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암성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3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5.5







 <기암성>은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서 <813>과 함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알고 있다. 스케일도 무지막지하게 크고 등장하는 캐릭터도 상당히 많으며 각자 개성이 있다. 전지전능한 괴도 신사 뤼팽이야 말할 것도 없고 말만 뤼팽의 적수일 뿐 실상은 뤼팽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 가니마르와 가니마르 못지않게 뤼팽에게 휘둘리는 홈스, 그리고 요번에 새로 등장하는 소년 탐정 이지도르 보트를레 등 흥미를 끄는 요소가 많은 작품이다. 하지만 몇몇 무리수 때문에, 그리고 평소에 프랑스 역사에 흥미가 있다거나 사전지식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이 작품은 황당하고 지루한 작품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전에 읽을 때도 그랬지만 다시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뤼팽이 너무 전지전능하고 위기다운 위기에 처하지 않는 게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탐정이 노력해서 밝혀낸 줄 알았던 진실과 반전들이 사실 모두 다 뤼팽이 짜놓은 판에 장기말처럼 움직인 것일 뿐, 결국에 승리하는 건 뤼팽이라는 식의 전개는 너무 뻔하고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뤼팽이란 캐릭터가 100년 뒤 독자에게도 유효한 매력이 없었더라면 실로 비호감인 전개가 아닐 수 없었는데, 이야기의 주역인 이지도르 보트를레마저 별 매력이 없었다면 완독을 중도에 포기했을지 모르겠다. 비록 뤼팽이 짜놓은 판의 장기말에 불과했을지언정 그 순진무구하고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인 소년 탐정의 존재감은 이번 작품에 있어 정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가히 신의 한 수라 불러도 모자랄 정도였다.


 작가가 전작인 <뤼팽 대 홈스의 대결>에서 홈스를 지나치게 우스꽝스럽게 그린것 때문에 독자들한테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이번 작품은 저번 작품마저 차라리 낫다고 여겨질 정도로 홈스가 치졸하게 그려져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셜로키언이 아닌 나도 이건 좀 아닌데 싶었는데, 전작에서도 홈스가 뤼팽에게 휘둘리긴 했어도 이야기 자체에 결함은 없어서 그냥 이름만 같은 영국 탐정이겠거니 하고 넘아갈 수 있던 반면 이번 작품은 홈스의 등장 때문에 오히려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져서 괜한 등장이란 생각밖엔 안 들었다. 모리스 르블랑이 홈스를 너무 의식해서 뤼팽이란 정반대격인 캐릭터를 만든 것도 좋고 둘을 대결시키는 것까지는 나쁘지 않았는데 이번 작품처럼 홈스가 등장함으로 인해 완성도에 영향이 가니 이쯤 되면 홈스에 대한 작가의 견제가 너무 지나쳤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홈스의 개입 여부와는 상관없이 씁쓸하게 맺어진 결말은 나름대로 여운이 남아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뤼팽이 세상만사 자신의 뜻대로 풀리는 일이 없음을 절감하게 되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좀 짓궂긴 해도 인과응보라는 감상이 나왔다. 뤼팽이 의적이긴 하지만 조직 단위로 움직이고 때론 납치와 협박도 서슴지 않는 요번 작품의 행보를 통해 뤼팽 역시 지금보다 더욱 타락할 여지가 있는 흔하디 흔한 범죄자란 인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유머와 낭만, 다재다능한 솜씨는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이젠 더 이상, 적어도 이 작품에 한해선 그가 의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지금의 내게 있어 뤼팽의 이야기는 한 편의 길티 플레져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여성이라도 인과의 한계를 뛰어넘어서라도 자신에게 반하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의 소유자, 자신이 훔치고 싶은 모든 것을 반드시 쟁취해내려는 행동력과 전지전능함 등 뤼팽은 황당무계하면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선망을 유도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선 유독 비호감으로 다가왔다. 특히 자기 마음대로 은퇴를 결심하고 자신을 추적하는 사람들을 약올리며 장난감 취급하다 최후에 크게 한 방 먹는 장면에선 별다른 동정심도 들지 않았는데, 뤼팽이 아무리 애써도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뿐 결국엔 범죄자라고 작가가 선을 긋는 것 같아서 뜻밖의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예전엔 뤼팽이 독특한 정의관을 갖고 있다고 여겼는데 지금 와선 기상천외한 활극을 일삼는 범죄자로 여겨지는 게 신기했다. 내가 이제는 뤼팽 같은 작자에게 공감을 못할 정도로 변했다는 깨달음이 묘한 느낌을 줬다. 예전엔 참 좋아한 캐릭터였는데... 내 동심이 이미 손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가버린 것 같아 참 시원섭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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