 그려져 더욱 느낌이 살았다. 에도 시대엔 가지가 상당히 대우받는 식재료라 가지를 둘러싼 암투나 경우에 따라선 사무라이들끼리 피가 튀기는 칼싸움을 벌이기도 한다는 게 어딘지 웃기면서 기이하고 서늘하기까지 했다. 

 SF 작품인 '후지산의 싸움'은 가지와 비슷한 모양과 능력으로 후지산을 침공한 외계 종족이 인간의 기지로 인해 맥없이 당하는 소동을 그리고 있다. 가지가 외양만 따지면 다른 채소에 비해 무시무시해 보일 때도 있는데 그 느낌을 잘 살린 내용이었다고 본다. 여담이지만, 한편으론 동아시아와 달리 가지의 원산지인 인도에 가면 1년 내내 기른 가지들이 어마어마한 높이로 자라난다는 내용의 다른 수록작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아는 가지에 대한 이미지란 극히 제한적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가지 외계 종족이 더욱 무시무시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이 두 권의 단편집으로 작가의 역량이 제대로 느껴져 다른 작품도 접하고 싶은데 처음 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편도 출간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능성이 요원해 보이는데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꼭 접하고 싶다. 가령 원서를 읽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일본도 못 가는 마당에 그건 좀 어려우려나? 아무튼, 비록 아주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지만 빈 말로라도 그런 말을 하게끔 할 정도로 참 매력적인 단편집이었다. 가지를 매우 좋아해서 재밌게 읽은 게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가지는 덤일 뿐이다. 하지만 덤에 불과한 소재로 이토록 다양하게 이야길 뽑아낸 작가의 솜씨가 대박이라 반하지 않고는 못 베길 정도였다. 

감독, 댁한테 가르쳐 주고 싶구먼. 프로라는 건 임무 이상의 것을 해치우는 녀석이라고.

그렇지 않음, 그렇지 않으면 태어난 곳을 떠날 수 없잖아? 나는 먼 곳에 가고 싶어. - 상 5화



구운 가지와 맥주의 만남은 이 두 가지가 밤중에 만나기 힘드니까 귀중한 것이 아니라 귀중함을 알기 힘드니까 귀중한 것이겠지. - 하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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