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치바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9.4 







 치바는 자신에게 배정 받은 인간이 죽을 만한 인간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사신이다. 그는 인간을 일주일 동안 조사한 끝에 언제나 '가'를 보고해 해당 인간의 죽음을 확인하고 다시 새로운 인간을 배정 받는다. 치바에게 인간을 배정해주는 부서는 '어차피 똑같은 내용의 보고를 할 텐데 하루만에 보고 좀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대놓고 태업을 권장하고 실제로 치바는 동료 사신들로부터 너무 열심히 일하는 거 아니냐며 별종 취급을 받기도 한다. 

 치바가 굳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주일을 다 사용해가며 인간을 관찰하는 것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일이니까 할 뿐이다. 추정컨대 그리스 철학자를 담당했을 정도라니까 인간이란 종족을 오랫동안 봐온 만큼 이골이 났을 그에게 새삼 죽음에 직면한, 바꿔 말하면 사신인 자신에게 걸린 인간에게 동정심이 들었을 리는 만무하다. 인간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존재로 여기는 - 오직 인간이 낳은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음악을 듣기 위해 일주일이란 시간을 다 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 치바는 정말이지 인간을 성실히 조사하되 그들에게 감정이입은 하지 않는 쿨한 사신이다. 


 이사카 코타로 최고의 캐릭터라 평가받는 치바가 처음 등장하는 <사신 치바>엔 총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첫 번째 수록작이자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인 '치바는 정확하다'는 왜 추리소설과 관련된 상을 받았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애매한 장르와 허무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추리소설로 명명하기엔 불공정한 단서들과 또 무리수까지 있기에 이 수록작이 수상작이란 게 많이 의아했다. 그렇다고 첫 번째 수록작으로 적합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사신의 보기 드문 변덕을 본 것에 의의를 둬야 하나? 바꿔 말하면 인간의 생과 사는 누군가의 변덕으로 결정되는가 하는 어디에도 쓸모없는 교훈만 남았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수록작들도 다 마찬가지다. 네 번째 수록작은 꿈에 그리던 여성과 교제를 시작한 남성이 반전 없이 죽는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더해졌지만 이야기의 교훈이나 결말엔 신선한 구석이 없었다. 치바가 사신이기에 벌어지는 해프닝들도 일종의 장난처럼 느껴져 잔잔한 웃음만 던져줄 뿐 특별히 인상적이진 않았다. 아무리 좋게 얘기해줘도 첫 번째부터 네 번째 수록작까지는 평작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섯 번째 수록작인 '살인용의자와 동행하다'는 나머지 수록작 전부를 합친 것보다 압도적으로 좋았다. 앞선 수록작들은 치바와 그가 속한 사후세계의 설정을 설명하거나 치바가 사신인 탓에 벌어진 해프닝을 약간의 추리소설적인 기교로 풀어낸 엔터테인먼트였다면 다섯 번째 수록작부터는 7년 뒤에 출간된 장편 <사신의 7일>에 버금갈 만큼 인간과 죽음에 대한 사색이 짙게 녹여져 이 캐릭터와 시리즈만의 개성이 온전히 전달됐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겪는 일보단 관찰하는 일에 가깝다. 누군들 죽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없고 단지 주변 사람이 떠나는 일은 무수히 겪으며 살아가지 않은가. 추측이지만 이사카 코타로가 치바란 캐릭터를 쿨하게 설정한 이유는 단지 그게 멋있고 때때로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서가 아닌 죽음이란 곧 관찰되어지는 것이란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사신에게 있어 인간이 죽기 직전에야 자신의 오해를 깨닫거나 자신의 운명을 바로잡는 아이러니조차 아무런 심리적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데 도리어 이러한 쿨함, 혹은 냉정함이 독자로 하여금 삶과 죽음에 공연히 의미 부여를 하지 않게 만들었다. 우리는 대개 삶과 죽음에 대해 얘기할 때 운명이나 아이러니, 희망이란 단어를 섞어가며 뭔가 멋있게 포장하곤 하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니 그 모습이 사신이 아닌 제3자가 봤을 때 참 부질없게 비쳐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살인용의자와 동행하다'는 살인용의자인 모리오카를 치바 특유의 심드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후반부에서 반전에 도달하는 추리에 비약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대단히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심드렁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일관해 살인용의자인 모리오카를 동정하게 되지만 그래도 선은 지키고 있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짧다면 짧은 삶 속에서 고통 받으며 실수만 반복하다가 끝내 그 무엇도 만회하지 못한 채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단 진리에 형언할 수 없는 서글픔이 몰아쳤다. 동시에 치바처럼 초월적인 존재의 개입 없이는 인간은 자신의 삶 속에서 영원히 갇혀 지내는 것 같아 한편으론 죽음이 곧 절망이 아닌 구원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는 희한한 감상이 남기도 했다. 

 마지막 수록작은 반전도 반전이지만 치바 못지않게 캐릭터의 매력이 빛을 발한 작품이다. 사실 반전의 내용이야 얼추 예상이 갔기에 별로 놀랍지 않았지만 이전 작품의 에피소드나 캐릭터가 언급돼 반가움과 더불어 여운이 제법이었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죽음이 반드시 절망이 아니라는 명제를 깔고 이야기가 진행돼 독자인 나는 물론이고 치바조차 시종 감탄하며 이야기에 끌려다니기까지 해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그간 치바는 모든 일의 원흉이자 뒷정리를 담당하거나 심드렁한 채 인간을 깔보기 직전인 자세로 음악만 듣던 기본적으로 정적인 캐릭터였으나 이 이야기에선 눈에 띄는 깨달음을 얻지 않음에도 그의 내면에 변화가 생긴 듯해 읽으면서 묘하게 쾌감이 솟아났다. 이렇게 가끔 사신도 감탄시키는 인간이 존재하는구나 싶었는데, 뜬금없지만 이 부분에서 내 인생의 목표가 막연하면서도 특이하게 방향이 전환됐다. 사신도 당황하거나 감탄할 정도로 지혜 있는 인간이 되자고. 인간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치바의 모습을 보노라니 나 역시 그에 못지않은 인간으로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이 시리즈는 <사신 치바>, <사신의 7일>까지 총 두 권 나왔으며 세 번째 작품에 대한 소식은 아직 없다. 이사카 코타로가 워낙에 이야기꾼인 지라 아마도 치바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가 언젠가 나오리라 생각하는데... 오래 걸려도 상관없으니 제발 좀 나왔으면 좋겠다. <사신 치바>를 처음 읽었을 땐 그저 쿨하고 독특한 사신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는데 다시 읽으니 느낌이 아주 새로웠다. 두고 두고 읽을 듯하니 세 번째 작품이든 네 번째 작품이든 꾸준히 출간되길 소망한다. 

인간이란 종족은 언제나 자신의 죽음은 제쳐놓는다. - 155p



자주 생각하는 거지만, 동물과는 다른 인간만이 가진 고통스러운 일 중 하나는 환멸이 아닐까요. - 240p



그렇게 부질없이 엇갈리기만 하는 게 인간의 특기 아닌가? - 287p



예를 들면 말이에요, 태양이 하늘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특별한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태양은 중요하잖아요. 죽는 것도 똑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요. 특별하지는 않지만 주위 사람들로서는 슬프고 중요한 일이라고. - 3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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