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9.4







 김영하 작가를 주로 소설이나 방송으로 접했던 나로서 작가의 산문을 읽는 것은 생각보다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 책의 출간 시기에 맞춰 작가가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현한 걸 기억하는데, 이 책의 첫 번째 산문의 내용 중 방송에서 언급했던 에피소드도 제법 있던 것처럼 김영하 작가의 산문은 소설을 읽을 때완 달리 방송에서의 박학다식한 모습이 자주 연상됐다. 물론 본업이 작가인 사람답게 말솜씨보다 역시 글솜씨가 압도적이었는데, 작가 지망생 동기 중에 김영하 작가가 요즘 방송에 나와 걱정된다고 말한 동기한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었다. 아직까진 김영하 작가는 작가로서 건재하다고 말하면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 작가는 방송이란 외세에 끄떡없이 자기 길을 잃지 않을 사람인 듯하다.

 작가에 대한 팬심으로 일단 사놨지만 원래 산문을 잘 안 읽어서 사놓고도 방치했던 책인데  최근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김영하가 나오는 방송을 보기도 했고, 또 최근 신인상에 작품을 제출해 일단락을 냈으며 곧바로 연휴 기간을 보내게 된 터라 여행에 대한 욕구가 강렬해진 차에 이 책을 집어들었다. 3월에 코로나 때문에 무산된 핀란드 스웨덴 스탑오버 여행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반년 가까이 허덕거렸는데 이 책을 읽으니 이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읽을 걸 그랬다. 내심 이런 시국에 여행을 가지 못하는 걸 아쉬워한다는 게 너무 철없는 게 아닌가 하고 자책했었는데 그런 마음을 쏙 들어가게 해줬기 때문이다.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이 책이 1년만 더 늦게 출간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 김영하 작가가 이 시국에 대한 글을 써줬음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말 그대로 '여행의 이유'에 대해 썼던 작가인 만큼 무슨 이유에서건 해외 여행은 단념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여행은 거의 해외 여행을 가리키는데, 국내를 두고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 해외로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작가가 워낙에 잘 통찰한 지라 읽는 내내 공감의 끄덕거림이 멈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외에도 외국을 길게 여행하는 것과 아예 몇 년씩 사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지, 여행 가기 전에 품었던 로망이 깨졌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되는지, 애당초 우리는 왜 낯선 나라에 관심을 기울이고 굳이 그곳을 직접 발로 밟고 싶어 하는지, 한편으론 직접 여행지에 가봤음에도 일부밖에 모르고 왜 아이러니하게도 방송 같은 매체를 통해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 여행지에서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았던 경험이 떠올라 우리나라를 여행하는 외국인들에게 호의를 배푸는 심리 등 김영하 작가는 방송에서보다 훨씬 박학다식하고 자유롭고 분량에 얽매이지 않으며 사유를 풀어냈다. 때론 인용하는 에피소드가 너무 어렵거나 옛스러워서 - 그래도 작가답게 확실히 읽는 책도 범상치 않더라. - 집중이 잘 안 된 적도 있지만 '이 책을 쓰기 위해 내 모든 여행의 기억이 필요했다'는 말처럼 자신이 겪은 순간순간의 에피소드에서 얻은 통찰을 유기적으로 묶어낸 덕에 곱씹으며 읽는 맛이 있었던 글들이었다. 저번에 소설집 <오직 두 사람>의 작가 후기가 소설 못지않게 좋았는데 산문도 그에 뒤지지 않아 이 작가를 더욱 존경하게 됐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내 지난 여행 경험들이 떠올랐다. 난 여행 경험을 블로그에 따로 포스팅까지 하고 몇몇 에피소드를 두고서 '절대 잊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것과 달리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잊고 지낸 에피소드가 제법 있었는데 그게 창피했다. 기억이란 게 원래 잘 잊혀지는 법이라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언젠가 나도 여행에 대한 글을 제대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김영하 작가처럼 박학다식하게 잘 쓸 자신은 없다. 작가마다 스타일이 다르고 어쩌고 이전에 애당초 누구보다 잘 써야지 생각하게 되면 아예 시작도 못할 것 같다. 그러니 때가 되면 그냥 써야겠다.

 김영하 작가는 작가답게 글에서 여행을 떠나는 걸 소설을 읽는 것에 비유한 적이 많았는데, 그 비유를 곱씹어보자니 내 독서 취향 못지않게 여행 취향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됐다. 다소 편식을 했던 것 같은 내 여행 취향이 말이다. 김영하 작가는 주변에서 여행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살면서 그렇게 여행을 그렇게 많이 떠났음에도 선뜻 좋아한다고 대답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이 말이 특히 공감됐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여행의 낯섦은 좋아하지만 막상 여행지에서 도전을 꺼리고 맨날 했던 거 보던 것만 고집하는 경향이 있어 - 먹는 것도 먹던 것만 먹는 것 같다. - 과연 내가 여행이 선사하는 낯선 경험을 즐기는 사람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았다. 그래서 여행은 좋아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어딘지 석연찮은 느낌을 받곤 했다.


 이 책은 어떤 여행이 더 의미 있고 보람찬 것인지에 관해 얘기하는 책은 아니다. 나의 배부를 수도 있는 위의 석연찮은 느낌은 <여행의 이유>라는 책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넋두리에 가깝다. 다만 자신의 모든 여행 경험을 녹여내 이만한 산문집을 펴낸 작가의 결과물을 읽으니 어떤 식으로든 내 지난 여행들을 반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블로그의 여행 포스팅은 여행을 다녀왔으니까 의무적으로 쓴 감도 있고 그렇다 보니 대충 사진 올리고 코멘트만 달고 흐지부지하게 끝난 경우가 많았는데... 이거 아무래도 여행에 대한 내 지난 태도를 돌이켜볼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 내가 너무 이 책을 공감하며 무겁게 읽은 걸까 싶은데... 뭐 어때. 그렇게 읽을 수도 있는 거지.

 여담으로 꼭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은 아니지만 갑자기 여행 욕구가 차올라 당장 다음주에 3박 4일로 부산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직 불안한 시국이지만  작년 10월에 방콕을 다녀온 뒤로 여행다운 여행을 못 가본 터라 슬슬 어딘가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책에서 부산이 언급돼서 삘이 꽂힌 김에 가보기로 했다. 내 여행 태도가 지난 방콕 여행과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저쨌거나 근 1년 만에 하는 여행이 무척 기대가 된다.



인상 깊은 구절


그러나 우리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그야말로 '뜻밖'이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걸 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22p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다면 여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 35p


인류가 한 배에 탄 승객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달의 뒤편까지 갈 필요는 없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성장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 148p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 205~206p


인간이든 동물이든 그렇게 모두 여행자라고 생각하면 떠나보내는 마음이 덜 괴롭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환대했다면, 그리고 그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212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