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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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제목이 상당히 자극적인 것과 달리 담백하면서 현학적인 추리소설이다. 고뇌하는 추리소설가라 불리는 노리즈키 린타로의 몇 안 되는 장편소설이며 출간 당시 여러 문학상과 랭킹에서 상당히 선전하거나 대체로 1위를 석권했던 대표작이다. 우리나라에는 분량이 두꺼워서 그런지,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라서 그런지 화제가 덜 됐고 작가의 다른 작품 <요리코를 위해>가 더 유명하다. 나는 작가의 작품을 이 작품으로 처음 접해서 그런가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야말로 노리즈키 린타로의 정수가 잘 담겨있다고 특별시하고 싶다. 다시 읽어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이 작품은 정확히 절반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리는 상당히 느릿느릿한 전개가 일품인 작품이다. 오랫동안 은거했던 유명 조각가의 복귀작은 공개 전부터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대중에 공개되기 전에 조각상의 머리가 잘려나가는 불길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조각은 조각가의 딸을 모델로 만든 것이므로... 이야기는 사건 관계자와 우연히 접점이 있던 주인공 노리즈키 린타로가 조각상 머리의 행방을 찾으며 전개되는데 이 탐정역에 해당하는 주인공의 탐문 방식이며 활약이 기존 추리소설 속 탐정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노리즈키 린타로는 상술했듯 고뇌하는 작가로 알려졌는데, 추리소설의 철학적 의미나 현실성에 대한 평론을 많이 저술했고 실제 자신이 쓴 소설에도 이러한 고민을 많이 반영시키다 보니 붙은 별명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가 본인과 똑같은 이름과 직업을 가진 주인공 노리즈키 린타로는 홈즈나 코난, 김전일처럼 비정상적일 정도로 천재적인 추리력의 소유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가 엘러리 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던데, 엘러리 퀸이 만든 엘러리 퀸이 그렇듯 노리즈키 린타로의 노리즈키 린타로도 - 슬슬 혀에 쥐가 날 것 같다... - 여러 가능성 있는 추리를 늘어놓다가 소거법을 동원하며 사건의 윤곽을 가다듬는다. 그런데 가끔 추리의 대전제가 잘못된 경우도 있어 완전히 헛다리를 짚는 경우도 허다한데 이와 같은 탐정의 실수는 단번에 백발백중으로 사건을 해결하던 탐정들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 뭔가 어설프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선사한다.

 얼핏 들었을 때 시행착오가 끊이지 않는 탐정이란 설정이 신선할 순 있어도 매력적이진 않게 보일 것이다. 개인적으론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긴 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이란 한계 때문에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다는 점이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이번 작품 같은 경우엔 이미 누군가가 죽은 뒤에 탐정이 개입한 것이 아닌 아직 사건이 현재진행형일 때 개입한 것이라 이 비극이 더욱 두드러졌다. 아마 이 부분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듯한데, 그림으로 그린 듯한 천재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가 시원스러운 한편으로 동화 같은 측면도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선 현실과 맞닿은 노리즈키 린타로의 세계관이 아무래도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 작품에선 추리소설과 탐정의 존재에 대한 작가의 고뇌만큼이나 돋보이는 것이 있다. 작품의 중요 소재인 조각에 대한 작가의 어마어마한 공부량과 작품에 절묘하게 녹여낸 부분이다. 비단 조각만 아니라 사진, 산부인과학 등 작가가 작품의 디테일에 필요한 모든 설정을 상당히 연구하며 녹여낸 흔적이 보였는데 이 부분이 흡사 기시 유스케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아무튼 조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진행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분량의 설명이 가미되다 보니 자연스레 작품의 분량이 길어졌는데 이 부분에서 난색을 표하는 독자가 많다. 이 작품을 재밌게 읽은 독자들도 설명 때문에 사건의 시동이 늦게 걸리는 점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다. 10년 전에 이 작품으로 작가를 처음 접하는 과거의 나도 그렇고 지금의 나 역시도 미술에 관심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래도 나중에 곱씹어보면 버릴 만한 부분이 없다는 게 어딘가 싶다.

 조각상으로 예고했던 것처럼 참수된 목이 발견되면서부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몇몇 등장인물의 돌발 행동 때문에 사건이 필요이상으로 꼬여 주인공이랑 경찰이 속수무책으로 휘둘린다. 게다가 이번 사건의 경우엔 내막이나 발단에 여러 인물의 오해나 선입견이 크게 작용해 누구 한 명한테 책임을 물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진 것도 크게 한몫했다. 간단히 예로 들면 출생의 비밀이나 중상모략이 여러 인물을 거쳐 심각하게 와전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켜 탐정이 추리를 함에 있어 크게 애를 먹었다.


 그래도 결국 범인을 잡고 사건도 해결하지만 어찌 보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사건이라 씁쓸하기 그지없다. 금방 얘기했듯 누구 한 명한테 책임을 물을 수 없을 정도로 사건이 꼬였지만 사람인 이상 그만한 사건을 겪고 책임감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고 결말을 내는 방식이 참 잔혹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래도 작가 나름대로 소신껏 집필한 터라 불만으로 번지진 않는다. 오히려 이 정도의 비극을 그려낸 게 존경스럽다고 해야겠다. 작가의 공부량이나 인과가 복잡한 사건을 논리적으로 풀어낸 스토리텔링도 충분히 존경스럽지만 이만한 비극을 의식적으로 소신 있게 그려낸다는 점이야말로 다른 추리소설가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한때 노리즈키 린타로의 작품이 잘 번연되더니 요새는 통 소식이 없다. 가급적 이 작가의 책은 다 소장하고 두고두고 읽으려고 하는데... 데뷔작인 <밀폐교실>부터 읽고 싶은 작품이 수두룩하던데 언젠간 이 작품이 다 소개되리라 바라마지않는다. 만약 전부 소개된다면 다시 한 번 시간 순서대로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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