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포터와 혼혈왕자 세트 - 전4권 (무선) 해리 포터 시리즈
조앤 K. 롤링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수첩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9.3






 스포일러 : 6편은 물론 7편의 스포일러도 있음


 압도적인 분량과 극도의 스트레스를 안겨준 전편과 달리 이번 '혼혈왕자'는 약간 쉬어가는 느낌의 에피소드였다. 물론 결말에선 비교도 할 수 없이 충격적인 장면이 나오고 그전까지 떡밥만 던진 볼드모트의 과거를 본격적으로 살펴가는 만큼 음산한 분위기가 물씬 났지만 그래도 '불사조기사단'에 비하면 훨씬 편하게 읽혔다. 새로운 캐릭터 슬러그혼은 속물적이면서 매력적인 소시민 캐릭터로 깨알같은 재미를 선사했고 이제야 이야기의 주역으로 급부상한 말포이는 연출의 실수인지 별로 긴장감을 주지 못해 해리의 집착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나 역시 공감이 됐다. 왜 저런 놈한테 신경을 쓰지? 그만큼 말포이는 혈통말고 내세울 게 없는 초라한 인물이니까.

 어쩌면 작가는 깐죽거리기만 할 줄 알았던 말포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예상치 못한 짜증을 선사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초반에 해리가 말포이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이나 기대 이상으로 호그와트를 위기로 몰아넣은 말포이의 활약은 놀랍다기 보단 그저 짜증이 날 뿐이었는데 지금은 7권의 내용도 알고, 또 덤블도어가 얼마나 치밀한 사람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 망정이었지 옛날엔 이런 짜증나는 전개를 어떻게 읽어내려갔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때는 꼭 이랬어야만 했냐고 울부짖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는 성인에 가까운 호그와트 6학년생인 해리와 동급생들의 이야기는 1편에 비해 분명 수위가 높아졌다. 이젠 어엿한 한 사람의 마법사로서 제몫을 다할 수 있게 된 해리가 덤블도어를 비롯한 호그와트 교수들과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신력을 선보인다. 기분 울적한 교수(해그리드)를 위로하고 멍청한 교수(트릴로니)를 적당히 무시하고 미워해마지않는 교수(스네이프)는 대놓고 적대하는 등 1편과는 비교도 안 되게 성장한 모습이 눈에 띈다. 1권부터 차례대로 읽어서 간과하기 쉽지만,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이모부 가족들한테 시달린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은 어른이라고 무조건 고개 숙이지 않고 소신껏 행동하며 때론 어른일지라도 자기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등 이래저래 어른이 다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새로운 마법부 장관인 스크림저에겐 자기 의견을 딱 잘라 말하는 등 이전과 달리 기세등등한 모습은 보는 내가 다 속이 시원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번 6편에선 무리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경향도 있었다. 원래부터 어림짐작으로 독단적인 행동도 하고 주변에서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이번엔 유독 집착이란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주변에 아랑곳 않고 막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행히 해리의 추측이 거의 대부분 맞긴 했지만, 결정적인 부분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터라 7권의 내용을 다 아는 입장에선 해리가 답답하게 느껴졌던 적도 있었다. 덤블도어가 한 말이 정확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말이 주변 사람의 조언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론 전편에서처럼 해리가 감정적으로 행동한 게 아니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리를 전개했기에 그를 두고 무모했다느니 막나갔다느니 하는 게 좀 부당한 평가일 순 있다. 스네이프에 관한 선입견을 떨칠 수 없는 것과 그가 이중 스파이로 활동한 내막을 해리로선 알 수가 없는 것 등 해리 입장에선 최선을 다했다고 봐야 한다. 솔직히 해리가 답답하다고 느낀 것도 7권까지 다 봤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예전에 읽었을 땐 해리 못지않게 나도 분노하고 한편으론 실망했던 것 같다. 정말로 덤블도어가 틀렸고 스네이프가 죽음을 먹는 자였다니... 롤링이 이렇게 해리가 결국 옳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킬 리가 없을 텐데 하면서.

 직감이긴 했지만 롤링이 반전을 꾀하는 스타일을 파악했던 예전의 나는 어렴풋이 스네이프의 정체에 대해 눈치를 챘던 것 같다. 어디까지나 눈치를 챘다 뿐이지 논리적으로 추리를 한 게 아니기 때문에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건 아니지만... 아무튼 7권이 아직 집필되지 않은 6권까지의 시점만 놓고 보면 작가가 마지막 에피소드를 남겨두고 긴장을 한껏 끌어올린 연출은 지금 봐도 인상적이었다. 전편에선 시리우스를, 이번엔 덤블도어까지, 해리에게 도움이 되고 의지가 될 수 있는 캐릭터들을 퇴장시켜버려서 7권에서 볼드모트와 치를 싸움의 전망이 상당히 암울하기 그지없었는데 그런 만큼 마지막 에피소드가 더욱 궁금해지지 않았나 싶다. 너무나 가혹한 전개지만 작가가 말하기론 다 전개상 필요하니까 취한 조치였고 그만큼 성과도 컸다고 생각한다.


 스네이프의 정체에 대한 반전을 6권이 끝날 때까지 밝히지 않은 작가의 인내심도 정말 대단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권부터 담금질한 반전을 숨긴 채 작가는 6권에서 덤블도어가 스네이프의 손에 죽게 만듦으로써 독자들의 스트레스를 최고조에 찍게 만든 뒤 바로 다음권에선 기어코 그간 참아왔던 반전을 터뜨려버리니까 말이다. 작가로서 정말 쾌감 넘치는 순간이지 않을까 싶은데 굳이 반전이 아니라 이번 6권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쌓아온 설정과 전편의 에피소드를 집대성하고 해리와 볼드모트의 대결 구도를 강조하여 말 그대로 폭풍전야와도 같은 분위기를 형성한 것도 쾌감이 있었으리라 본다. 7권으로 가는 전초전으로써 이보다 압도적인 연출은 없을 것 같다.

 요번 '혼혈왕자'가 해리와 덤블도어의 유대감, 볼드모트의 과거사, 볼드모트를 쓰러뜨려야 하는 해리의 숙명의 의미에 집중하느라 상대적으로 이전 에피소드들에 비해 내용이 지엽적이게 느껴졌다. 전편의 캐릭터들, 가령 해리와 썸을 탔던 초라든가 전편에서 눈부신 성장을 보인 네빌 등 여러 캐릭터들의 존재감이 이전만 못했는데 - 루나는 그나마 한몫했지만. - 작가가 창조한 세계관이나 캐릭터의 수가 방대한 만큼 지나가는 정도라도 언급한 게 어딘가 싶어 별로 단점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다만 다음 권에선 호그와트가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으므로 안 그래도 등장이 적은 캐릭터들이 막판의 대규모 전투를 제외하곤 거의 등장하지 않다시피 할 텐데 6권에서라도 많이 등장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못내 아쉬움이 들었다.


 7권은 상당히 암울한 내용으로 전개될 것이다. 적어도 위즐리 부부의 닭살 돋는 암구호 장면 같은 개그는 7권에선 더더욱 보기 힘들 것이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빠질 수 없는 재미인 호그와트에서의 학창 생활도 다뤄지지 않을 테니 학생인 해리의 모습은 이번 6권을 끝으로 못 보는 것이다. 해리와 볼드모트 만큼은 아니더라도 시리즈의 팬이라면 호그와트라는 장소 자체에 애착이 가지 않을 수 없는데, 그 호그와트에서의 마지막 생활이 덤블도어의 죽음으로 비극적으로 마무리돼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완결이 머지않아서 그런지 아쉬운 게 한둘이 아닌데... 이래서야 7권을 다 읽은 다음엔 어떤 기분일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왠지 겁나는데.

해리, 심지어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조차 이런 일들이 얼마나 빈번하게 일어나는지 모른단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의 조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 - 3권 28p




그것은 목숨을 건 싸움을 앞두고 경기장에 억지로 끌려 들어가느냐, 아니면 고개를 높이 쳐들고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느냐 하는 것의 차이였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든 그게 그거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덤블도어는 알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어. 해리는 맹렬하게 끓어오르는 자부심을 느끼며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들도 알고 계셨어. 그것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전혀 다르다는 것을. - 3권 2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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