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시민 -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김서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1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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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7






 스포일러 : 1장의 반전만 써놨음. 그런데 이 반전은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함.


 저번주에 부산으로 여행갔을 때 작가가 부산 출생이란 이유로 가져간 소설이다. 4년 전에 읽을 때와 크게 느낌이 다르지 않았는데, 이번엔 우발적으로 살인을 범한 은주보다 은주의 범행을 목격한 창수에 집중하며 읽으니 또 새로운 맛이 있었다. 작가가 은주보다 공을 들였을 창수라는 캐릭터의 무시무시한 과거사와 그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한 뒷처리는 여러모로 흥미롭게 읽혔다. 추리소설 속에서 작가 지망생은 어딘지 굴절된 인격의 소유자로 등장하는 것 같은데, 그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인물이지만 작가는 나름대로 개성 있게 창수라는 캐릭터를 구현해냈다.

 아무리 작가 지망생이라지만 살인의 이유에 관심을 품으며 그토록 은주에게 접근하려는 창수의 모습이 예전엔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이 부분은 창수가 과거에 비슷한 종류의 경험을 갖고 있다는 설정을 흘려 읽지 않으면서 많이 해소된 편인데 이처럼 '선량한 시민'이라는 작품의 제목과 완전히 따로 노는 캐릭터 설정들이 제법 흥미롭게 다가왔다. 사실 제목 자체는 평범한 느낌이 없잖은데, 시민들의 모습이 선량하게 보였지만 실상은 개차반이라는 투의 작가의 집요한 설정은 꽤 마음에 들었다. 재밌는 건 일반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악독한 인물로 묘사되는 시아버지가 오히려 가장 정상인처럼 비춰진 것에 비해 은주나 창수를 비롯해 은주의 자녀, 남편과 살해당하는 사람들, 심지어 경찰까지도 사리사욕에 눈이 멀거나 본능에 충실하게 사는 주제에 겉으로만 티를 안 내고 있는 등 다들 어딘가 비정상처럼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은주의 살의에 시아버지의 독선적인 태도가 전혀 무관하다고 보긴 어려우나 실질적으론 시아버지의 됨됨이가 예상과는 다르게 그리 나쁘지 않게 묘사된 건 어떤 의미에선 반전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뭐, 그래봤자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인물인 건 마찬가지지만.


 작가가 후기에서도 인정하듯 후반부의 급전개와 연쇄 살인범의 등장에 패닉에 빠지거나 열광하기도 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이번에도 아쉽게 읽혔다. 애당초 작중 배경이 서울인지 부산인지 지방의 소도시인지 명확히 그려지질 않아 소동의 규모가 잘 파악이 안 됐고, 그를 차치하더라도 연쇄 살인범이 동네에 살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작중 시민들이 보이는 반응은 다소 과민하고 어색한 데가 있었다. 이 점은 요번에 비교적 덜 작위적으로 읽혔다는 창수의 모습으로도 해소되지 않는데, 살인에 대한 저자의 통찰이 처음에 비해 후반부에 힘이 빠졌던 게 크게 작용했던 듯하다. 무엇보다 창수가 그토록 궁금해 했던 살인의 이유가 정말로 별로 대단치 않아 남는 게 없다는 것도 호불호 갈리는 부분이었다. 진짜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이유라서 인상적이긴 했지만... 만약 작가가 허무함을 의도한 거라면 대성공이라 할 수 있겠다.

 살인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한 반응이란 측면에선 꼬마비 작가의 웹툰 <살인자ㅇ난감>이 연상됐는데, 그 작품에 비하면 <선량한 시민>은 깊이 면에서 한참 못 미치는 편이었다. 한 소설가는 이 작품에 대해 추리소설의 관점을 깬 것과 예상을 뛰어넘는 결말을 높이 평가했지만 이보다 기존 관점을 파격적으로 깬 작품을 많이 읽은 나로선 우선 그 소설가의 추리소설 독서량이 의심스러웠고, 또 예상을 뛰어넘는 결말이란 말도 그렇게 와 닿지 않았다. 창수가 그 정도로 허술한 건 물론 예상 밖이었지만 이건 달리 말하면 예정된 결말을 위해 작가가 무리수를 던졌다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라 솔직히 실소가 나왔다.


 이러나 저러나 몰입도는 높으니 여행지에서 가볍게 읽기엔 - 분량이 길지 않아 가벼워서 에코백 속에 넣어다니기 편했다. - 좋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무게감 있는 통찰이 담긴 추리소설로 기대하고 읽으면 실망할 확률이 높은 작품이다. 드라마 작가 출신다운 사건이 끊이지 않는 역동적이고 속도감 높은 전개는 기대해도 좋지만 그와 어울리지 않는 허무한 결말은 미리 각오해야 좋지 않을까 싶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허무한 한편으로 깔끔한 맛도 있는 결말이라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른 독자들한테 대놓고 추천을 하지 못하겠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라.

우리 인생에는 복선도 플롯도 없다. 성격은 충동에 의해 무너지고, 기억은 소망에 의해 왜곡된다. 인생은 무질서한데 왜 소설 속 이야기는 그토록 질서 정연해야만 하는가. - 76p




나는 연쇄 살인범이나 귀신, 악마, 유혈 낭자한 죽음 등이 왜 무서운지 이해를 못 하겠다. 진짜 공포, 진짜 지옥은 따로 있다. 그곳은 뜨겁지 않고 차갑다. 모든 고통은 디지털로 변환되어 나와는 무관한, 그래서 귀찮고 언짢은 이야기 혹은 짜릿한 소일거리로 정보 처리되고, 급기야 고통은 비명도 없이 하나씩 사라지고 숨어버리는 지점. 침묵과 인내를 내면화한 개인들이 오직 생활의 무게만을 유일한 고통으로 안고 살아가는 곳. 뜨거움이 사라진, 조용하고 질서 정연하고, 지극히 평화로워 보이는 차가운 지옥. 나는 내가 가진 이 공포를 쓰고 싶었다. - 286~2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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