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7 (리커버 에디션, 양장)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7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3 






 스포일러 있음 


 한 경찰의 삶을 통해 바라본 홍콩의 다사다난한 역사, 범죄와의 전쟁사를 역순으로 되짚는 특이한 형식의 이 소설은 중화권 추리소설의 기수로서 국내 독자들에게 단단히 눈도장을 찍은 바 있다. 이 작품이 출간되고 5년이 넘은 지금 이 시점에서 찬호께이의 <13.67>만큼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중화권 추리소설은 못 들어본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만듦새나 깊이 면에서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읽은 <망내인>도 만만찮게 인상적이었지만 그래도 이 작품과의 첫만남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13.67>에 더 정이 가는 것 같다. 

 최근 홍콩에 대해 공부할 일이 있었는데 문득 이 소설이 떠올라 다시 읽게 됐다. 이번엔 역순이 아닌 시간 순대로, 그러니까 6장부터 시작해 1장까지 읽기로 했다. 내 아이디의 출처인 <내 남자>도 역순으로 구성된 소설이라 다시 읽을 때 그렇게 읽어봤는데, 역순인 소설을 시간 순대로 다시 읽는 것도 은근히 재밌는 일이다. 한 번 시도해볼 것을 추천한다. 



 '빌려온 시간' 


 관전둬인 줄 알았던 화자가 알고 보니 1장의 범인인 왕관탕이고 아칠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경찰이 사실은 관전둬였다고 하는 서술 트릭이 가미된 에피소드. 개인적으로 폭탄 테러를 막는 이 둘의 고군분투보다 화자 왕관탕의 내면 묘사에 더 눈길이 갔다. 소시민이지만 나름대로 정의감도 있고 관전둬 못지않은 두뇌를 자랑하는 그였기에 먼 훗날에 배신할 예정인 형을 무시하고 관전둬를 따라 경찰이 됐더라면 어땠을까... 마치 데스노트를 줍지 않은 라이토가 키라 같은 건 꿈도 꾸지 않고 L과 호각을 이루는 탐정으로 거듭났으리란 <데스노트>의 오바 츠구미 작가의 말을 접했을 때와 비슷한 아쉬움이 들었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뒤틀릴 대로 뒤틀린 왕관탕의 미래가 다소 심란하게 다가왔다. 

 아칠, 그러니까 관전둬는 왕관탕에 밀려 날카로운 추리력을 선보이지 않지만 특유의 청렴함을 드러내는 장면, 그리고 왕관탕의 일갈에 의해 유연한 태도로 사건을 해결하리라 다짐했을 법한 일종의 계기가 드러난 게 인상적이었다.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지만 이후 에피소드에서의 가치관을 보면 그 사건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보통의 인간이라면 자기 탓이 아니라고 넘길 법한데 관전둬라서 그 사건을 계기로 각성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뭐로 보나 딱히 관전둬에게 잘못은 없지만, 그럼에도 반성한 끝에 역사에 남을 경찰이 된 관전둬의 모습이 경이롭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빌려온 공간' 


 개인적으로 가장 이질적이고 재밌던 에피소드였다. 과격 좌파 운동은 시들었지만 이번엔 경찰들의 부정부패로 골머리를 앓는 홍콩을 배경으로 한 흥미진진한 납치극을 그리고 있다. 납치극 자체만으로도 긴박감 넘쳤지만 납치극 이면의 반전이 어마어마했고 관전둬의 속내를 모르겠는 행동도 독자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어 이래저래 책장 넘기는 속도를 늦출 수 없는 에피소드였다. 비록 같은 경찰이지만 부정부패에 찌든 조직원을 척결하기 위해 책략을 펼친 관전둬의 심리 플레이가 빛을 발했다. 그나저나 이 에피소드의 화자인 그레이엄이 다른 에피소드에서 언급이 됐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일한 영국인 캐릭터인 만큼 그냥 단발성으로 등장하고 끝인 게 조금 서운했다. 그의 입을 통해 알게 된 홍콩이란 도시의 특수성이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테미스의 천칭' 


 제목이나 주제의식이 너무 적나라해 오글거리는 면이 없잖았지만 관전둬의 호적수라 할 만한 부패 경찰 TT 덕에 제법 눈요깃거리가 됐다. 그가 마지막에 자살을 한 것이나 그에 대한 관전둬의 해석은 별로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관전둬가 TT의 계략을 간파하고 진노하는 부분이나 관전둬가 증거가 없어 상대의 코앞에서 패배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만든 TT의 활약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스씨 형제와 뤄샤오밍의 등장도 빼놓을 수 없겠다. 스토리의 외적인 부분에서 말하자면, 이 셋이 하마터면 TT의 손에 전원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는 게 가장 소름 끼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가장 긴 하루' 


 전편에서 관전둬가 공언한 대로 체포했던 스번톈의 탈주극을 다룬 이야기. 그와 맞물려 퇴직까지 하루도 남지 않은 관전둬가 아직 녹슬지 않은 천재 형사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이야기기도 했다. 제법 용의주도하고 육체의 고통도 기꺼이 감수하는 범죄자 스번텐을 자기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 손쉽게 갖고 노는 관전둬의 추리력이 가히 환상적이었다. 솔직히 말해 논리적인 추리긴 했으나 이 정도면 신의 경지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뤄샤오밍과 독자를 완전히 바보로 만드는 그의 두뇌 회전엔 정말이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풀이가 불가능한 문제를 만드는 것과 푸는 것 중에서 나는 당연히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에피소드를 보면 푸는 것이 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작가가 쓴 가공의 이야기니까 관전둬가 사건을 해결할 수 있던 것이지만 말이다. 



 '죄수의 도의' 


 본격적으로 법과 위법 사이를 넘나들며 범죄자들의 숨통을 조이는 관전둬의 수 싸움이 드러났던 에피소드다. 알고 보니 탕링은 죽지 않았다는 반전은 다소 작위적인 해피엔딩이 아닌가 싶었지만 앞서 에피소드에서 나름대로 시행착오를 겪은 관전둬였기에 오히려 이렇게 노련하게 범죄자들을 낚는다는 게 더 그럴싸한 전개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저나 오히려 일선에서 물러났기에 더 물이 올랐고 더 정력적으로 경찰로서 움직이는 관전둬의 모습은 뤄샤오밍을 비롯한 후배 경찰들을 완전히 바보로 만드는 동시에 천재에게 퇴직은 있어선 안 된다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결국 한 사람의 인간이기에 합병증으로 인해 숨이 다한다는 게 가공의 인물임에도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흑과 백 사이의 진실' 


 안락의자 탐정이란 고전 추리소설의 클리셰를 비튼 반전과 전성기 때 관전둬에는 못 미치지만 그 못지않게 대담한 전략을 구사해 범인을, 즉 왕관탕을 체포하는 뤄샤오밍의 수 싸움 등 얘깃거리가 한둘이 아니지만, 이전에 말했듯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혹은 자신의 목숨을 유용하게 사용해 경찰의 본분을 다하는 관전둬의 마음가짐이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였다. 왕관탕과 처음 만났을 때 이상으로 청렴하며 왕관탕과 대비되게 올곧게 정의를 수호하는 관전둬의 자세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 에피소드는 다른 에피소드에 비해 사회파적인 면모가 옅지만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정확히는 시간 순대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에피소드답게 가장 큰 울림을 안겨줬다. 

 원래 연출대로 역순으로 읽었을 땐 '빌려온 시간'이, 시간 순대로 읽으니 '흑과 백 사이의 진실'이 제일 묵직하게 다가온다. 중요한 건 어느 작품을 읽건 반드시 반대쪽으로 돌아와 다시 읽고 싶게 만든다는 것이다. 60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극과 극의 모습으로 변한 관전둬와 왕관탕 두 인물의 과거와 현재, 혹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다 보면 인생의 선택의 중요성과 그 선택에 개입하는 도시라는 공간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왕관탕이 특별히 홍콩에서 나고 자랐기에 더 잔인무도한 인물이 된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아마 이 작품을 한 번 더 읽을 것 같은데 그때는 다시 원래 순서대로, 그리고 홍콩 여행 중에 읽으려고 한다. 이 작품 속의 홍콩과 실제 홍콩이란 도시를 실시간으로 비교하는 것이 제법 의미 있는 일일 것 같다. 그렇게 홍콩에 갈 수 있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5년 뒤엔 갈 수 있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홍콩 정세가 예전 같지 않은데 설령 코로나가 종식됐다 한들 이전에 사람들이 열광했던 그 홍콩만의 분위기가 여전할지 잘 모르겠다. 진작에 갈 걸 그랬구나... 

권력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높은 사람은 이상과 신념, 재물로 유혹해 아랫사람이 목숨도 바치게 만든다. 인간은 위대한 목표를 위해서 사는 것보다 평온한 생활을 추구한다. 충분한 이유만 주어지면 기꺼이 노예나 종이 된다. 만약 내가 쑤쑹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그는 나에게 파시스트의 독에 물들었다고 열변을 토할 것이다. 위대한 당과 조국은 절대 그들과 같은 애국동포를 버리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기를 해도 좋다. 그들과 같은 보잘것없는 역할의 사람들은 그저 잊힐 뿐이다. 토사구팽, 토끼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아먹는 것은 천고불변의 이치다. - 587p



조직의 기강을 세우려면 상급자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게 철칙이지만, 이것만은 기억해야 해. 경찰의 진정한 임무는 시민을 보호하는 일이라는 것. 제도가 무고한 시민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정의를 표방하지 못한다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한 근거를 내세워서 경직된 제도에 대항해야 하네. - 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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