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0년 4월
평점 :
9.7
추리소설은 항상 반전을 마련해놓는 장르의 소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의외로 정형화된 스타일 때문에 반전을 추구하기 힘들다는 약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추리소설은 홈즈나 코난, 김전일 시리즈로 인식되는 본격 추리소설을 가리킨다. 요새는 이처럼 명탐정과 범인이 트릭을 사이에 두고 두뇌 대결을 펼치는 소설만이 추리소설의 전부는 아니지만, 아직도 추리소설의 원형을 제시한 대표적인 추리소설들, 고전 작품들이 추리소설 전체의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추리소설의 불모지이며 아직 해외 추리소설을 선호하는 우리나라의 경우엔 고전 추리소설들의 클리셰에 따른 부정적인 선입견과 그 영향력은 지대하다.
추리소설의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추리소설들을 원망하는 것은 조금 부당한 일인지 모르겠다. 추리소설의 스타일엔 우열이 있을 수 없으며 고유한 매력의 스타일을 처음 고안한 대가들은 지금보다 훨씬 존경해 마땅하다. 다만 후대의 작가들이 추리소설의 클리셰에 안주하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추리소설 애독자가 아닌 문예창작 전공자이자 작가 지망생으로 말하자면 이런 타성에 젖은 태도는 소설을 집필함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하는 태도다.
사실 현대의 추리소설가들 사이에서 '시적 허용'인 양 작위적이고 도식적인 서사나 트릭을 구사하는 것에 대한 경계는 그렇게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명탐정의 규칙>은 본격 추리소설에 대한 해학과 블랙 유머로 정평이 난 작품이다. 요즘엔 흔히 영화화하기 좋은 대중적인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소싯적에 발표한 상당히 패기 있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뷔작 <방과후> 이후로 생각보다 고전을 면치 못했던 작가의 사실상 두 번째 출세작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제는 익숙해진 추리소설 블랙 유머 메타 소설 중에 선구적인 작품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앞서 언급한 모든 미사여구를 통틀어 이렇게 말하고 싶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런 소설도 쓸 줄 안다.'
왠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게 예전만 같지 않은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이 소설을 다시 읽는 게 무척이나 반가우면서 씁쓸했다. 꼭 지금의 작가가 타성에 젖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명탐정의 규칙>이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작품인 만큼 이 당시의 작가와 지금의 작가의 모습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요즘 작가의 소설을 통 읽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말하기 힘들지만, 앞서 말했듯 추리소설의 정체성에 고심했던 작가의 모습이 워낙에 강렬해 10년 전에 읽을 때완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다. 작가가 나중에라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다룬 소설을 다시 한 번 발표하길 기대해본다.
<명탐정의 규칙>은 흔히 본격 추리소설에서 클리셰로 다루는 트릭을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종류별로 까는 블랙 유머 단편집이다. 구태의연한 묘사나 추리 없이 신나게 비웃는 - 누가 오사카 사람 아니랄까봐... 히가시노 게이고의 유머가 발군이었다. - 에피소드도 있고, 때론 허접하고 작위적이라고 자조하기엔 꽤 괜찮은 수준의 트릭과 반전을 구사하는 에피소드도 있어 전체적으로 풍성한 구성의 작품이었다. 작가처럼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추리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공감하며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개인적으로 작가의 작품 Best 10위 안에 들지 않나 싶다. 대놓고 심플한 메타 소설이면서 추리소설답게 의외성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러러볼 요소가 많은 작품이었다.
'Who done it - 의외의 범인'
프롤로그와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느낀 허무함과 유치함을 '공감'이란 키워드로 희석시킨 에피소드. 범인을 추리하지 않고 직감으로 찍으며 탐정의 동선을 따라가기만 하는 추리소설 독자들을 돌려서 깐 게 인상적이었다. 참으로 공감이 되면서도 뜨끔했는데, 밀실 에피소드에서 똑같은 트릭을 몇 번이고 쓰는 추리소설가를 깐 것과 대비돼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작품을 기획한 의중을 알 것도 같았다. 추리소설이 구태의연해지고 타성에 젖게 된 건 불성실한 독자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던 게 아닐까. 하도 정곡을 찔려 되려 책임 전가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게 좋았다.
참고로 탐정을 설명할 때 '명탐정'이라고 쓰는 걸 대놓고 비웃는 게 진짜 웃겼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구나.
'폐쇄된 산장의 비밀 - 무대를 고립시키는 이유'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클로즈드 써클을 다룬 에피소드. 초반에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무대를 고립시키되 좀 더 창의적이고 의미 있는 전개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강조했던 대로 꽤 재밌는 트릭이 나왔는데, 직후에 그 트릭의 작위성을 까는 게 재밌었다. 우리가 추리소설적 재미를 위해 얼마나 부자연스런 전개를 용인했는지 뒤돌아보게 됐다.
'알리바이 선언 - 시간표의 트릭'
트릭을 밝혀주길 바라는 범인과 그 범인의 바람을 무시하는 탐정의 구도가 신박했던 에피소드. 똑같이 트릭을 쓰더라도 추리소설이 마술과 다른 점은 트릭이 반드시 밝혀진다는 것일 텐데, 그 점을 비틀어 아예 트릭을 밝혀주길 바라는 범인을 등장시켜 골때리는 웃음을 선사했다. 작중 인물들 스스로 자신이 추리소설 등장인물임을 알기에 가능한 초월적인 장면이었다. 알리바이 트릭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에피소드에서 나를 비롯해 왜 독자들이 알리바이를 선호하지 않는지 짚어줘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이 세상 모든 추리소설 독자들한테 말이다.
'여사원 온천 살인사건 - 두 시간 드라마의 미학'
일본 추리소설을 좋아해 그 작품들을 원작으로 둔 드라마도 많이 봤기에 이번 에피소드는 유별나게 공감하며 읽었다. 현실적인 이유로 심오한 설정과 전개가 통속적으로 뒤바뀌거나 주 시청자층을 위한답시고 필요도 없는 조연 캐릭터를 넣거나 탐정의 성별도 바꾸거나 종래엔 트릭과 결말까지 바꾸는 부조리를 가감없이 까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속이 다 시원하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나라라고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저 한숨만 나왔다. 원작에서와 달리 존재감이 훼손당하는 범인의 절규가 내 한숨을 대변한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여담이지만 <명탐정의 규칙>도 드라마로 나왔는데, 탐정과 형사가 투덜거리면서 추리소설을 비판하는 특유의 소재가 너무 유치하게 묘사돼 그리 추천하질 않는다. 가급적 원작만 읽거나 못해도 원작을 먼저 읽길 추천한다.
'사라진 범인 - 트릭의 정체'
이 작품의 트릭은 내가 고전 추리소설을 읽을 때마다 항상 납득이 가지 않던 부분인데, 그 점을 오가와라가 속시원히 지적해 그것만으로 마음에 들었던 에피소드다. 어지간히 중성적인 사람이 아닌 이상 성별을 위장하는 트릭은 늘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죽이려면 지금이 기회 - 동요 살인'
무엇보다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 한 번쯤은 떠올릴 만한 아이디어지만 너무 막장이고 무거워서 쓰기 주저됐을 텐데, 이 작품은 워낙 초월적인 메타 소설이라 이런 정신 나간 결말을 그리는 게 용이했던 듯하다. 개인적으로 제목도 마음에 든다. 죽이려면 지금이 기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내가 그를 죽였다 - 불공정 트릭', '흉기 이야기 - 살인의 도구', '명탐정의 최후 - 마지막 선택'
세 에피소드는 이 작품 후반부의 어두운 분위기를 대표하므로 묶어서 얘기해보겠다. 작가가 반전을 신경쓰다 보니 억지를 부리거나, 논리적이기만 하다면 생사람도 잡을 수 있다는 맹점이나, 명탐정인 주인공은 무슨 일이 있어도 화를 면한다는 절대불변의 법칙은 추리소설을 읽을 때 외면하고픈 요소들이다. 이 비관적이기 짝이 없는 요소들을 작가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가감없이 까지만 그 느낌이 전에 없이 무거웠다.
마지막엔 자신이 사랑하는 추리소설을 계속 쓰기 위해선 클리셰에 절대 안주할 수 없다는 파격적인 자가진단이 나와 독자로서 숙연해졌는데, 이 부분 때문에라도 이 작품은 정말 읽을 가치가 충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를 그저 대중적인 작품만 쓰는 소설가란 여기는 사람이 많은데, 그가 이런 의식 있는 소설도 쓸 줄 안다는 걸 꼭 알려주고 싶다.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지금부턴 주변에 의식적으로 이 작품의 제목을 자주 언급해야겠다.
인상 깊은 구절
트릭 따위로 독자의 관심을 끌겠다는 생각 자체가 시대착오적이에요. 밀실의 비밀? 흥, 너무 진부해서 웃음도 안 나오네.- 35p
하지만 알리바이 허점 찾기의 경우 탐정이 범인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으면 수수께끼 자체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허구의 세계에서는 그런 식으로 얘기가 전개되면 범인들이 설 땅이 없어지고 만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해 낸 알리바이 트릭이 풀리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훌륭히 구축된 시간과 공간의 마술이 독자 앞에 공개되는 순간을 내심 두근거리며 기다리는 것이다. -134~135p
이런 의외성에 푹 빠지는 팬들도 있어.
그건 진정한 팬이 아닙니다. - 270p
목 없는 시체가 나오면 그 시체는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추리 소설의 기본이죠. 범인과 피해자가 뒤바뀌는 소설은 하늘의 별보다 많아요. 그렇게 뻔한 걸 정답이랍시고 소설의 끝에 가서 거드름 피우며 밝히는 짓만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 - 28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