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 - 귀남이부터 군무새까지 그 곤란함의 사회사
최태섭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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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가급적 선입견 없이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평점이 낮은 페미니즘 도서는 읽기 전부터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법이다. 차라리 평점이 아에 2~3점대로 확 낮으면 또 모르겠는데 애매하게 6점대에 있어서 굉장히 편향적인 논리력으로 중무장한 책이 아닐까 지레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책의 서문이 너무나 술술 읽히고 또 독특한 맛이 있어 뒷내용도 궁금해서 마저 읽어내려갔다.

 이 책의 주된 논지 두 가지를 살펴보자면 남자들끼리도 의견을 합치시키지 못하는 개판 5분 전의 팀워크, 남자들의 가부장적 사고는 기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장려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자에 대해 얘기할 때 상당히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고 후자에 대해선 사뭇 동정적인 어투로 논리를 풀어냈는데 어느 쪽으로든 남성 입장에서 썩 달갑게 들릴 어투는 아니다. 하지만 이 말이 정말로 달갑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단지 어투 때문만이 아니라 내용이 대부분 정곡을 찌르는 것들이기 때문이리라 본다. 아마 애매한 평점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치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곡을 찔렸다고 점수로 보복하다니.

 

 저자가 전개는 논리의 밀도며 사전 조사, 인용의 출처 등은 상당히 묵직했다. 조선시대부터 살펴본 한국 남자들의 우울한 자화상, 출처를 알 수 없는 억울함의 근원을 이렇게까지 역사적으로 훑어보리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저자 스스로 인식한 문제에 대해 제법 전문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어 그 노력이 가상했다. 일부 작위적인 해석도 없지않았던 것 같지만 이만하면 인정할 만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의 근원을 살펴보는 것도 좋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정확히는 2010년대를 배경으로 둔 작가의 통찰에는 날카로운 구석이 부족했다. 메갈리아에 왜 그렇게 많은 남자들이 분노했는지에 관해선 제법 정곡을 찌르는 해석을 내놓았지만 저자는 해석만 했을 뿐 결정적으로 본인의 생각은 명확히 털어놓지 않고 두루뭉술 넘어가려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책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의견 합치를 보이지 못하는 남자들 못지않게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현재의 다양한 젠더 이슈에 관해 의견 합치를 하지 못하고 판도라의 상자인 양 경원시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명확하게 이건 좋고 나쁘다고 말해버리면 후폭풍이 상당할 테니 저자는 최대한 세련되고 안전하게 남성 독자들에게 인식의 변화를 촉구하며 결말을 맺었는데, 개인적으로 끝에 가서 소극적인 태도는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로 페미니스트들이 말만 그럴싸하지 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평행선을 달리는 듯한 분위기는 2년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 내 시점에선 비웃음거리라기 보단 지극히 당연한 모습으로 여겨졌다. 결국 페미니스트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정답에 가까운 사람이 아닌 그저 끊임없이 논의를 거쳐 합의점을 찾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하단 것을 지금의 나에겐 그다지 새삼스럽게 다가오지 않았다.


 한때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철학이 아닌 우리의 미래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요즘 들어선 페미니즘이 미래로 이끄는 계단일지언정 미래 그 자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결국 아무리 정당한 이유를 열거하고 그 이유들이 매우 그럴싸하더라도 어느 순간부터 선을 넘었는데 그 행위마저 대의로 정당화하려고 들면 페미니즘이든 뭐든그 철학엔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부분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한국, 남자> 역시 요즘의 내게 있어 은근히 편향된 구석이 없잖은 책이었다. 2년 전에 출간된 남성 저자의 페미니즘 도서마저 편향적으로 읽히다니 유감스럽다. 역시 공동 저자가 참여한 책만이 답인가. 정말로 가능하다면 서로 반대되는 성향의 저자끼리 대담을 하는 책도 나왔으면 좋겠다. 그럼 책이 엄청 두꺼워지겠지만 그만큼 독자로서 유익한 내용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

 끝에 가선 아쉬웠지만, 작가가 본인의 계획과 포부에 맞게 한국 남성의 기원을 훑어 자신의 논리, 한국 남성의 편향된 가치관은 상당 부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된 것이란 주장을 제법 자세하게 전개시킨 점 때문에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던 책이다. 현대에 이르러선 인터넷 문화와 접목돼 더욱 지능적이고 적나라해진 여성 혐오의 양상을 세밀하게 분석한 것도 인상적이었고 대부분 팩트에 근거했으리란 신뢰감을 들게 한 것도 괄목할 만한 부분이다. 젠더 이슈에 관해 정보량과 공부한 시간으로 따지면 이 작가하고 견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은 짧은 분량에도 글이 밀도 있으며 가독성도 좋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읽은 페미니즘 도서들 중엔 논리는 뛰어나지만 막판엔 감성에 호소하는 등 저자의 필력이 불안한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 책의 경우 후반에 급발진한 감이 있어서 그렇지 기본적인 필력이 출중해 이 작가가 쓴 다른 책도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어떤 페미니즘 도서도 나로 하여금 이런 생각까지 들게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약간의 아쉬운 점은 차치할 만큼 흡입력 있는 필력을 선보인 만큼 저자가 쓴 다른 책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특권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고, 내 손에 쥐어지지 않는 모든 것은 나에 대한 (역)차별로 인식하곤 한다. 오로지 내 눈앞의 풍경만이 진실이다. 그 속에서 남자들은 자기 연민과 정당성을 주조해낸다. 이 남자들은 기만자들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자 하는 것을 믿고 있는 이들이다. - 16p




동등한 주체이자 인간이자 동료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성별화되고, 육화되고, 이념화되고, 비하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를 남자들에게 가르쳐왔다. 남자들은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의존해줄 여자를 찾아야 한다는 이상한 성인식을 치러왔고, 스스로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서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은 여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남자들이다. - 2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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