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내인 - 네트워크에 사로잡힌 사람들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9.5







 찬호께이가 내 안에서 신뢰해 마지않는 작가로 부상된지 오래지만 이 작품은 분량이 너무 많아 쉽게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설정도 그리 궁금증을 자아내지 못했고 홍콩의 현재를 그리고자 이 작품을 집필했다는 작가의 말도 좀 부담스럽기 짝이 없어 - 여담이지만 작가의 대표작 <13.67>은 홍콩의 과거를 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읽기 직전까지 꽤나 망설였다. 막상 읽기 시작하자 압도적인 깊이와 매력적인 캐릭터 덕분에 빠른 속도로 읽어내려갔다. 특히 후반부 360페이지를 한 번에 쉬지 않고 읽어보긴 정말 오랜만이라 내 스스로가 뿌듯하기까지 했다. 작가가 긴 분량을 낭비 없이 알차게 써준 덕분에 독자로서 탄력이 붙지 않고 베길 수 없었다.

 이 작품을 얘기할 때 무면허 탐정이자 천재 해커인 아녜라는 캐릭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첫인상은 무례함의 화신이라 그야말로 최악이었지만, 그 무례함에 걸맞는 전지전능한 해킹 실력과 추리력, 심지어 사교력까지 겸비하고 있으며 매사 속이 시원한 언행을 보여 갈수록 매료당했던 캐릭터다.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의 리스베트와 일드 <리갈하이>의 코미카도가 연상됐다. 해킹 실력과 반사회성은 리스베트를, 언변과 위악적인 모습은 코미카도를 특히 닮았다. 차이가 있다면 리스베트가 사교성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에 비해 아녜는 필요에 따라 사교력을 발휘할 줄 안다는 것과, 코미카도가 변호사 업무를 제외하면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인물인 반면 아녜는 다재다능하다는 것이다. 아녜는 두 캐릭터의 장점이 결합된 하이브리드형 캐릭터라 할 수 있는데 특유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남발하지 않으려고 자신만의 규칙을 정한 모습, 그리고 정말로 위악적인 캐릭터인지 그냥 악한인지 쉽게 가늠하기 힘들다는 점이 정말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 작품의 주제의식, 사람을 죽이는 것은 흉기가 아닌 악의라는 작가의 주장에 제대로 적합한 인물이라 아녜의 일거수일투족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망내인>은 미친 가독성과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무분별하게 지면을 차지하는 구절이 없었으며 치밀한 복선과 구성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스토리 텔링에 있어선 묘하게 균형이 맞지 않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모두 아녜라는 캐릭터에 가려져 간과하게 된 단점들이었는데, 일단 후반부에 드러나는 반전의 정체가 비교적 뻔한 편이었던 것과 - 작가의 작품을 다섯 번째 접하다 보니 이젠 작가가 이런 트릭을 애용한다는 게 예상이 됐다. - 작중에선 이미 죽은 존재인 아이의 동생 샤오원의 학창 시절이나 내면 묘사가 부족한 감이 있던 것, 그밖에도 후반부에 사건 전개가 신파적이었다는 점, 엄연히 치뤄야 할 죄가 있는 인물들에 대한 처벌이 미흡했던 것 등 은근히 걸리는 요소가 많았다.

 동생에 대해 관심이 부족했던 아이의 모습과 인터넷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흉기지만 정말로 나쁜 건 그 인터넷을 흉기로 다루는 인간이란 점을 짚어낸 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작가가 후기에서 밝혔듯 후반부에 너무 급하게 써내려간 느낌이 적잖아 나중에는 작가에게 집필 시간과 지면을 더 할애해줘야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무려 700페이지가 넘는 작품한테 이런 아쉬움이 들긴 쉽지 않다. 이런 아쉬움은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 이후로 거의 처음 느낀 건데, 그나마 찬호께이의 문체가 가독성이 좋아 빨리 읽혔고 또 캐릭터들도 인상적이라 허무함이 덜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위에서 내가 지적한 요소들에 대해 누군가가 그래봤자 트집이 아니냐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이만한 분량의 이야기를 오류 없이 끝마친 작가는 정말 존경해 마땅하니까. 기존 기획에 비해 이야기가 끝도 없이 길어진 것치고 작가가 끈기 있게 매달려 결말을 낸 건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다만 주인공의 매력 못지않게 작가가 사건 전개와 여러 캐릭터의 사연에 디테일하게 파고들었던 만큼 조금만 더 균형감이 있는 이야기를 선보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드는 것 같다. 이런 욕심에 가까운 아쉬움을 자꾸 토로하는 걸 보니 내가 이 작품에 어지간히 몰입했던 모양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대표작 <13.67>이 분량은 엇비슷하지만 연작소설집이 아닌 장편소설이란 점에서 무게감이 남달랐다. 그냥 장편소설도 아니라 그것도 정말 제대로 된 사회파 장편 추리소설이라서 숱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 난 직후에 느껴지는 경이로움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작가가 쓴 <풍선인간>의 수록작들처럼 짧고 굵은 단편도 소름 돋는 법이지만 역시 길면 길수록 방향이 흔들리기 쉬운 장편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700페이지 넘게 호흡을 이어온 장편 쪽에 개인적으로 더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작가 본인은 수박 겉 핥기 수준으로 인용했다는 해킹의 원리도 딱 필요한 부분만 전문적으로 잘 기술해 읽는 맛을 더했고 생각보다 결말도 깔끔해 도리어 전에 없이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다. 결말이 깔끔한 한편으로 얼마든지 후속작이 나올 만한 여지도 남겨졌는데, 작가도 후속작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줬음 좋겠다. 그런데 만약 후속작이 나온다면 그때는 적대자라고 할 만한 인물이 등장해야 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탐정의 의뢰 성공 여부보다 의뢰인이 탐정의 전지전능한 능력에 취해 언제 몰락할는지 지켜보는 게 흥미로운 요소였지만 후속작에선 탐정이 본격적으로 우여곡절을 겪어야 이야기가 더욱 흥미로워질 듯하다. 뭐,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김칫국 마시고 있는 느낌은 들지만 그래도 생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긴 하다.


 작가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망내인> 역시 지극히 홍콩스런 특징이 물씬 드러난 작품이었다. 이 흔치 않은 특성이 너무 매력적이라 작가의 후속작이나 작가의 다른 작품에도 부디 홍콩스런 특징만은 건재하길 바랄 뿐인데, 요새 홍콩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예전 같지 않아 작가의 집필 활동이 못내 걱정이 된다. 본래 유명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지만, 독서 인구가 적은 홍콩에서 찬호께이처럼 재능 있는 추리소설가가 나오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라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13.67>로 처음 접하고 이렇게 <망내인>까지 접하니 이 작가가 정말 국보급이란 생각까지 든다. 국내에 소개된 작가의 작품 중 아직 두 권이나 못 읽었다는 게 그저 위로가 될 따름이다.

인간은 자기가 이기적인 동물이란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우리는 도덕을 이야기하면서 겉으로 아주 약간의 악의도 용납하지 못하지만, 여유를 잃으면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죠. 그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게다가 인간은 핑계를 잘 대거든요.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용기도 없으면서 자기 최면을 걸어 편안해지려고 합니다. 쉽게 말해 위선이죠. - 6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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